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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 Mar 12. 2019

17. 실전, 드라마 공모 준비 (3) 캐릭터 만들기

내가 좋아하는 / 시청자들이 사랑하는 / 배우들이 욕심내는 캐릭터

"예능은 나보다 모자란 사람, 드라마는 나보다 불쌍한 사람 보려고 보는 거야."


어느 중견 드라마PD가 사석에서 했다는 말이다. 몇 년 전의 일이라 전해준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가물가물한데, (아마 작가원 동기였던 것 같다)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리가 맑아지는 듯했던 기분은 지금도 생생하다.


'불쌍한 사람'. 여기에 드라마를 위한 캐릭터의 비밀이 모두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불쌍한 사람일까?

갖고 싶은 걸 못 갖거나, 하고 싶은 걸 못 하거나, 되고 싶은 게 못 되는 사람은 불쌍하다.

(독립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던졌던 역사 속 / 드라마 속 열사들, 미치도록 잡고 싶은 범인을 쫓고 또 쫓는 형사들, 앞뒤 재지 않는 사랑이 너무나 하고 싶었던 오해영, 외과 과장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장준혁 교수를 생각해보자.)


부유하고 유능해 보이더라도, 자신만의 뚜렷한 결핍을 갖고 있는 사람은 불쌍하지만,

불우하거나 불행한 상황이더라도, 특별히 원하는 게 없는 사람은 별로 불쌍해 보이지 않는다.

(삼포세대니 오포세대니, 욕망마저 거세당한 세대에 대한 안타까운 시선도 있긴 하지만, 캐릭터가 너무 무기력하면 드라마도 무기력해지기 쉬우니 여기선 논외로 하자.)


간절히 원하는 게 있어도, 그걸 쉽게 얻어내는 사람은 불쌍하지 않다.

우여곡절 끝에 얻어내더라도, 그 과정이나 결과물이 부도덕하고 비인간적인 것이라면 응원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드라마 캐릭터는 절실하게 원하는 게 있어야 하고, 그것을 원할 자격(도덕성, 능력, 근성, 호감도 등)이 있어야 하며, 그것을 얻을 때까지 반드시 개고생을 해야만 한다.

시청자들은 그런 인물들을 불쌍해하고, 답답해하고, 응원하고, 마지막엔 결실의 기쁨을 함께 누리기 위해 드라마를 본다.


나는 '시청자들이 원하는 캐릭터'가 아닌, '내가 좋아하는 인간형'을 주인공으로 세우는 실수를 반복해 왔다.


실생활에서 내가 호감을 갖게 되는 사람들은, 욕심이 많지 않고, 그래서 쫓기듯 살기보단 자기 페이스대로 여유롭게 생활하고,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다정하고 배려 깊지만 혼자서도 잘 노는 유형이었다. 이런 사람을 누가 싫어할까. 하지만 드라마에선 얘기가 달라진다. 이런 다소 매가리없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놓자, 드라마 전체가 매가리 없어졌다. 긴장감이 없는 것이다. 긴장감이 없다는 건 섹시함이 부족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공모 당선 후 제작사의 기획PD와 여러 장르의 미니시리즈를 기획(만) 했었고 그 중엔 로맨틱 코미디도 있었는데, 남자주인공 캐릭터 때문에 오랫동안 애를 먹었다. 나는 또 평소 좋아하는 멍뭉이 스타일의 남자를 그리며 침을 흘리고 있었는데, 기획PD의 눈에는 그의 매력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서브 남주 캐릭터가 더 주인공 같다고 했다. 이렇게 무례하고 유치하고 제멋대로인 사람이? '로코 남주는 까칠해야 한다'는 기획PD의 말을 당시엔 취향 차이로 받아들였지만, 지금은 그 법칙 아닌 법칙의 의미를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 나와 같은 사람, 내가 되고 싶은 사람, 실제로 만나고 싶은 사람보다는, 시청자들이 공감과 판타지를 동시에 느낄 만한 인물, 그러니까 실생활보단 드라마에서 보고 싶은 인물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또 중요한 한 가지, 배우들이 욕심을 낼 만한 캐릭터를 만들어야 한다.


시청자보다 먼저 캐릭터를 선택하는 이들이 배우들이다. 좋은 캐릭터는 좋은 캐스팅을 낳고, 좋은 캐스팅은 편성과 제작 여부를 결정한다. 자신이 배우라고 생각하고, 기획안의 등장인물 설명을 다시 읽어보고, 대본에 그려진 캐릭터의 행동들을 상상해 보자. '연기하는 재미'가 있을 것 같은가? 그렇다면 분명 '보는 재미'도 있는 인물일 것이다.


앞선 글에서 tvN의 단막극 시리즈 "드라마 스테이지"의 대본집을 홈페이지에서 다운 받아 볼 수 있다고 소개했다. 지금부터는 그 중 작년 1월 방영됐던 <낫 플레이드>의 대본과 실제 방송에서 그려진 캐릭터들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살펴보려 한다. 적지 않은 차이가 있어 보이고, 대체적으로 배우들과 시청자에게 설득력을 갖추는 방향으로 수정된 것 같아 이 작품을 선택했다. 개인적으로 아주 재미있게 본 작품이기도 하다.


