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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 Jan 12. 2019

11. 현장에서 하는 드라마 공부 - 보조작가(2)

체험, 삶의 현장! - 어느 보조작가의 하루

지망생이 보조작가 일을 지원하는 첫 번째 이유는,

혼자 쓰고 노트북에 묻어두는 습작품이 아닌, TV에 방영되는 드라마를 만드는 일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조작가로 참여한 첫 작품의 1회가 방영되는 날 나를 가장 들뜨게 했던 건, 우리가 (대부분은 메인작가가) 쓴 대사가 잘 생긴 연예인의 배우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걸 목격하는 것도, 공홈 시청자게시판이나 디씨인사이드나 여초 까페들에서 우리 드라마가 언급되는 것도 아니었다.

드라마가 끝나고 예고 화면과 함께 스크롤이 올라갈 때, 눈여겨보지 않으면 글씨를 알아보기 힘든 그 목록들의 끝에서 내 이름, ‘보조작가 땡땡땡’을 봤을 때였다!

드디어 이 업계의 일원이 되었구나, 첫 한 발을 들여놓은 듯한 기분에 가슴이 벅찼다. 비록 급여는 일천하고 내 실력도 아직 미천하지만, 이 작품을 위해 이 한 몸 불살라보겠다는 각오가 선다.     


하지만 그 설렘은 오래 가지 않는다. 온에어일 때 작가(팀)의 일상에는 그런 달콤한 기분이 스며들 틈이 없다.     

100부작 아침연속극의 81회를 쓰고 있는 어느 작가팀의 하루를 들여다보자. 


메인작가와 세 명의 보조작가들은 어제도 밤을 샜다. 메인작가는 어제 10회만 연장하자는 국장의 전화를 받고, 20회 분량의 남은 이야기를 어떻게 30회로 늘릴 것인가를 고민하며 밤을 지새웠다. 그동안 보조작가들은 이번 주에 써내야 할 81회부터 85회까지의 회별 구성을 짜고 있었다.     


어느 새 우리 드라마가 방송될 시간이다. 밥순이인 나는 인스턴트 국과 밥을, 위가 안 좋은 메인작가는 어제 포장해 와 먹고 남은 죽을, 바쁠 땐 아무거나 먹고 때우는 스타일인 다른 보조작가들은 과자 부스러기를 주섬주섬 챙겨와 아침을 먹으며 우리 드라마 66회를 본다. (일일연속극의 경우 대본이 방송을 3주차 정도 앞서 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주인공 커플의 멜로씬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여기서 감정이 더 붙어야 하는데... 이래서는 75회의 프러포즈 씬이 뜬금없어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아직 촬영 전인 73회 즈음에 멜로씬을 하나 추가해야 하는 건 아닐까 다 같이 고민해 본다.     


방송이 끝나고, 잠시 환기하며 간단한 청소를 하는 동안, 메인 작가는 유치원생인 아들의 얼굴을 보러 달려간다. 가사도우미의 손을 잡고 유치원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아들. 3일 만에 보는 건가. 그나마 작업실을 집 가까운 데 얻어서 이렇게라도 짬짬이 만날 수 있다. 주말에 있을 학예회에 올 수 있냐는 아들의 말에 시원하게 대답해주지 못한다. 대신 있는 힘껏 꼭 안아주고 유치원버스에 태운 뒤, 다시 작업실로 달려간다.     


보조작가들이 간략하게 세워놓은 구성안을 들고 회의를 시작한다. 아무래도 연장 때문에 사건에 반전을 한 번 더 줘야 할 것 같다. 여럿이 머리를 끙끙 싸매고 애쓴 끝에 다행히 반전 포인트가 잡혔다. 늦은 점심으로 배달음식을 주문한다. 기름진 걸 먹으면 또 장에 트러블에 생겨 고생할 수도 있지만 대안이 없다. 밥을 먹으면서는 잠깐 주말 예능 재방송을 보며 머리를 식힌다. 배도 부르고, 어제 밤을 샌 탓에 기절하듯 쪽잠에 빠져드는 팀원도 있다.     


어느새 해가 기울고 마음이 급해진다. 오늘 81회를 끝내놔야 다음 일정도 차곡차곡 진행하고, 주말에 한 나절이라도 쉴 수 있다. 메인작가는 아들 학예회에 얼굴이라도 비추고 싶고, 보조작가 중 한 명은 주말에 엄마 생신 모임이 있다. 집중력을 끌어 모아 81회의 씬 구성 회의를 마치고, 분량을 나눠 초고를 쓴다.     

A4 25장을 네 명이 나누면 6~7장 정도. 아무 생각 없이 타이핑만 해도 손목과 어깨가 아플 분량이다. 주어진 시간은 두 시간 남짓. 그래도 최대한 완성도 있는 씬들을 쓰기 위해, 잠이 부족해 잘 안 굴러가는 머리를 열심히 굴린다.     


메인작가는 초고를 모아 하나의 흐름으로 만들기 위한 수정 작업을 시작하고, 보조작가들은 내일 쓸 82회 스토리를 잡기 위해 그들끼리 회의를 한다. 앉아만 있었더니 점심 먹은 게 아직 소화가 안 돼 더부룩하다. 저녁밥은 생략하기로 한다.     


완성된 81회 대본을 다 같이 읽어보고, 입에 붙지 않는 대사나 불분명한 지문 같은 것들을 다듬는다. 오늘은 자정 전에 끝냈다며 다 같이 기분 좋게 기지개를 펴는데, PD에게서 전화가 온다. 

71회 대본에 쓴 동물원이 섭외가 안 되는데, 아쿠아리움에 가는 것으로 내용을 수정해 달라는 요청이다. 남자주인공이 기린을 닮았다며 놀리는 장면이 있었는데, 기린을 뭘로 바꿔야 하나? 상어? 가오리? 원숭이한테 모자를 뺏기는 코믹 씬은 어떻게 고치지? 펭귄이 모자를 잡을 수 있나? 오늘도 세 시간 이상 자는 건 포기해야 할 것 같다...    


글로는 다 표현 못할 하루, 하루들을 직접 경험해보길 추천한다. 그리고 보조작가들이 경험하는 것보다 훨씬 큰 중압감과 책임감, 작업량을 안고 가는 메인작가의 무게를 상상해보자.

보조작가는, 과연 내가 드라마작가라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을 때 만족스럽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보조작가가 얻을 수 있는 두 번째 수확은 현장 경험보다 더 크고 중요한 것인데, 드라마 쓰는 실력이 는다는 거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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