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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 Aug 12. 2019

20. 드라마 극본 공모 당선, 그 이후 (1)

당선작은 회사가 선택하지만, 그 후의 선택권은 당신에게 있어요.

5년 전 나는 두 개의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공모 당선으로 인연을 맺은 회사와의 극본 집필 및 사용 계약서와,

피 한 방울 안 섞인 한 남자와 가족이 되겠다고 약속하는 혼인신고서.

도장을 찍으며 심장이 떨렸다.

그 순간부터 새로운 인생이 펼쳐질 거라 믿었다.

누군가의 아내. 그리고 한 회사의 계약작가라는.


5년이 지난 지금, 아내라는 이름은 유지하고 있지만, 계약작가라는 자리는 잃어버리고 말았다.

계약할 땐 당연히 따라올 줄 알았던 미니 데뷔라는 달콤한 결실을 보지 못한 채, 나의 첫 제작사와 결별했다.


계약 종료 이후 몇 개월을, 그토록 기다려온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린 자신을 원망하고 자책하며 보냈다.

회사를 탓하는 건 너무 찌질해질 것 같아서 <미생>의 대사처럼, 내 노력이 부족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 돌이켜보니, 노력은 부족하지 않았다. 나는 열심히 썼다. 입술이 부르터 터지도록 썼다. 쓰다가 쓰다가 방전되면 조금 늘어져있다가 다시 썼다. 울면서도 썼다. 다만, 노력의 방향이 잘못됐었다는 생각을 이제야 한다. 당선 이후 나는 여러 번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됐는데, 나쁜 길을 택할 때가 많았고, 결국 돌산에서 삽질을 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나쁜 선택이었다는 건 결과론이다. 사람에 따라 같은 선택으로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이 글은 언젠가 원하는 기회를 만나고, 기회를 결실로 이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할 당신들에게 조금이나마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쓴다. 아래 여섯 번의 선택의 순간에 당신이라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상상해 보며, 재밌게 읽어주길 바란다.




1. 당선작은 편성받기 힘들 것 같은데, 회사에서 제안하는 다른 아이템 한 번 개발해 볼래요?


그렇다. 이게 내가 회사로부터 받은 첫 번째 질문이었다.

실망스러운가?


당선된 작품을 어떤 PD가 연출했으면 좋겠는지, 주인공 역할로 생각해둔 배우가 있는지 물어봐줬으면 더 좋았으련만. 회사는 내 당선작을 제작할 의지가 없어 보였다. 아니 그럼 대체 내 걸 왜 뽑은 거냐는 질문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참았다. 질문을 좀 바꿔, 당선작을 제작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는지 물었다. 내 건 대하사극도 아니고 CG 많이 들어가는 판타지도 아닌데...


회사의 답은 너무 '쎄서'였다. 아니 그러니까 그 너무 쎈 걸 왜 뽑... 참자. 그래도 이 회사, 나랑 같이 일해보고 싶다는 거잖아.


회사가 제안한 아이템은 말 그대로 아이템 수준으로, 딱 두 단어였다. (예를 들면 '여자 사관'이나 '남자 기생' 같은.) 특별히 흥미가 가지도, 거부감이 들지도 않는 소재였다. 나는 5분 정도 고민하는 척하다 신중한 얼굴로 답했다.


"할게요."  


그렇게 나는 첫 단추를 잘못 꿰도 한참 잘못 꿰고 말았는데...


선택 자체가 잘못이었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당선작이 아닌 다른 작품으로 데뷔하는 케이스는 적지 않을 거다. 회사에서 시작된 기획으로 좋은 작품을 만들어낸 작가들도 많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조금 냉정하게 상대의 의중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나의 당선작에 드러난 개성과 장점을 높이 사서 그걸 발현할 수 있는 또 다른 작품을 만들고 싶어 하는 건지, 아니면 회사에서 제작하고 싶은 작품을 그들 입맛에 맞게 개발해줄, 적당한 필력을 갖춘 신인작가를 필요로 하는 건지 말이다. 후자의 경우, 스릴러 마니아에 당선도 스릴러물로 됐는데, 생전 본 적도 없는 로코 대사를 쓰느라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 당신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


두 번째로 고민해봐야 할 건 아이템이다. 그 아이템을 내가 하고 싶은지, 할 수 있는지, 시간을 두고 머리를 좀 굴려봐야 한다. 제안받은 아이템은 끌리지 않지만 이 회사와는 같이 일해보고 싶을 때, 당선작 외에 회사에 보여줄 수 있는 다른 작품들, 그러니까 총알들이 더 있다면 또 다른 기회를 만들 수 있다.


나는 쓸만한 총알도 갖고 있지 않았고, 모처럼 온 기회를 놓칠까 봐 겁이 나서, 의심도 고민도 없이 주어진 미끼를 확 물어버렸다.


회사에선 처음 시도하는 장르의 작품이라 기대가 컸던 것 같다. 취재를 지원해 줬고, 기획회의엔 기획PD 3~4명이 참석해 성의 있는 피드백을 해주었다. 인물과 줄거리가 어느 정도 나와 기획안 초고를 완성했고, 내부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캐스팅 얘기까지 나올 땐 들뜨는 마음을 티 내지 않으려고 애써야 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찜찜하고 불안한 기운이 남아있었다. 내 눈에 기획안은 무난하긴 했지만, '반짝이는' 무언가는 보이지 않았다. 열심히는 썼지만, 당선작을 작업할 때처럼 확 몰입되는 기분은 느끼지 못했다. 기획안은 이만하면 됐고 대본을 뽑아보자는 얘기가 오갔다. 작업 속도가 빠르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밤을 새 가며 1, 2회 초고를 써냈고, 그 또한 반응은 나쁘지 않았지만, 스스로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게 재미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때, 내 앞에 두 번째 갈림길이 펼쳐졌다.