원미경 배우가 연기한 주인공 인숙은 가부장적인 남편과 맞벌이하며 얹혀 사는 아들 며느리,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 손녀까지, 가족들을 챙기느라 24시간이 모자란, 그러면서도 문득 내 인생은 뭘까, 쓸쓸해지는, 평범한 60대 주부다. 인숙이 우연히 당구장 알바를 하게 되면서 드라마는 시작된다.


방송에서의 인숙은 대본집에 실린 초고에서보다 적극적이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준다. 주인공에 따라 드라마의 전체적인 분위기도 밝아지고, 보기가 편한 느낌이었다. 좀 더 '응원하고 싶은 인물'이 되었다는 생각이다.


주인공보다 더 큰 변화가 있었던 건 이희준 배우가 연기한 당구장 사장, 성욱이다. 대본에선 이름도 없이 '사장'으로 표기되고, 분량도 인숙의 가족들 수준으로 적었는데, 방송에선 드라마를 끌어가는 두 축 중 하나가 되었다. 인숙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를 통해 자기가 원하는 걸 얻으려는 욕망과 목표도 생겼다. 더 복잡하고, 그래서 더 살아 있는 것 같고, 그러므로 배우가 이해하고 연기하기도 좋은 인물이 된 것이다.


대본집에는 작가와 감독, 배우의 후기도 실려 있다. 작가는 초고를 1인극, 수정고를 2인극으로 분류하며, 본인이 느끼기에 실제 삶은 1인극에 가깝고, 2인극은 인위적이라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반면 감독은 보편적 설득력이 있는 2인극으로 가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감독 후기에는, 인숙이 누구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인숙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설명이 있다.


이희준 배우는,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땐 왜 알바를 고용하고 자신은 당구장을 비우는지 등의, 성욱의 스토리라인이 구체적이지 않아 걱정했다고 한다.  배우는 딛고 설 땅이 필요하다는, 모든 전사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이야기들이 구체화 된다면 좀 더 입체감있는 인물을 만들 수 있다는 그의 말에 귀기울일 만 하다.

 

두 인물의 굵직한 변화 외에도, 사소해 보이지만 드라마의 톤과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작은 수정들이 많았다.

대본에는 인숙의 형님(동서)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방송에선 형님 캐릭터만 남겨두었고 그 가족들은 등장하지 않았다. 드라마의 큰 흐름에 필요하지 않은 인물들이어서일 수도 있고, 제작비와 캐스팅을 생각해도 합리적인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대신 며느리와 손녀의 씬들과 캐릭터가 조금 더 강화됐다. 이 또한 캐스팅에 도움이 되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대본에서는 며느리가 유치원 교사의 뺨을 때리는 장면이 있는데, 방송에서는 삭제되었다. 수정고에서 빠진 것인지, 촬영 현장에서 빠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며느리 캐릭터에 도움이 되는 행동은 아니었기 때문에 뺀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우연이나 단역의 행동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 주인공이나 조연의 의도적인 행동에 의한 것으로 수정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대본에서는 단역인 당구장 손님이 인숙의 화려한 플레이를 보고 재미로 동영상을 찍어 올리는데, 방송에서는 성욱이 자신의 목표를 위해 의도적으로 동영상을 찍어 올린다.


이렇게 대본과 방송을 비교해 보면서 또 조금 배웠다.

소설이나 웹툰을 각색한 드라마를 볼 때도, 원작과 드라마에서 캐릭터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분석해 보면 좋은 공부가 될 것 같다.  


마지막으로, 영화 <헬보이>에 나왔던 대사를 이야기하며 이 글을 마치려 한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가? 삶의 시작, 즉 태생부터 그런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선택한 결정들이 그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어떻게 시작할지 선택하는 것이 아닌, 어떻게 끝마치는지 선택하면서 말이다."


캐릭터를 만드는 것도 '설정'이 아닌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까칠한 재벌남'이 아니라, '사랑하는 여자를 살리기 위해,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녀와 영혼을 바꾸는 선택을 하는 사람'이 캐릭터다.

'20년만에 만난 쌍둥이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이 아니라, '죽은 쌍둥이의 복수를 위해 그의 인생을 대신 살기로 결심한 사람'이 캐릭터다.

'불우하고 독한 여자아이'가 아니라, '자신에게 처음으로 호의와 존중을 보여준 아저씨를, 처음엔 이용하려 했지만 끝내는 지켜주기로 선택한 여자아이'가 캐릭터다.


그렇게 고뇌하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뜨거운 피가 흐를 것 같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캐릭터를 나도, 여러분도 만날 수 있길 기원한다.  


다음 글에서는 이런 선택들을 쌓아서 만들게 될 '구성'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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