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유 Apr 18. 2019

19. 실전, 드라마 공모 준비 (5) 대사와 지문

대사는 드라마 대사 같지 않게. 지문은 소설 같지 않게.

너는 왜 대사를 드라마대사처럼 쓰냐?


내가 들은 말은 아니다.

기획작가 겸 깍두기 보조작가로 일하던 시절, 초보작가 서너 명이 새로 기획할 - 아직 집필 작가는 정해지지 않은 - 드라마의 초고를 한 편씩 나눠 쓴 적이 있는데, 그 때 한 작가가 회사 대표에게서 들었던 지적이다.


대사를 대사처럼 쓰는 게 왜 문제지? 잘하고 있는 거 아닌가? 그 땐 그 지적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몇 해 전인가 개그콘서트에 드라마 촬영현장을 소재로 한 코너가 있었다. 상황들은 인과관계 없이 흘러가고, 연기는 과장되고, PD는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자극적인 장면을 자꾸 추가한다. 그리고 대사는? 클리셰 범벅이다. 다른 개그 코너들에서도 수없이 웃음거리가 된, "너답지 않게 왜 이래?", "나다운 게 뭔데요?" 세트가 대표적. 처음 이 대사를 쓴 작가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서운해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다. 드라마는 너무나도 '현재적'인 장르라, 몇 년만 시간이 흘러도 촌스러워지기 쉽고, 심금을 울렸던 대사들은 두세 번만 반복되도 올드한, 오글거리는, 현실에선 쓰지 않는 문어체의 문장이 되어버린다. 


대표가 말했던 '드라마대사 같은 대사'는 아마 이렇게 뭔가 인위적이어 보이는, 그래서 가짜처럼 보이는 대사들이었을 거다. 드라마는 물론 가짜지만, 가짜처럼 느껴지기 시작하면 끝이다. 


그럼 드라마대사 같지 않은, '진짜' 같은 대사는 뭘까? 


그리스 비극처럼 장엄한, 한 편의 시처럼 문학적인, 인생의 진리를 알려주는 진중한 느낌의 대사보다는, 힘을 좀 뺀, 우리가 평소에 쓰는 쉽고 평범한 단어들로 이루어진, 가르치려 하지 않지만 마음에 와닿는 대사들이 그에 가까울 것이다. 평범하지만 와닿는 대사라니, 말이 쉽지, 그걸 대체 어떻게 쓰냐고? 나라고 비법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다만 하루종일 드라마만 생각하는 열혈지망생들에게는, 드라마에만 빠져있지 말고 진짜 세상으로 자꾸 나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드라마만 보면서 살면, 드라마 대사 같은 대사 밖에 안 나온다. 특히, 좋아하는 드라마라고 해서 대본 전체를 필사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 작가 특유의 대사투를 따라하게 될 수 있어서, 대본 필사는 권하고 싶지 않다. (다른 글들에서도 여러 번 썼지만, 기성 작품을 보며 공부할 때는 구성 위주로 하는 편이 효율적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진짜 세상에서, 진짜 사람들이 하루종일 쏟아내는 그 수많은 말들을, 언젠가 꺼내 써먹을 수 있도록 우리의 대사주머니에 차곡차곡 넣어두자. 우리가 실제로 주고받는 말들은 두서없고 지루하기 쉽다. 반면 대사에는 의미가 있고 흐름이 있어야 한다. 의미와 흐름은 만들면 된다. 다만 그 바탕이 될 단어, 문장, 말투는 생생하게 살아있어야 하고, 그 생생함은 진짜 세상에서 온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예외도 있다. 


현실에선 절대 쓰지 않을 것 같은, 썼다가는 욕 먹을 것 같은 오글거리는 대사들이 드라마의 매력이 될 때도 있다. 김은숙 작가의 로코들이 그랬다. 하지만 이 안에 너 있다, 언제부터 그렇게 예뻤냐, 나 너 좋아하냐 같은 대사들이 용서되는 건, 그 대사를 던지는 사람이 이동건, 현빈, 이민호이기 때문일 공산이 크다. 인지도도, 외모적인 매력도 별로 없는 배우가 그런 말을 하고 있다면 그냥 채널이 돌아갈 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배우 덕이 다는 아니다. 썸 타는 남녀의 핑퐁처럼 주고받는 대사들(끼부림들)을 넋을 놓고 보다 보면, 도자기를 빚듯 대사를 빚어내는 장인의 숨결이 느껴진다. 어느 인터뷰에서 이 작가는, 자신은 실제로 연애를 할 때 그런 대사들을 친다고,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지 않냐고 말했었다. 당신에게 그 정도의 끼가 내장되어 있지 않다면, 제2의 김은숙이 되겠다는 꿈은 고이 접어두는 게 좋을 것 같다. '대사빨'을 위한 노력에는 한계가 있다. 


