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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 Jan 13. 2019

15. 실전, 드라마 공모 준비 (1) 아이템 잡기

모 공모전은 응모작의 90%가 사이코패스 얘기였다는데...

공모전 당선자들을 축하하는 식사 자리에서, 나는 회사 측 참석자 중 제일 높아 보이는 분에게 물었다.

내 작품이 왜 당선됐는지 궁금하다고.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은 건데 뜬금없는 질문으로 느껴졌는지 조금 당황한 얼굴로, 하지만 진지하게 답해주었다. 응모작의 90%가 사이코패스 얘기였는데, (나도 주요 캐릭터가 사이코패스였지만) 내 작품엔 감성적이고 인간적인 부분이 더해져 있었기 때문에 선택된 것 같다고. 

장르물에 특화된 채널을 가진 회사의 공모전이어서 범죄물이 몰린 것 같은데, 90%라는 수치는 물론 과장일 거다. 다만 공모전에 비슷한 소재의 응모작들이 얼마나 몰리는지, 비슷비슷한 내용의 대본들을 반복해 읽어야 할 심사위원들은 얼마나 지루할지는 짐작해볼 수 있다.     


아이템이나 컨셉, 장르에도 유행이라는 게 있는 것 같다. 

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는 이른바 ‘트랜디드라마’라고 하는 로맨스물이 미니시리즈의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지금은 단순히 연애만 하는 드라마는 편성도 되기 힘들 거다. 사극은 점점 가벼워지고, 장르물의 범죄자들은 점점 잔혹해진다. <별에서 온 그대> 같은 판타지 드라마가 경쟁하듯 이어지던 때도 있었다. 작년에는 판사 소재 드라마가 세 편이나 방영됐고, <마더>나 <붉은 달 푸른 해>처럼 아동학대를 다루는 드라마가 시류를 반영하며 좋은 반응을 얻었다.     


반대로 유행이나 시류와는 동 떨어져 보이는 내용의 출사표를 과감하게 던지는 작가들도 있다.

<미스터 션샤인>은 그동안 잘 다뤄지지 않았던, 일제 직전의 시대상황을 배경으로 택했다. <키스 먼저 할까요>는 멜로드라마는 한물갔다고 단정하는 사람들에게, 작가의 역량에 따라 얼마든지 새롭고 깊은 작품이 또 나올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나의 아저씨>는 어둡고 낮은 곳의 이야기로도 많은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아이템을 찾을 때, 작가로서 시대상황을 반영하려는, 또는 시대를 반 발짝 앞서가려는 태도도 좋지만,

그보다는 자기 자신만의 특기와, 기존 작품들과의 차별화에 중점을 둘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예를 좀 더 살펴보자.     


영화와 드라마에서 영혼체인지나 타임워프는 잊을 만하면 다시 등장하는 단골 컨셉이다.

“또 타임워프야?”, “너무 식상한 거 아냐?” 눈살 찌푸릴 수도 있겠지만, 그들 중에 어떤 작품들은 또다시 성공하고, 재미와 감동을 준다. <나인>은 주인공의 간절함이 시청자들의 마음까지 전해졌고, <미래의 미라이>는 어린아이의 동생에 대한 질투라는, 소소해 보이지만 누구나 공감할 만한 귀여운 이야기로 새로움을 더했다. 


<남자친구>는 뻔한 로맨스처럼 보이지만, 재벌남과 신데렐라라는 오래된 설정에서 성별을 역전시켜 나름의 신선함을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듣는다. 


대체 어떤 얘기를 하면 좋을까, 어떤 소재라야 16부작을 이끌어갈 만큼 얘깃거리가 많을까, 막연한 지망생이라면, 방송 중이거나 방송되었던 드라마들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클리셰처럼 보이는 설정을 조금만 비틀어도 새로운 드라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100%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 TV 시청자들은 새로운 것보단 익숙한 것에 더 쉽게 반응하는 면이 있기도 하다. 기존 작품들은 아이템을 찾을 때 가장 먼저 들여다봐야 할 참고자료다.    


<인셉션>이나 <매트릭스> 같은 세상에 없던 소재와 세계관을 선보이고 싶은 지망생도 있을 거다. 응원하고 싶지만, 남들보다 멀고 험한 길을 갈 각오를 해야 할 것 같다. 


아이템엔 저작권이 없다는 점도 염두에 둬야 한다.

