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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 Jan 18. 2019

16. 실전, 드라마 공모 준비 (2) 취재하기

저는 아는 의사도, 아는 변호사도 없는데요...

어느 스타 작가의 특강에서 놀라운 얘기를 들었다.

자신은 드라마를 쓰기 전에 취재를 전혀 하지 않는다는 거다. 대신 상상을 한다고 했다. 주인공이 의사라면,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멋지고 섹시한 의사의 캐릭터를 만들어낸다고.    


‘전혀’라는 단어는, 취재보다는 상상력이 중요하다는 얘기를 강조하기 위해 썼을 거라 생각한다.

장르물이 많아지고 시청자의 눈높이가 높아지면서, 드라마 기획에서 취재가 점점 더 중요해지고는 있지만, 취재에 너무 의지하는 건 또 위험하다. 기획 단계에서는 인물을 위한 취재에 공을 들이게 되는데, ‘주인공은 전문직이니까 취재해서 캐릭터 만들어야지’ 하고 안이하게 생각했다간, 취재 중에 발견한 인상적인 점들이 어설프게 짬뽕된, 현실에서 왔는데 이상하게 현실감이 없는 인물이 탄생할 가능성이 높다. 순서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인물을 그리고 싶은지, 이 인물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명확하게 하는 게 우선이다. 물론 취재를 하다 보면 그 영향으로 인물이나 이야기가 조금씩 바뀌기도 한다.     


그럼 취재는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워 보이는 방법은 ‘인터넷 검색’이다.

비용도 들지 않고, 누구한테 아쉬운 소리 할 필요도 없고, 내 방 침대에 누워서도 할 수 있다.

그만큼 단점도 많다. 출처가 확실하지 않은 정보가 너무 많고, 그 많은 정보들이 서로 모순되는 얘기를 하기도 하고, 적은 노력으로 얻는 정보들이라 그런지 머릿속에 깊이 남지 않고 흩어져 버린다. 식상한 표현이지만, 정보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느라 시간 낭비만 할 수도 있다.

나는 기획단계에서의 인물을 위한 취재보다는, 대본에서 그 때 그 때 필요한 ‘사실’들을 확인해야 할 때 주로 인터넷을 사용하는 편이다. 특정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라던가, 필요한 꽃의 개화 시기라던가, 어떤 질병의 정확한 진단명이라던가 하는 간단명료한 것들 말이다.     


다음으로 도전해볼 만한 방법은 ‘’이다. 도서관에 가는 발품만 팔면 이것도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 방법이다.

눈이 아직 침침하지 않다면 이북을 이용하는 것도 좋다. 사극이나 시대극에 도전하고 싶다면 역사 관련 책을 수십 권은 읽어야 할 거다. 쓰려는 것과 비슷한 장르나 아이템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풀리지 않던 부분의 키를 얻을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사람을 직접 만나 취재하기 전 사전조사 개념으로 관련 책들을 찾아볼 때가 많았다. 판사를 취재하기로 했으면, 적어도 우리나라 (전)현직 판사가 쓴 책 두어 권 정도는 먼저 읽어보며 직업에 대한 감을 잡는 식이다. <극한 직업>이나 <다큐 3일> 같은, 특정 직업이나 현장을 다룬 TV 프로그램들을 찾아보는 것도, 대략의 스케치를 그려보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     


이제 가장 어렵고도 겁나는 단계가 남았다. ‘사람’을 직접 만나서 하는 취재다.


나는 유재석도 손석희도 아닌데, 어떻게 그 사람 속마음을 이끌어내지?

나는 아는 의사도, 변호사도 없는데, 그런 사람들이 나한테 시간을 내줄까? 걱정부터 앞설 거다.


나도 단막극 습작 시절 첫 취재로 생면부지의 사람과 마주앉았을 땐 머릿속이 하얘지고 손에는 식은땀이 났다. 지금은 취재의 달인이 됐느냐. 안타깝지만 전혀 아니다. 리얼리티와 현실감이 빛나는 드라마들을 볼 땐, 저 작가(와 보조작가)는 어쩜 저렇게 취재를 잘했을까 부럽고, 취재 실력을 키워주는 학원이 있다면 당장 찾아서 다니고 싶다. 하지만 나보다 더 막막해하고 있는 동료들과 후배들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개인적인 경험과 팁들을 공유하고자 한다.     


앞선 글에서 밝혔지만 나는 미니시리즈 공모를 준비하며 소년범이라는 아이템을 선택했다.


소년범과 엄마의 캐릭터, 감정, 행동에 대해서는, 취재보다는 상상력에 의지했다. 관련 기사들과 책들을 열심히 찾아보긴 했지만, 직접 그들을 만나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어설픈 질문으로 상처를 들쑤실까 걱정됐고, 그들의 진심을 내 글에 잘 녹여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좀 더 용기를 내볼걸, 돌아보면 아쉽다.


대신 다른 인물들을 만들기 위해 발품을 많이 팔았다.

두 주인공을 둘러싼 주요인물들로는 교사, 경찰, 판사를 한 명 씩 두기로 했다.     


교사 캐릭터는 학창시절 겪었던 선생님 중 한 명을 모델로 하기로 했고, 교사를 직접 인터뷰하진 않았다.