2. 작업하는 거 보니까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계약, 하시죠?


아이템을 받고 첫 6개월은 월급을 받는 '기획작가'로 계약해 일했다. 그 6개월의 계약기간이 끝나갈 무렵, 회사는 또 다른 계약서를 내밀었다. 회당 얼마에 몇 회로 계약하는 '진짜' 작가 계약서 말이다.


편성은커녕 연출도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편성 가능성이 있다는 회사의 말을 믿었다. 믿고 싶었다. 함께 당선된 작가들 중 나만 집필 계약까지 왔다는 사실에, 그 뿌듯함에 취해서, 작품에 대한 불안함 같은 건 잊어버렸다.


계약을 한다는 건 마음속으로 이미 정해놨지만, 극본 집필 계약은 처음이기도 했고, '법적 책임'이라던가 '집필료 3배의 위약금' 같은 표현들이 무서워서, 선배 작가에게 계약서를 보내고 검토해달라 부탁했다. 조언을 받아 몇몇 세부사항에 대한 수정을 요청했고, 대부분은 받아들여졌다. 한 가지, 가장 중요한 걸 놓치고 지나갔는데, 그건 다름 아닌 '계약기간'이었다.


계약기간은 '계약체결일로부터 계약한 횟수의 극본 집필 및 본 방송 드라마가 종료되는 시점까지'였고, '3년 안에 편성이 결정되지 않을 시 갑과 을은 본 계약의 종료 및 연장에 대해서 재협의'하자고 적혀 있었다. 그땐 3년이 그렇게 긴 시간인지 몰랐다. 3년 동안 4개의 기획안과 그에 따른 수많은 버전의 대본들을 써내게 될 줄도 미처 몰랐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다른 건 몰라도 계약기간만큼은 2년 이내로 줄여서 계약할 것 같다. 2년 안에 편성을 못 받으면 어떡하냐고? 계약을 연장하면 된다. 작품이 나쁘지 않다면, 회사에선 계약 연장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 복잡한 일도 아니고, 돈 드는 것도 아니니까. 기간을 길게 잡았다가 중도에 해지하는 게 훨씬 복잡하고, 돈도 깨지는 일이다.


고료는 신인작가로서 많지도 적지도 않은 수준이었다. 돈을 더 줄만한 작가라는 객관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에, 고료에 대해선 따로 말할 게 없었다. 이걸로 방송하고 나면 다음엔 두 배는 받겠지, 그다음엔 또 그 두 배는 받을 거고. 혼자 계산해보며 어깨를 폈다.


"이렇게 계약하시죠."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계약금까지 입금되자, 다시 불안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대본을 좀 더 수정해서 다음 편성회의에 올려보자는 말에는 반가움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공모는 지망생들끼리의 경쟁이지만, 편성회의는 경력도 필력도 나보다 훨씬 앞선 기성작가들과의 싸움이다. 그래도 이기고 싶었다. 담당 기획PD가 요구하는 수정 방향에 맞춰, 초고보다 더 공을 들여 2고, 3고를 썼다.


회의에 참석하는 인원은 한 명씩 한 명씩 줄어들고 있었다. 나중엔 나를 담당하는 (나와의 계약을 소위 '밀었던') 기획PD 한 명과 일대일로 회의하는 날이 더 많아졌다. 대본 쓸 땐 기획안만큼은 여러 사람 의견을 받는 게 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을 텐데, 나는 내 대본이 재미가 없어서 회사에서 나를 방치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하고, 의기소침해졌다. 그럴수록 PD의 의견에 매달렸고, 사소한 부분까지 고치고 또 고쳤고, 다시 고치려고 대본을 읽어보며 '이게 내가 쓴 대본이 맞나?' 멍해지기도 했다.


마감일에 맞춰 '편성회의용' 기획안과 대본을 보내고 나서, 며칠이나 몸살을 앓았다. 이렇게 나약해서 온에어 때는 어떻게 견디나 겁이 났다. 그래도 견뎌보고 싶었다. 몸살이 아니라 더한 걸 앓더라도 온에어까지 가고 싶었다.  


3. 하던 거 수정해서 다음 편성회의 때 다시 내볼래요, 이만 접고 새 아이템 개발할래요?


"그걸 제가 결정하나요?"

"그럼요. 작가님이 결정해야죠."


편성회의에서 아쉽게 탈락했다는 PD에게, 탈락한 이유가 뭐냐고, 뭐가 문제였던 것 같냐고 물었다. PD는 본인이 판단한 내 대본의 '약점'을 말해주었고, 그건 나도 인정하는, 사소하지 않은 약점이었다. 문제는 그게 아이템 자체의 특성에서 오는 약점, 그 아이템으로 쓰려면 피하기 어려운 약점이었다는 거다.


발상을 전환할 수 있는 유연함과 상상력,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으려는 끈기를 가진 훌륭한 작가였다면, 그 약점을 극복할 새로운 수정 방향을 찾을 수 있었겠지만... 내겐 그 어느 것도 남아있지 않았고, 길이 안 보였다. 그렇다고 1년 가까이 매달렸던 기획을 버리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것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떡하나.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하자. 생각을 해야 하는데... 나는 회의 자리에 앉아있는 것만도 버거웠고,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자꾸만 졸음이 왔다. 지쳤던 것이다.


판단이 서지 않을 땐 판단을 하면 안 된다.

그런데 나는 몸살이 가시지 않은 그 심신 미약의 상태에서, 두고두고 후회할 선택을 하고 만다.


(다음 글에 계속 쓸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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