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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 Mar 29. 2019

18. 실전, 드라마 공모 준비 (4) 구성하기

적어도 구성만은, 훈련과 노력으로 충분히 좋아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학교 다닐 때 수학 좀 했어?"


기획작가(겸 깍두기 보조작가)로 일하던 시절, 전쟁드라마의 회별 구성표를 짜보라는 숙제 앞에서 머리를 쥐어짜고 있던 내게 제작PD가 했던 질문이다. 드라마 쓰는데 수학이 무슨 상관? 상관이 있단다. 구성을 할 땐 수학적인 머리가 필요하단다.


드라마 구성에는 비밀리에 전해내려오는 수학 공식이 있다. 70분 드라마 1회분의 대본이 35페이지 정도라면,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에 각각 4, 8, 12, 8, 4페이지를 할애해야 한다. 주요 사건은 2페이지 이내에서 반드시 시작돼야 하며, 주인공의 각성은 전개의 후반부 70%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좋다. 사건의 반전이 일어나는 지점은...


미안하지만, 이런 공식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시나리오 1분 비트로 쪼개기 : 시나리오 작가를 위한 커닝 페이퍼]라고, 성공한 헐리우드 영화 몇 편의 시나리오들을 (말 그대로) 1분 단위로 분석하고 공통되는 구성의 공식을 제시하는 작법서가 있다. 물론 이 책으로 도움을 받은 분들도 있겠지만, 나는 제목에 혹해 집어들었다가 다 읽기도 전에 폐소공포증에 걸릴 것 같아 포기했다. PD가 '수학적인 머리'를 쓰라고 했던 건 이렇게 숫자를 계산하라는 게 아니라, 감성보단 이성, 우뇌보단 좌뇌를 활용하라는 뜻이었다고 이해한다.


아이템이나 캐릭터에는 작가의 삶과 가치관이 투영된다. 대본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대사에는 타고난 감성과 재치, 관찰력이 드러난다. 노력하면 좋아지겠지만,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구성은, 반복, 연습, 훈련, 노력할수록 좋아진다고 믿는다. 다른 작품들을 분석할 때 가장 많이 배울 수 있는 부분도 구성이다.


이전 글에서 <스카이캐슬> 15회의 구성을 나름대로 분석해 봤었다.

https://brunch.co.kr/@lunar611/10

3막 구조, 기승전결 등등 사람마다 구성을 이해하는 툴이 다를 것이다. 작법서들에는 '구성점'이라는 용어도 흔히 나오는데,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 그 용어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때 배운,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로 이야기를 뜯어보는 편이 내겐 더 쉽다. 자신에게 용이한 방법으로 여러 작품을 (감성 말고 이성으로, 차분하게) 뜯어보다 보면, 70분짜리 이야기가 어떻게 짜여지는지 감이 오기 시작할 것이다. 미니시리즈나 연속극의 전회를 분석해본다면, 단막이 아닌 장편 드라마 전체의 구성은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도 길이 보일 것이다.


<스카이캐슬>의 전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함께 살펴보자.


첫회의 이야기는 영재의 서울 의대 합격 축하파티에서 시작해, 영재엄마의 자살로 끝난다. 자살은 1회의 결말이지만, 전체 이야기의 '발단'이 된다. '대체 왜 자살했을까'라는 궁금증은 3, 4회까지는 시청자들을 붙들어놓는 힘이 된다. 스카이캐슬이 어떤 곳인지 꽤 긴 시간을 들여 소개하는 1회 자체가 전체의 발단부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두 인물, 한서진과 김주영이 만나며, 한서진의 욕망에 불이 붙는다.


2회에선 영재네가 떠난 집에 우주네가 이사 오고, 3회, 4회에선 우주엄마 이수임 때문에 견고했던 스카이캐슬의 시스템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이수임은 캐슬 내 교육방식에 반론을 제기하며 독서토론회까지 깨트려버리고, 쌍둥이엄마 노승혜는 이에 자극받아 강압적인 남편에 대한 반항을 꾀한다. 이수임이 영재네의 비극에 대한 의심을 품는 것도, 한서진의 과거(곽미향)를 알고 있다는 것도 새로운 긴장감을 준다.


5회에서 8회까지는 이수임과 한서진의 대결이 주요 스토리로 이어진다. 거칠게 나누자면 여기까지를 '전개'라고 볼 수 있겠다. (기획 단계에서는 김주영보다 큰 비중이었을) 이수임이 기대보다 시청자들의 호감을 사지 못하고, 이야기가 좀 반복된다 싶을 무렵, "혜나를 집에 들이십시오"로 분위기가 반전된다. 9회에서 12회까지는 혜나의 비밀이 발단이 돼 또다른 이야기가 시작되고, 이수임의 소설 작업이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히는 한편 한서진의 과거가 폭로되는 이야기도 병행된다. 모든 게 아슬아슬, '위기'다. 연속극도 아니고 갑자기 출생의 비밀이 왠말이냐며 불만을 표하는 평들도 있었지만, 또 출생의 비밀만큼 시청률을 보장하는 장치도 없고, 캐슬이라는 표리부동한 곳에 혼외자 하나쯤은 나타날 만 했다는, 꽤나 어울리는 소재였다는 생각이다. 드라마 톤이 너무 질척해지는 거 아닌가 걱정될 쯤엔, 쌍둥이 누나, 가짜 하버드생 세리가 등장해 톤을 조금 올려준다.


