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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 Jan 12. 2019

12. 현장에서 하는 드라마 공부 - 보조작가(3)

보조작가가 이런 일까지 해야 돼?

보조작가 일을 하면서 글이 얼마나 느느냐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고, 자기 하기 나름이다.     


우선, 메인작가의 성향과 작업 방식에 따라, 보조작가에게 주어지는 일의 종류와 강도가 달라진다.

어떤 작가는 취재와 자료조사 위주의 도움만을 요청하고, 에피소드 아이디어들을 내는 걸 가장 중요한 과제로 내주는 작가도 있으며, 초고 구성이나 대본을 맡기는 작가들도 있다.     


요즘 드라마는 취재 과정이 전보다 더 중요해졌다.

전문 지식이 필요한 장르물이 많아졌고, 시청자의 눈도 더 매서워졌기 때문이다.

혼자 습작을 할 때는 취재가 필요해도 방법을 몰라 난감할 때가 많은데, (취재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후에 다른 글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편성된 드라마를 위해 취재할 때는 제작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 취재원들을 연결시켜 주고 (지망생에게는 부담스러운 소정의 사례비나 선물은 당연히 회사에서 지출한다) PPL 계약을 맺은 기업들은 상상 이상으로 적극적이고 협조적인 태도로 취재에 응해준다.

기자 출신이 아닌 이상 처음 보는 사람에게 전문적이거나 개인적인 질문들을 던지는 게 쉽지는 않은데, 이런 떠먹여 주는 취재들을 통해 점차 익숙해지고, 능숙해질 수 있다. 보조작가 일을 하면서 얻은 취재 스킬은, 내 작품을 준비할 때 쏠쏠하게 써먹을 수 있다.     


사극 보조작가에겐 책을 통한 자료조사가 더 중요한 업무다. 역사적인 배경지식과 흥미로운 야사들을 수집하기 위해 국회도서관에서 몇 달을 사는 보조작가들도 있다. 이 때 조사한 정보들과 에피소드들이 100% 대본에 반영되지는 않을 텐데, 쓰고 남은 것들은 당연히 나중에 자기 작품의 소재가 되고 배경이 될 수 있다.   

  

매회 필요한 에피소드들을 필요한 수의 몇 배로 쏟아내야 하는 건 어렵지만 좋은 훈련법이다. 


시트콤 작가 출신인 스타 드라마작가의 특강에서, 시트콤 작업은 여러 작가가 각각 내놓는 에피소드들 중 가장 재미있는 것들을 선별하는 것으로 시작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작가는 시트콤 작가 시절 수집했던 그 많은 에피소드들을 상황 별로 나눠 엑셀 파일에 정리해 두었다고 한다. 자기만의, 엄청난 분량의 ‘에피소드 데이터베이스’를 소유하게 된 것이다. 


고심해서 내놓은 아이디어가 거절당했을 때 바로 다른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수준까지 훈련이 된다면, 데뷔 후 제작사나 PD와의 수정 작업 과정에서도 유연함과 순발력을 발휘할 수 있다. 내 대본은 토씨 하나 못 고친다는 고집이나 자신감은 신인작가에겐 어울리지 않는다. 어렵게 찾아온 데뷔의 기회를 잃을 수도 있다.     


보조작가가 대본까지 쓰는 건 부당하지 않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대본을 쓴다면 메인작가와 똑같은 대우, 고료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본(보통은 초고)의 일부를 쓰는 작가와, 전체 드라마의 흐름을 이끌어나가는 작가의 역할과 비중에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차이가 있다. 


메인작가가 대본의 일부를 써보라고 맡겼다면, 보조작가가 왜 대본까지 써야 하느냐고 입이 나오기 보다는, 실제 방송이 가능한 대본을 쓰는 훈련을 할 수 있는 귀한 기회라고 생각하는 게 좋겠다. 습작생의 대본은 제작 현장을 무시하기 쉽다. 70씬을 모두 밤씬으로 채워 촬영 일수를 몇 배로 늘리거나, 한겨울에 어린 배우를 강에 빠트리는 (본의는 아니겠지만)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제작비나 촬영 스케줄, 여러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입장을 고려한 대본을 쓸 수 있게 됐다면, 당신은 데뷔의 길에 한 발짝 더 다가섰다고 말할 수 있다.    

 

보조작가에게 주어지는 세 번째 보너스는 바로, 인맥이다.


앞선 글에서 메인작가의 도움을 받아 데뷔하는 보조작가는 극소수라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인맥은 그런 ‘동아줄’이 아니라, 프로의 입장에서 내 글을 읽어봐 줄 ‘선생님’, 전우애를 나눈 ‘동료’, 나의 실력이나 태도, 가능성을 지켜본 ‘추천인’이다.  


드라마가 종영되면 작가팀은 대개 뿔뿔이 흩어진다.

그 후엔, 인간관계를 맺고 유지하는데 서툰 (대다수의) 보조작가들은, 별다른 용건 없이는 메인작가에게 안부 인사 전하는 일도 쉽지가 않다. 이때 메인작가가 보조작가에게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선의는 “작품 보내주면 봐줄게.”라는 말 한 마디다. 지망생들끼리 하는 스터디와 합평에는 한계가 있다. 다들 데뷔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메인작가가 내 습작을 봐주고 장단점을 짚어준다면, 한 단계 발전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런 발전들을 지켜봐온 메인작가가, 신인작가를 구하는 제작사나 PD에게 당신을 소개해줄 가능성도 무시할 순 없다. 꼭 실리를 취하자는 마음이 아니어도, 내가 꿈꾸는 길을 먼저 가고 있는 선배 한 명을 개인적으로 알고 지낸다는 것만으로 든든하고, 고마워질 때가 많다.     


같이 일했던 보조작가들끼리는 연락을 이어가기가 더 어렵다. 군시절이 너무나 괴로웠던 사람은 군대 동기 모임 따위 나가보기도 싫을 거다. 하지만 간혹 마음이 맞고, 서로 의지가 됐던 팀원들끼리는, 작가원 동기가 그렇듯 오랫동안 서로를 응원해줄 수 있는 동료가 될 수 있다. 한 번 보조작가 일을 하고 나면 다른 작품에서도 보조작가 제안이 들어오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 서로를 추천해줄 수도 있다.     


추천은 메인작가나 동료 보조작가가 아닌 엉뚱한 경로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나는 보조작가로 일했던 작품의 편집을 담당했던 분을 통해 단막극으로 데뷔할 수 있었는데, 자세한 사연은 뒤의 다른 글에서 풀도록 하겠다. 채널도 매체도 다양해졌지만 드라마를 만드는 곳은 아직 좁은 바닥이라서, 어떤 자격으로 어떤 작품에 참여하든, 일과 인간적인 면 모두에서 좋은 인상을 심어주면 나중에 반드시 돌아오는 것이 있다.     


보조작가로 일하면서 현장경험, 실력 향상, 인맥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얻는 게 많은 만큼, 잃을 수 있는 것도 많으니 조심하자.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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