<추적자>, <황금의 제국>, <펀치> 등으로 큰 사랑을 받은 박경수 작가도, 다 모으면 책 한 권 분량은 될 만큼 '명대사'들을 많이 썼다. 썸 타는 관계가 아닌 권력투쟁의 관계에서 주고 받는 대사들은 탁구공이 아니라 칼과 창처럼 날카롭고 짜릿하다. <추적자>가 종영한 뒤 열린 특강에서 명대사에 대한 질문을 들은 작가는, 드라마 후반부 시간에 쫓기다 보니 대본을 그럴듯한 대사들로만 때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몹시 괴로웠다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그 아쉬움에 아주 조금은 공감할 수 있었다. 


명대사는, 드라마를 보지 않은 사람이 그 문장만 따로 봤을 때는 전혀 와닿지 않는, 드라마의 흐름 속에서만 울림을 줄 수 있는 대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착하다."


이 이상 평범할 수 없는 단어고 문장인데, <나의 아저씨>의 애청자였다면 이 세 글자를 보고 떠오르는 장면이 있을 거다. 그 씬을 봤을 때의 (아마도 울컥했을) 감정이 다시 올라올 거다. 씬에 대한 설명은 따로 하지 않겠다. 시청자의 마음을 뒤흔들 명대사를 만들려고 애쓰기 전에, 대사를 할 사람과 들을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자. 




'진짜처럼 느껴지는' 대사가 좋은 대사라는 얘기를 길게도 했다. 그만큼 어려운 얘기이기도 하다. 


이제 대사 쓰기에 대한 좀 더 단순하고 간단한 팁들을 몇 가지 더 소개하려 한다. 보조작가로 일하며 선배들에게 배웠거나 계약 후 PD의 피드백을 받으며 느꼈던 것들이다. 


"좋은 대사는 다 '거짓말'이야." 

작가인지 PD인지, 누가 했는지는 가물가물하지만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는 말이다. 진짜처럼 쓰라더니 갑자기 왠 거짓말이냐고? 연애할 때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상처받기 싫어서 마음을 숨기고 거짓말을 했다. 하루종일 그 사람 전화만 기다렸으면서, 너무 바빠서 널 떠올릴 새도 없었다고 말한다. 제발 내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는데, 꺼지라고,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악을 쓴다. 우린 누구나 거짓말을 하며 살기 때문에, 드라마를 보면서도 거짓말 뒤에 숨은 진심을 읽을 수 있다. 구구절절 자기 속내를 드러내는 대사보다 거짓말 한 마디가, 또는 침묵이 더 큰 임팩트를 줄 수도 있는 것이다. 


또 하나, 대사가 앞서가선 안 된다. 

연애할 때를 다시 한 번 떠올려보자. 참고 참았던 '사랑해'라는 말을 해버린 순간, 어쩐지 감정이 좀 식어버린 것 같은 느낌에 당황했던 기억이 있는지 모르겠다. 드라마의 멜로도 마찬가지다. 충분히 익기 전에 사랑을 고백하면 김이 새버리고 만다. 인물을 빨리 소개하고 싶은 마음에 대사가 먼저 달려가는 경우도 있다. 시청자들이 '저 사람, 괜찮다'고 느끼기도 전에, "본부장님 정말 잘생기지 않았어요?", "성격은 또 얼마나 젠틀한데요!"처럼 인물들(그것도 중요하지 않은 인물들)이 앞서 말해버리면, 본부장님의 매력도는 아마 더이상 올라가기 힘들 거다. 연속극에는 이런 장면들이 많이 나오는데, '집중하지 않아도 빨리 들어갈 수 있는 극'을 원하는 시청자들은 이런 설명적인 방식을 선호할 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나 같은 초보들이 쓴 대본들을 보면, 남자 캐릭터가 여자처럼 말하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드라마작가 지망생의 8, 90%가 여자고, 오랜 습작 생활 동안 여자들에게만 둘러싸여 지낼 확률이 크기 때문에, '남자 말투'를 잊게 되는 것이다. 남자 말투 여자 말투가 따로 있냐, 그럼 남자 캐릭터는 <태양의 후예> 송중기처럼 다나까만 써야 하냐, 이론이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내 말을 믿어보시길. 찬찬히 관찰해보면 미묘한 차이가 있다. 그리고 (특히 멜로에서) 남자가 여자처럼 말하면 매력도가 확 떨어질 수 있다. 아이가 어른처럼 말하는 것도 어색하고, 형사가 시인처럼 말해도 (시인 같은 형사 캐릭터를 만든 게 아니라면) 이상할 거다. 나이나 직업에 맞는 말투가 따로 있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도 안 되겠지만, 모든 인물이 작가 자신의 말투로 말하고 있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려면, 꾸준히 사람들을 관찰하고, 캐릭터에 맞는 말투를 고민하고, 각 인물의 말투를 차별화할 필요가 있다.




