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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 Jan 13. 2019

14. 드라마작가가 되는 세 가지 방법

뽑히기, 보내기, 그리고 소개받기

드라마작가로 데뷔할 수 있는 가장 잘 알려진 방법은, 주요 방송사나 대형 제작사에서 주최하는 드라마 극본 공모전에 당선되어, 그 당선작이나 다른 작품이 방송되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공개적이고 공정해 보이는 루트여서, 수백, 수천 명의 지망생들이 공모전에 낼 작품을 쓰는 데에 올인하고 있다.       


지망생 까페에는 방송사나 제작사에 대본을 보내 봐도 되겠냐는, 그런 방법으로 데뷔한 사례가 있냐는 질문이 가끔 올라온다.

읽어보지도 않고 버릴 거다, 아이템만 뺏길 거다, 주로 부정적인 댓글들만 달리지만, 가능성 0%라고 하기엔 또 혹시 모른다는 기대가 남는다.

공모전 예심에서는 수백 편의 응모작을 여러 PD가 랜덤으로 나눠 읽고 각자 본심에 올릴 작품들을 선택하는데, 하필 내 작품을 읽은 PD가 나와 취향이 상극이라면, 완성도와 상관없이 탈락할 수도 있다. 전작들을 봤을 때 내 작품의 분위기를 좋아할 것 같은 PD나, 내놓는 작품들이 내가 지향하는 드라마와 통하는 제작사에 대본을 보내보는 건, 공모전 심사과정에 작용하는 ‘운’을 기대하는 것보다 더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오로지 연줄을 통해 데뷔하는 경우는 없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인맥을 통해서 데뷔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는 있다.

입봉(일본식 표현이라 나는 ‘데뷔’로 대체해서 쓰지만, 대부분의 PD들이 아직 이 단어를 쓴다)을 앞둔 PD들은 한번뿐인 입봉작을 빛내줄 좋은 대본을 찾아 헤매고 있고, 미니 여러 편을 연출한 PD들도 글 잘 쓰는 작가는 참 드물다며 늘 한탄한다. 이들이 ‘어디 괜찮은 신인 작가 없을까’ 하고 고민을 털어놓을 만한 사람, 그 사람이 당신을 알고 있다면, 또 당신에게서 괜찮은 신인 작가가 될 가능성을 보았다면, 당신은 PD와 만나 그 가능성을 보여줄 기회를 얻을 수 있고, 운이 아주 좋으면 데뷔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      


정말 운이 좋게도 나는 세 가지 기회를 모두 만났다.

초고를 수정해 줄 작가를 찾는 PD에게 지인이 소개시켜줘 단막극으로 데뷔할 수 있었고,

방송국을 돌아다니던 대본이 취향이 통하는 PD의 손에 들어가 내 오리지널 작품으로 단막극을 한 편 더 방송할 수 있었다.

공모에도 당선돼 미니시리즈로도 데뷔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그 기회는 놓치고 말았다. 


내가 만났던 세 번의 기회를 좀 더 풀어 써보려고 한다. 작품은 많이 써놨는데 데뷔할 길이 막막한 지망생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한다. 스스로 만족할 만한 작품 하나 써놓은 게 없다면, 이 글은 작품부터 쓴 다음에 읽기를 권한다.      


앞선 글에서도 잠깐 언급했는데, 나를 데뷔로 이끌어준 인맥은 보조작가로 참여했던 드라마의 편집기사였다. 정식 명칭인 것 같아 적어봤지만 ‘기사’라는, 기술 전문 스태프 같은 느낌의 직함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분이다. 편집 전문 회사를 운영하는 대표고, 오랜 경력만큼 굵직한 대표작들이 여럿이다. 당연히 드라마라는 컨텐츠 자체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 기획 단계부터 우리 작가팀에게도 많은 도움을 줬고, 곁에서 지켜보니 많은 PD들이 흉금을 털어놓는 멘토 같은 존재였다. (편집은 드라마의 완성도에서 상당히 큰 지분을 차지한다.)   


