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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 Jan 12. 2019

13. 현장에서 하는 드라마 공부 - 보조작가(4)

열정을 지킬 수만 있다면!

보조작가로 일할 기회를 얻었다면,


첫째로, 건강을 심각하게 잃을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건강 얘기를 할 때마다 잔소리꾼이 되는 것 같은데, 몸소 경험한 게 있어서 그렇다. 


보조작가로 참여했던 어느 작품을 마쳤을 때 나는 생애 최고의 몸무게를 찍고 있었다. 성인이 된 후 1, 2키로 이상 찌거나 빠진 적 없이 늘 꾸준한 몸무게였는데, 반년 동안 10키로가 는 것이다. 맘 편히 잘 먹고 잘 지냈냐고? 반대다. 살면서 경험하지 못했던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하루 세끼는커녕 한 끼도 제대로 챙겨먹기 힘들며, 하루 네 시간 넘게 자 본 적이 없는 6개월을 보내고 나니, 엉뚱하게도 살이 쪄 있었다. 살만 쪘을까. 헤어라인이 1센치는 뒤로 넘어갔을 정도로 심한 탈모가 왔고, 윗가슴엔 원인을 알 수 없는 부스럼들이 생겼는데, 그 흉이 1년을 넘게 갔다. (작업 환경은 작품마다 다르고, 나는 일하는 요령이 많이 부족해 스스로를 괴롭히는 타입이었다. 너무 겁먹진 마시길.)


제일 힘든 건 먹는 문제였다. 앞글에 살짝 언급했지만 나는 밥순이인데, 메인작가는 일에 몰두할 때면 식욕 자체를 잃는 타입이었다. 메인작가가 굶고 있는데 보조작가가 냄새 풍기며 밥을 차려 먹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조용히 빠져나가 밥을 먹고 올 여유도 나지 않았다. 하루종일 우유 두 팩으로 버텼던 날도 있었다. 내가 신생아냐! 적어도 밥은 맥이면서 일을 시켜야 하는 거 아니냐! 속으로만 아우성쳤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내 몸은 내가 챙겼어야 했다. 허기지면 눈치 보지 말고 알아서 챙겨 먹고, 아프면 참지 말고 병원에 다녀오시길. 다소 산만하거나 유난스러운 보조작가라는 평판이 남는 게, 아픈 몸이 남는 것보단 낫다. 정신 건강을 챙기는 것 역시 중요한 문제다.      


두 번째로 챙겨야 할 ‘조심’은 ‘말조심’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드라마 판은 아주 좁은 바닥이다. 같이 일했던 메인작가나 PD, 동료 보조작가에 대한 뒷담화를 했다면, 99%는 당사자의 귀에 들어간다고 보면 된다. 특히, 자신의 고생담을 과장해서 “메인작가는 아무 것도 안 하고 마 내가 다 썼어 마!” 하고 떠벌리는 건 최악이다. 당사자 앞에서 할 수 없는 얘기는 다른 어떤 사람 앞에서도 하지 말자.  


마지막으로, 보조작가에 대한 글을 네 편까지 쓰면서 가장 당부하고 싶었던 것. 

보조작가 경험은 가능하면 두 번, 많아도 세 번은 넘기지는 말라는 거다. 


나는 보조작가로 2.5번 일했다. 

두 번은 방송 전 준비과정부터 종영까지 함께 했고, 한 번은 방송 중에 SOS를 받고 투입돼 절반 정도의 회차에 참여했다. 그 일들 사이에도, 마지막 일 이후에도, 보조작가 제안은 몇 번 더 있었다. 누군가 나와 같이 일하자고 찾아주는 건 참 고마운 일이지만,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보조작가 일을 너무 오래 하다 보면 ‘보조작가병’에 걸린다.


‘착한며느리병’이란 말은 들어봤을 거다. 결혼 초반 시부모에게 사랑받는 며느리가 되고 싶어, 부모에게도 안 하던 육체적, 정신적 서비스를 하느라 무리하게 되는 병. 자기의 본래 캐릭터는 무시하고 시부모에게만 맞추려고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지치게 된다. 사달이 난다.  


‘보조작가병’도 비슷하다. 하루종일 작품 생각만 하며 지내는데, 냉정하게 얘기하면 이건 ‘내’ 작품이 아니라 ‘메인작가’의 작품이다. 메인작가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올 수는 없는데도, 마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처럼 그의 취향과 인생관, 특유의 스타일에 맞는 아이디어와 글을 내놓아야 한다. 물론 메인작가와는 다른, 다양한 시각과 생각들이 요구되는 시점들도 자주 온다. 어쨌든 마치 회사원처럼, ‘상사’인 메인작가에게 결재를 올리고, 반려되고, 다시 수정해서 올리는 일들의 반복이다. 


오랜 시간 온 몸과 마음을 바쳐 일한 뒤에 남는 건, 몇 달은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 글만 쓸 수 있는 정도의 돈과, 당분간은 글 쓸 여력이 없을 만큼 지친 몸과 마음뿐이다. TV를 틀면 이 드라마로 인기를 얻은 배우들의 CF가 나오고, 인터넷 뉴스 연예면에선 메인작가의 인터뷰나 차기작 계약 소식을 만날 수 있다. 나는 일을 시작하기 전과 똑같은 지망생이다. 허무할 수밖에 없다.


허무함을 이겨내고 심기일전해 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보조작가병은 그 진가를 발휘한다. 메인작가가 좋아할 만한 아이디어를 내는 일에 익숙해졌다 보니,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잘할 수 있는지는 희미해졌다. 예전에 썼던 습작들을 읽어보면 내가 이런 것도 썼구나, 새삼스럽다. 오히려 실력 적인 면에서 퇴화한 것 같아 두려워지기도 한다. 구성을 하든 대본을 쓰든 여러 개의 선택지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전에 없던 선택장애에 걸렸음을 알게 된다. 나는 오랫동안 여러 선택지들을 제시하는 사람이었지, 최선의 것을 선택하고 밀어붙이는 입장에 서보지 못했던 것이다.  


다행인 건, 병이 중하지 않을 때엔 시간이 지나면 회복할 수 있다는 거다. 

퇴보한 것 같지만 실은 발전한 부분이 더 많다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된다. 


다만 병이 너무 길어지고 깊어지면 나을 방도가 없다. 

사람의 열정은 무한대로 샘솟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가진 열정을 남의 작품에 다 쏟아버려서는 안 된다. 맡은 일은 최선을 다하되, 내 글을 쓸 열정의 불씨까지 태워 없애버리지는 않도록 잘 지켜야 한다.      

보조작가를 직업으로 삼기 위해 이 공부를 시작한 사람은 없을 거다. 한 두 번이면 충분할 것 같다. 

이제 데뷔를 향해 달려갈 시간이다.     


다음 글에서는 여러분이 가장 궁금해하고 있을, 드라마 작가로 데뷔할 수 있는 여러 길에 대해 얘기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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