지문에 대해서는 길게 말할 것이 없다. 지문은 시청자가 읽는 글이 아니라, 연출자와 배우, 스탭들이 읽는 글이다. 소설처럼 읽는 맛이 있는, 촘촘하고 서정적인 지문을 좋아하는 PD도 있고, 행동 지문은 왠만하면 쓰지 않아주는 게 연기하기 좋다는 배우도 있다. 사람마다 선호와 취향이 다른 것이다. 


나는 연출자에겐 자기 나름대로 연출을 할, 배우에겐 자기 스타일대로 연기를 할 여지를 주는 지문, 스탭들에게는 필요한 준비사항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지문이 좋은 지문이라 생각한다. 문학적인 욕구는 잠시 내려놓고 (나중에 소설이라도 쓰게 되면 그 때 풀고) 간결하게 쓰는 편이 작업 속도를 올리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잘 익은 홍시를 터뜨린 듯 일그러진 태양을 검푸른 수평선이 조금씩 집어삼키고 있다. 지금은 개와 늑대의 시간. 늑대의 이빨처럼 사나워보이는, 거친 파도를 바라보던 여자, 문득 느껴지는 인기척에 놀란 건지 반가운 건지 조금 커진 동공으로 뒤를 돌아보는데, 다가오는 호리호리한 저 실루엣은 적인가 동지인가...'


보다는, 


'해질녘 서해 바닷가. 파도를 바라보던 여자, 문득 인기척 느끼고 돌아보지만, 다가오는 사람의 얼굴을 아직 알아볼 수 없는데.'


정도가 쓰기도 읽기도 편하다. 


...미안하다. 앞의 지문이 문학적이란 얘긴 아니다. 서해에 거친 파도가 있을 리도 없다. 너무 공들일 필요는 없다는 얘기가 하고 싶었다. 


지문이 좀 장황하거나 삭막하다고 해서, 단지 그 이유만으로 좋은 대본이 외면받을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작품을 진행하며 지문에 대한 요구사항이 있으면 그 때 그 때 반영해서 고쳐나가도 늦지 않을 거다. 일단은 그저 대본을 쭉 읽어나가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 수준이면 되고, 드라마를 쓰기로 마음먹은 사람이라면 '잘 읽히는' 문장들을 쓰는 정도는 크게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아이템을 정하고, 취재를 하고, 캐릭터를 만들고, 구성을 짜고, 필요한 회차만큼의 대본을 썼다면, 이제 할 일은? 당선을 위한 100일 기도? 시상식에 입고 갈 옷 쇼핑하기? 수고한 나를 위한 온천여행?


틀렸다. 이제 초고 작업보다 더 괴롭고 험난한 수정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지겨워도 한 번만 더 읽어보고, 그게 그거인 것 같아도 한 글자만 더 고쳐보자. 단, 마감시간까지 붙잡고 있어선 안된다. 지원자가 몰려 시스템에 오류가 생길 수 있다! 오후 마감이라면 아침 일찍 제출하고, 시원하게 맥주 한 캔 하고, 암막커튼이 있으면 꼼꼼하게 쳐놓고 한 숨 자자. 울고 싶으면 조금 울어도 좋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다. 


수정 작업에 대한 글은 따로 쓰지 않으려 한다. 나 또한 피하고만 싶은 게 수정이고, 소개할만한 작은 노하우나 팁도 아직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다음 글에서는 공모 당선 이후의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 작은 성공담에 뼈아픈 실패담이 이어질 그 글은, 이 매거진의 마지막 글이 될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18. 실전, 드라마 공모 준비 (4) 구성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