대신 학부형인 친구들을 통해, 요즘 아이들의 학교생활이 우리 학창시절과 달라진 점들을 들었다.

특별채용으로 교사가 된 케이스로 설정했기 때문에, 디테일한 조건과 과정들을 인터넷으로 확인했다.     


여성청소년계에 근무하는 ‘아는’ 경찰은 당연히 없었다.

다행히 지인의 지인의 지인 중에는 있었고, 여러 번 아쉬운 소리를 해가며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


연줄이 없으면, 까짓것 만들면 된다. ‘고등학교 운동부’에 대한 단막극을 쓸 때는, 졸업한지 10년 만에 처음으로 모교에 전화를 걸어, 운동부 코치와 선수들을 만날 약속을 잡았다. 수업을 들은 적도 없는 선생님이었지만, 졸업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도움을 주고 싶어 하셨다.


고리타분한 수작 같다면, 좀더 신식의 연줄을 이용해보는 건 어떨까. 연줄의 이름은 '구독자'다.
어느 직업군이든 자기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책도 쓰고, 뉴스 인터뷰에도 응하고, SNS 활동에 열심일 수도 있다. 공개된 이메일이나 SNS를 통해, 드라마작가 지망생이고 취재를 하고 싶다는 메시지를 전한다면? 성공 확률이 아주 낮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 실패하더라도 잃을 건 없지 않나.


어쨌든, 나는 지인의 지인의 지인인 형사 경찰서 앞 까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시간과 장소는 당연히 취재원에게 최대한 맞춰야 한다.

약속 3일 전 쯤 메일로 질문지를 보냈다.

질문지를 미리 보내면 취재원도 좀 더 준비된 상태로 나올 수 있다. 

박카스보다는 조금 비싼 자양강장제 한 박스를 들고 갔던 것 같다.

도움을 받는 입장이기 때문에, 가까운 사람이든 처음 만나는 사람이든, 성의를 표하는 간단한 선물은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 커피 상품권 같은, 가볍고 실용적인 선물도 좋다.


형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과 처음 대화해보는 것이어서, 외모나 표정, 말투에서도 디테일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었고, 다양한 아이들을 만난 생생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지인의 지인 중에 판사도 있었지만, 취재를 부탁하지 못했다.

앞서 취재한 형사에 비해 나이도 지위도 높은 분이어서인지, 언제 방송될지 (방송이 되긴 되는 건지) 모를 작품으로 도움을 청하기가 왠지 어렵고, 조금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 조금 더 뻔뻔해진 나는, 다른 작품을 위해 그 분에게 취재를 청할 수 있었다. 기대 이상으로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줬고, 다양한 나이와 경력의 후배들까지 소개시켜줘서 큰 도움이 됐었다. 아쉽게 그 작품도 TV에 나오지는 못했지만.    


사람을 만나 취재를 하다 보면, 근데 그 드라마는 언제 TV에 나오느냐는 질문을 자주 듣게 된다. 그 때마다 당황하지 않으려면, “아직 기획 단계라 시기를 말씀드리긴 어렵고, 일정이 결정되면 꼭 연락드려 알려드리겠습니다.” 정도의 답변을 미리 준비해 두는 게 좋겠다. 그리고 성심껏 도와준 취재원들이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당선과 편성을 위해 최선을 다해 쓰는 게 그들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취재원을 익명으로 해달라든가, 어쩌다 보니 얘기가 나왔지만 이러이러한 (민감한) 부분은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요청이 있으면, 잘 기억해두고 피해가 없도록 해야 한다.      


판사 개인 개인을 취재하지는 못했지만, 법원에는 열심히 드나들었다.

우리 법원은 대부분의 재판이 공개재판으로 누구나 자유롭게 방청할 수 있다. 당사자들에겐 큰 재난이겠지만, 방청하는 사람에겐 (미안하게도) 참 흥미로운 게 재판이다. 판결문은 법원 홈페이지에서 열람할 수 있다.     


참고로 검찰, 경찰, 교정시설까지, 다양한 정부기관들이 일반인을 위한 견학 프로그램들을 운영하고 있다.

<슬기로운 깜빵생활>을 재미있게 본 지망생보다는, 깜빵과 제소자들을 직접 본 경험이 있는 지망생이 생생한 에피소드들을 더 많이 생각해낼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건, 너무 당연한 얘기이기는 한데, 취재원을 대할 때 소스를 뽑아먹을 도구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거다.

취재는 내가 상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취재원이 내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쓸데없는 얘기를 하는 것 같고, 속얘기는 털어놓지 않고 뻔한 말들만 늘어놓는 것 같다. 그래도 일단은 나를 위해 시간을 내주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한다. 필요한 이야기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건 내 취재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폐를 끼치는 기분에 움츠러들거나 저자세가 될 필요도 없다. 위에 얘기했듯이, 자기 얘기 하길 즐기는 사람들도 많다.)

당장 작품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아도, 한 사람의 인간을, 하나의 인생을 배운다는 생각으로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자. 나중에 쓸 더 좋은 작품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 글과 사람을 대하는 당신의 진심이 전해진다면, 더 이야기에 능숙한 취재원을 소개해준다거나 하는, 생각지 못한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다음 글에서는 힘겨운 취재를 통해 얻은 것들을 바탕으로, 우리의 주인공과 주요 인물들의 캐릭터를 잡는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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