아는 맛이 더 무서운 이유
'히사시노 게이고'라는 작가는 우리가 정말 많이 들어본 일본의 대표적인 추리소설 작가다. 대표적으로 <용의자X의 헌신>, <백야행>,<유성의 인연> 등 일본 추리소설을 이야기 하다보면 한 권 정도는 누구나 읽어봤다는 그 작가, 다작 작가의 대표주자, 그게 내가 가지고 있던 히사시노 게이고 작가의 이미지였다. 아마 영화화된 그의 작품들을 보신 분들도 꽤나 되실 것 같다.
내가 그의 작품을 그렇게까지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한때 추리소설에 푹 빠져서 애거서 크리스티(포와로), 코난 도일(홈즈), 모리스 르블랑(뤼팽)의 작품등 추리소설이라고 하면 거의 손에 집히는대로 다 읽던 시절이 있었다. 장르소설이 대부분 나에게는 그랬던 거 같다. 판타지 소설, 무협소설, 추리소설 같은 책들은 뭔가 사람을 책에서 떨어지지 못하게 만든다. 조금 과장을 보태면 마약같다. 그 세계에 빠지면, 마지막 장이 넘어갈 때까지 멈추지를 못한다. 그리고 나에게 더 맞고, 내가 더 좋아할 책을 계속 계속 찾아 서점 이곳저곳을 뒤적인다. 그러다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러니까 어느 정도 그 장르의 책을 읽고 나면, 스토리에 패턴이 보이고 내가 이제까지 뭐 읽었나 싶은 허무함이 덮쳐온다. 이러한 이유로 '더 이상의 추리소설은 뭔가 질린다, 뻔하다'가 나의 생각이었다. 아마 <용의자 X의 헌신>도 이 무렵에 읽었던 거 같다. 그 뒤에 이 작가의 작품을 몇 개 더 읽었긴 했는데, 이 책 이상으로 마음에 와닿는 책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사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처음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던 12년도에도 난 이 책이 다들 그렇게 재미있다고, 읽어보라고 하던 때에도 사지 않았다.(하긴... 이때는 한창 대학에서 과제로 내주던 책들 소화하기도 벅찼을 때긴 했다.) 또 그렇게 소모적으로 책을 읽고 끝날 이야기를 늘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10년이 지나 2022년, 아직도 절판되지 않은 그 책을 보고 '이 책은 뭔가 다른가?' 싶어 알라딘에서(차마 새 책을 사고 싶지는 않았다.) 중고서적으로 사서 읽었다.
이 책을 다 읽고 처음 든 생각은 '아는 맛이 제일 무섭다.'였다. 분명히 굳이 따지면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나미야 잡화점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니까 '판타지' 소설인데, 이 잡화점으로 들어오는 상담자들의 사연은, 그리고 거기에 자꾸 작가가 등장시키는 환광원이라는 공간은 읽는 이로 하여금 이 사연들을 한데 묶어 어떤 '추리'를 하게 만든다. 궁금해서 책을 중간에 끊기가 힘들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이 상담편지에 답을 주는 사람이 전문 상담사가 아닌 '동네 할아버지', '도둑'같이 전문적이지 않은 '흔한 사람'들의 '정답은 아닐 수도 있지만 진심 어린 대답'이라는 점, 그리고 그것을 통해 물론 상담받은 사람들도 변화하지만, 나미야 잡화점에 들어온 도둑들이 변화한다는 점 등은 읽는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인간적인 따뜻함'을 느낄 수 있도록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판타지+추리+힐링(인간적인 따뜻함), 너무나도 우리가 잘 알지만 알아서 맛있는 소설이 탄생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런 소설은 의도적으로 피해왔던 탓에 너무 오랜만이라 굉장히 반가웠다.
ㅁ 이름 없는 분에게.
어렵게 백지 편지를 보내신 이유를 내 나름대로 깊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이건 어지간히 중대한 사안인 게 틀림없다.
어설피 섣부른 답장을 써서는 안 되겠다, 하고 생각한 참입니다.
늙어 망령이 난 머리를 채찍질해가며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 결과,
이것은 지도가 없다는 뜻이라고 내 나름대로 해석해봤습니다.
나에게 상담을 하시는 분들을 길 잃은 아이로 비유한다면
대부분의 경우, 지도를 갖고 있는데 그걸 보려고 하지 않거나
혹은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알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마 당신은 그 둘 중 어느 쪽도 아닌 것 같군요.
당신의 지도는 아직 백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목적지를 정하려고 해도 길이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일 것입니다.
지도가 백지라면 난감해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누구라도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겠지요.
하지만 보는 방식을 달리해봅시다.
백지이기 때문에 어떤 지도라도 그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당신 하기 나름인 것이지요.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가능성은 무한히 펼쳐져 있습니다.
이것은 멋진 일입니다.
부디 스스로를 믿고 인생을 여한 없이 활활 피워보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ㅁ “분명 나미야 잡화점과 환광원을 연결하는 뭔가가 있을 거야. 눈에 보이지 않는 인연의 끈 같은 것이라고 할까. 누군가 하늘 위에서 그 끈을 조종하고 있는 거 같아.”
ㅁ “뭔가 설명은 잘 못하겠지만…….” 고헤이가 우물우물 말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오늘 밤 처음으로 남에게 도움 되는 일을 했다는 실감이 들었어. 나 같은 게. 나 같은 바보가.”
ㅁ "내가 몇 년째 상담 글을 읽으면서 깨달은 게 있어. 대부분의 경우, 상담자는 이미 답을 알아. 다만 상담을 통해 그 답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거야."
ㅁ "아니, 몇 마디만 써 보내도 그쪽은 느낌이 크게 다를 거야. 내 얘기를 누가 들어주기만 해도 고마웠던 일, 자주 있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