인간관계에 서툰 나는 이 분과 특별한 친목을 쌓지도 못했고, 작품이 끝난 후엔 개인적인 안부 인사도 거의 하지 못했다. 그리고 2년 정도 지났을까, 단막극을 쓸 신인작가를 찾는 PD가 있으니 만나보라는 연락이 왔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게서 어떤 가능성을 봐주었나 보다. PD는 다른 작가와 준비하다 중단했던 대본을 주면서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수정해 주기를 요청했다. 며칠을 밤을 새며 매달렸고, 이후 두 달 정도 수정 작업이 이어졌지만, 결국 초고 작가와 함께 공동 작가로 이름을 올려 데뷔할 수 있었다. 내 수정고가 마음에 안 들었다면, PD는 또 다른 작가를 찾았을 거다. 운 좋게 다가온 기회를 내 것으로 만드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사람 참 못 챙기는 나 같은 지망생에게도 이런 기회가 왔었으니, 어느 자리에서든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리고, 용건이 끝난 후에도 지속적으로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는 성격의 지망생이라면, 비슷한 기회가 훨씬 많이 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괜찮은 작가 있는데 만나볼래?’라는 제안을 거절할 PD나 제작자는 없기 때문이다. (방송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이런 소개는 여러 번 더 이어졌다. 업계 사람을 만나 방송가 뒷얘기도 듣고 수다라도 떠는 건, 지망생에게 좋은 기분전환 거리가 됐다.)


사교성이 노력으로 높아질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게으른 나는 그런 노력 없이 생긴 대로 살고 있다) 자신의 존재와 가능성을 업계 사람들에게 어필하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단,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무엇보다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건 당연히 대본 그 자체다.      


두 번째 기회는 대본에서 시작됐다고 했다. 내가 직접 어딘가에 투고한 것은 아니다. 교육원 최종 과정을 수료하면 졸업작품집을 내게 되는데, 시중에 출판되는 것은 아니지만, 주요 방송사와 제작사에는 돌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때 모 방송사 드라마국 책장에 얌전히 꽂혀 먼지만 쌓여가던 작품집 한 권이, 장장 5년 후, 입봉할 단막극 대본을 찾고 있던 어느 PD의 손에 들어간다.

다행히 작가 프로필에 적어뒀던 전화번호는 바뀌지 않았다. 큰 수정 없이 방송되며 오래된 대본이 빛을 볼 수 있었다. 졸업작품이니 꽤나 심혈을 기울여 쓴 대본이긴 했다. 하지만 공모에는 여러 번 떨어졌던 작품이다. 이 대본을 보고 연락을 해왔던 다른 PD도 있었지만, 그 땐 방송까지 이어지진 않았었다. 소위 내 작품에 ‘꽂힌’ 연출가를 기적처럼 만난 것이다.


최선을 다해 쓴 대본이 공모전에 떨어졌다고, 대중성이 떨어진다는 평을 들었대도, 내 스스로 만족할 만한 대본이라면 절대 버리지 말고 아껴 두자. 언젠가 그 작품의 진가를 봐줄 사람을 만날 수도 있으니까.

다만 새로운 작품은 계속 써야 한다. 총알은 많을수록 좋고, 어떤 총알이 상대를 명중시킬지 모르니까.     


공모전에 당선된 작품은 ‘너무 쎄다’는 이유로 편성이 불발됐다. 너무 쎈데 왜 뽑았을까, 빈정이 상할 뻔 했지만 회사에서 제안한 아이템으로 새 작품을 써보기로 하고 집필 계약을 했다. 새로 쓴 작품(들)도 편성 받는 데에 실패했다. 


어쨌든 공모전에 당선, 까지는 성공한 경험이 있다.

이어지는 글부터는 그 약소한 성공의 경험을 바탕으로, 공모전을 겨냥한 작품 쓰기의 소소한 노하우들을 풀어보려고 한다. 

수많은 실패들에서 얻은 뼈아픈 교훈들은 그 뒤에 전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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