13, 14회에선 긴장도도 시청률도 쭉쭉 올라간다. 혜나와 예서의 갈등도 갈등이지만, 혜나와 한서진이 부딪히는 씬들은 보는 사람 소름 돋을 정도로 날카롭고 서늘하다. 한서진이 김주영의 과거를 알게 되고, 예서가 엄마보다 김주영에게 더 의지하게 되면서, 두 사람의 갈등도 점점 고조된다. '위기'에서 '절정'으로 가는 부분이다.


그리고 문제의 15회에서, 혜나의 사망이라는, 가장 강력한 사건이 발생한다.


16회에서 20회까지는 이 사건의 여파로 변화하는 인물들과 운명들을 그린다. 조금은 긴 결말부다.

벌받을 사람은 벌받고, 화해할 사람들은 화해한다. 아이들은 조금 자유로워지고, 어른들의 잘못된 욕망은 포기되거나 조금 미뤄진다. 갑자기 개과천선하며 인물들이 무너졌다는 평들도 있었지만, 시청률은 무너지지 않았다.


<스카이캐슬>은 '자녀교육을 둘러싼 비뚤어진 욕망'이라는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밀고 나간, 충실한 구성의 드라마였다고 생각한다. 긴 호흡인 만큼, 관심도나 긴장도가 떨어질 때쯤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도록 적절히 배치했다. 사건들은 뜬금없이 뚝 떨어지지 않는다. 사건 이전에 복선들이 있고, 사건 이후엔 인물들에게 끼친 복합적인 영향들이 충분히 그려진다. 갈등은 낮은 수준에서 높은 수준으로 점점 고조되며, 중간중간 쉬어가는 시간들도 있다. 긴장과 갈등 때문에 드라마를 보긴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도가 100이면 지쳐서 중간에 나가떨어진다. 시청자와 밀고당기기를 잘하려면 몸에 밴 '리듬감' 같은 것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 또한 공부, 분석, 연습, 반복, 훈련을 통해 체득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부분에서 특히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는 작가로 김영현 작가를 꼽고 싶다. 그가 메가히트 시킨 사극들은 전체 이야기도, 회별 스토리도 그물망처럼 촘촘하고 유려한 구성 위에서 물 흐르듯 흘러가는 것처럼 보여 여러 번 감탄했었다.


배우고 익히며 충분히 즐겼다면, 이제 당신 작품의 뼈대를 세울 차례다. 각자의 방법을 찾아야 하지만, 힌트가 될 수도 있을 거란 기대로 나의 방법들을 몇 가지 소개한다.


나는 단막극의 경우, 떠오르는 대로 스토리를 적어본 뒤, 이를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로 나눌 수 있는지 살펴본다. 각 단계를 한 줄씩, 다섯 줄짜리 스토리를 적어보고 나면 왠지 모르게 조금 안심이 된다. 이제 각 단계에 필요한 씬들을, 그림이 떠올리는 순서대로 마구잡이로 만들어본다. 이제 씬들을 이야기의 순서대로 나열하고, 추가하고, 삭제하고, 순서를 바꿔보기도 한다. 대본을 쓴 후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다시 씬구성으로 돌아가 살펴본다. 개인적으로는 인물을 소개하는 데에 너무 많은 분량을 할애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서, 구성 단계, 대본 단계에서 여러 번 점검하고 조절한다.


미니시리즈는 어느 정도 전체 스토리가 머리속에 그려지면 한글파일에 줄글로 적어보기 전에 엑셀로 '표'를 만들어봤다. 표에는 각 회의 첫씬, 엔딩, 절정이 될만한 씬, 주요사건, 주인공의 심경변화, 인물들의 관계변화 등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의 칸들을 만들고, 말이 되든 안되든 일단 채워넣어 본다. 이야기가 발전되면서 표에 적어넣은 것들은 수시로 바뀌고, 나중엔 표가 필요 없어진다. 도구일 뿐인 표가 이야기의 족쇄가 되어서는 안 된다.


발단, 전개, 이런 거 다 식상하고 재미없어 보이는가? 연속극은 출생의 비밀이 폭로되는 것을, 멜로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일을, 장르물은 악인이 처벌받는 모습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미루며 시청자들의 인내심을 시험해온 수많은 드라마들의 뻔한 구성에 질렸는가? 지금까지 없었던, 신선한 구성의 드라마를 쓰고 싶은가?


최근 종영한 드라마, <눈이 부시게>는 전체적인 구성 면에서 아주 대담한 실험을 했다. 전체 12회 중 10회까지를 판타지+로맨스+휴먼의 귀엽고 따뜻하고 밝은 분위기로 끌어가다, 10회 엔딩에서 갑자기,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치매 노인의 망상이었습니다.'라며, (대부분 무방비 상태였던) 시청자들에게 찬물을 끼얹어버린 것이다. 감독은 종영 후 인터뷰에서, 이 반전으로 시청자들에게 욕을 먹을까봐 걱정하고 고민했었다고 말했다. 결과는? 욕 대신 칭찬, 조금 과장하자면 찬양을 들었다. 3%대로 시작한 시청률은 마지막회에서 9%대까지 올랐다.


'치매 노인의 망상'임을 처음부터 까고 시작했다면, 이 이야기는 단막극 정도의 스케일을 벗어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고, 그 얘기를 미니시리즈라는 틀에 담기 위해 여러 사람이 여러 날을 고민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한 결과, 전에 없던 새로운 구성이 나온 것이다. 부러워만 하지 말고 우리도 도전해보자. 타고난 감각이든 뼈를 깎는 노력이든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보자.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있다.


뼈를 깎는 노력으로 뼈대를 세웠다면 이제 살을 붙일 차례다. 다음 글에서는 실전 편의 마지막으로 대본 쓰기, 그러니까 지문과 대사 쓰는 법에 대해 함께 고민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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