정말 새롭고 특이한 회심의 아이템으로 공모전에 응모했다가 낙선했는데, 비슷한 아이템이 다른 작가의 이름으로 나온다면 당연히 당신은 도용을 의심하고 분노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에겐 운 나쁜 우연일 가능성이 더 크고(아무리 기상천외한 생각이라도, 비슷한 시기 비슷한 생각을 떠올리는 사람이 또 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정말 당신 작품을 보고 힌트를 얻었다고 해도 법적인 문제는 없다. 드라마의 표절은 대본에서, 대사의 일정 부분 이상이 동일해야 인정된다. 도의적인 책임을 묻고 싶어도, 도용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정말 ‘아무도 생각 못할 나만의 아이템’이 있다면(나는 그런 아이템은 아직 찾아본 적이 없는데), 공모전에 내지 말고 아껴두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대신 그 한 작품만을 가슴에 품고 산다면 평생 데뷔할 수 없다. 공모전에 내야 할 다른 작품들을 다시 써야 한다. 좀 더 무난한 소재의 작품으로 데뷔한 후, 다음 작품을 논의할 때 그 회심의 카드를 꺼내놓으면 정말 멋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반대로, 아이템 자체에 경쟁력이 있는 작품을 쓰고자 할 때에는, 다른 작가가 비슷한 아이템의 작품을 내놓은 적은 없는지 시간을 들여 찾아볼 필요가 있다. 아이템부터 그걸 전개하는 방식까지 너무 유사한 작품이 이미 나와 있다면, 피해갈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찾거나, 아예 다른 아이템을 찾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남에게 도의적인 책임을 묻기는 어려워도, 스스로가 도의를 내팽개치지는 말자.  


아이템은 어느 날 꿈처럼 갑작스럽게 떠오르기도 하지만, 보통은 일상생활 속에서 ‘발견’된다. “아이템을 어디서 찾지...” 고민할 시간에, TV(드라마든 비드라마든)도 보고, 책도 읽고, 사람들도 만나자.     


JTBC <4시 사건반장>처럼 시시콜콜한 뉴스들도 다루는 시사프로를 애청한다는 감독의 인터뷰를 본 적 있다. 영화 소재로 써먹을 만한 사연들이 많이 소개된다는 거다. 

<인간극장>을 열심히 챙겨본다는 작가의 얘기도 전해들었다.

아는 PD는 일부러 종이 일간지를 배달시켜 본다. 인터넷 뉴스 메인화면에는 등장하지 않는 단신들에서 의외의 아이템을 얻을 수도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보다 문학적이고 인간 본질을 다루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고전문학들을 탐독하는 작가도 있다.


가까이는 친구의 친구가 겪었다는 사건에서, 친척들이 골머리를 쌓고 있는 집안 골칫덩이의 사연에서, 인간극장보다 더 생생하고 현실감 있는 이야기를 뽑아낼 수도 있다.     


다시 말하지만 드라마는 사람의 이야기고 사람 사이의 관계의 이야기라,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드라마가 넘쳐난다.


마지막으로, 나는 아이템을 어떻게 찾았는지 간단히 소개한다.   

 

졸업작품집에 실었던 단막극은, 부모님에게 들은 두 분의 첫 만남 얘기에서 시작됐다.  

   

공모에 당선된 미니시리즈는, 나의 드라마작가로서의 ‘약점’으로부터 출발해 설정을 얻었던 케이스다.

습작을 할 때 너무 잔잔하다는 평을 많이 들었던 나는, 이번엔 정말 강하고 절절한 감정이 실린 이야기를 만들어보겠다고 다짐했는데, 여기서 ‘사이코패스 소년범인 아이를 둔 엄마의 이야기’라는 설정이 나왔다.

나중에 <케빈에 대하여> 등 몇몇 작품에서 이미 다룬 적 있는 설정이란 걸 알게 됐지만, 한국 특유의 가족 관계, 교육 환경에서는 완전히 다른 얘기가 나올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자극적인 소년범죄 기사들이 이어지고 소년법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은 요즘, 소년범은 특이한 아이템은 아니다. ‘2018 오펜 단막극 공모전’ 응모작들을 보면 - 공식 홈페이지에서 PDF 파일을 다운받아 볼 수 있다 - 소년범 소재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 두 편, 소년범죄를 주요 사건으로 가져가는 작품들도 서너 편 있다.  아이템을 풀어가는 방식은 작품마다 다르고, 그 방식이 작품의 개성을 만들어낸다. 나는 범죄물이지만 사건보다는 인물과 감정에 집중하는, 특히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 가족에게 감정이입할 수 있는 드라마를 만들어야겠다고 막연하게 결심했다. 막연했던 이유는, 아직 소년범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경찰서 여성청소년계 형사들 중 취재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수소문에 들어갔다. 

     

다음 글에서는 드라마를 위한 취재를 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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