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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 Jan 12. 2019

10. 현장에서 하는 드라마 공부 - 보조작가(1)

열정페이를 감수할 수 있다면...

영화감독들 중에는 현장 막내 스태프에서 시작해 조연출, 조감독 시절을 거쳐 감독이 된 케이스가 꽤 많다.

드라마PD도 조연출과 B팀 감독을 맡으며 현장 감각을 익힌다.     


드라마작가도 데뷔하기 전에 실전 감각을 익혀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

편성된 (또는 편성될) 드라마의 보조작가로 일하는 거다.

보조작가로 참여하던 작품이 편성을 받지 못해 팀이 해체되는 경우도 꽤 있는데, 물론 편성 이전까지의 과정에서도 나름대로 배우는 부분이 있겠지만, 온에어의 현장을 겪어보고 아니고는 큰 차이가 있다.

   

방송국이나 제작사의 기획작가로 일하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있고, 스크립터 일을 하며 많은 걸 배웠다는 지망생을 본 적도 있다. 하지만 보조작가는 메인작가의 그림자처럼 지내며 가장 가까이에서 집필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는 점에서, 한 번쯤 해볼 만한 일이다. 가수 뒤에서 화음을 넣어주는 코러스가수 같은 존재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앞선 글에서도 말한 적 있지만, 공개적으로 모집하는 보조작가 채용 공고들은 대부분 교육원 전문반 또는 연수반 이상이라는 자격을 요구한다. 메인작가 나이나 드라마의 톤에 따라 나이 제한을 두기도 한다. 메인작가의 성향이나 작업방식이 보조작가 생활의 9할을 좌우하지만, 작가의 이름은 보통 비공개다. 그래도 현장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니까, 다행히 자격도 되니까 지원해보자고 마음먹었을 때, 마지막으로 망설이게 되는 부분이 있다.      

보조작가의 급여는 열이면 아홉, 철저한 열정페이라는 거다. 


처음 드라마 제작사에서 일자리를 구했을 때, 이름은 ‘기획작가’였지만 ‘기획작가 + 제작사에서 준비 중인 여러 작품을 오가는 깍두기 보조작가’의 업무를 했었는데, 월 급여가 80만원이었다.

80년대 얘기가 아니다. 2006년이었다. 주말 알바가 아니었다. 나인 투 파이브에 주5일 근무도 아니었다. 평일엔 사무실에서 밤을 새는 날이 적지 않았고 주말엔 따로 해야 할 과제가 있었는데도 급여가 그 모양이었다.

그 땐 ‘열정페이’라는 말도 없었고, 부당하다는 생각도 못했다. “돈 주고도 못 배우는 걸 넌 돈 받으면서 배우잖아.”라는 말을 듣고도 그렇네, 고맙네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다른 제작사의 작품에 보조작가로 투입됐을 때는 사정이 좀 나아졌다.

회사에서 지급한 월 급여는 120만원이었다. 이때는 출퇴근을 하지 않았다. 작업실에서 6개월을 숙식했다.

그야말로 24시간 근무체제였다. 최저시급으로 계산하면... 그 전에 근무시간에서 노동법에 걸릴 것 같으니 관두자. 사정이 나아졌다는 건 농담이 아니다. 메인작가가 사비로 급여를 더 챙겨줬기 때문이다. 다 같이 고생하는데 120만원은 말도 안 된다며 대신 분개해 주었고, 제작사가 주는 돈보다 더 많은 액수를 얹어 주었다. 이건 내가 두고두고 동료 지망생들에게 자랑하는 액수가 되는데, 돈보다는 메인작가의 인품(인품을 고작 돈에서 찾다니 죄송하지만)에 대한 자랑이었던 것 같다.     


최근 지망생 까페에 올라온 보조작가 모집 공고에는 월급 160만원이 명시돼 있다.

이 글에 ‘최저임금 무시하냐’, ‘이런 모집글은 올리지도 마라’는 댓글들이 달린 걸 보고 놀랐다. 지망생들의 인식이 달라진 것이다.

댓글들에 영향을 받은 건 아니겠지만 며칠 후 올라온 또 다른 공고는 월 250만원을 얘기하고 있다.

또 한 번 놀랐다. 역시 최저임금에는 못 미치겠지만, (하루 12시간‘만’ 일한다 치면, 주휴 수당 같은 건 빼고 단순 계산했을 때 300만원이 조금 넘는다) 이만한 수입을 보장하는 보조작가 자리도 흔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지원자가 꽤 몰릴 거다. (2, 300만원 수준보다 훨씬 많은 돈을 주는 메인작가들도 몇 명 있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너무 소수의 얘기라 논외로 하겠다.)     


제공한 노동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옳다.

지망생들끼리 노조 같은 연합을 만들어 보조작가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자는 의견도 종종 보인다.

하지만 보조작가로 일하면서 일한 만큼의 경제적 보상을 받는 건 당분간은 어려워 보이는 게 현실이다.

지원자 한 명이 부당한 대우를 거부하고 돌아서도, 이만한 자리라도 감지덕지라며 줄 서 있는 지망생들이 수십, 수백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 조금의 노력도 하지 않았던 사람으로서 부끄럽지만, 지금 당장 보조작가 경험을 하고 싶다면, 일단 열정페이를 감수해야 한다. 다만 여러분은 보조작가 일을 하면서도, 데뷔 후 보조작가를 채용할 때에도, 보조작가를 하나의 직업으로 생각하고 처우 개선을 위한 고민을 꾸준히 계속해 주기를 부탁한다.    

 

경험해보면 경제적인 대우보다 더 보조작가를 괴롭게 하는 건, 작가다운, 또는 사람다운 대우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거다.      


보조작가로 일하는 동안 글 솜씨는 안 늘고 요리 실력만 늘었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 있다. 작가의 어린 자녀의 숙제를 도맡아 해줬다는, 믿기 힘든 얘기도 들었다. 집필 작업에 참여시켜주지 않고 개인적인 일들만 시킬 거면, 보조작가 말고 가사도우미를 채용하거나 심부름 어플을 이용했어야 맞다. 


내가 보조작가로 참여했던 작품들의 메인작가들은 다행히도, 보조작가를 ‘작가’로 대해주고, 취재든 아이디어든 초고든 집필에 관련된 일들만을 요구했다. 메인작가인 자신과 보조작가들을 묶어 ‘작가팀’이라고 부르는 게 참 듣기 좋았다. 이런 태도를 가진 작가들이 훨씬 많을 거라고 믿고 싶다.    


극단적으로는, 작가가 온갖 형태의 히스테리로 분출하는 스트레스를 온몸으로 받아줘야 했다는 보조작가들도 있었다. 액받이 무녀보다도 못한 처지다. 공황장애에 걸렸다는 말도 과장은 아닐 거다.    


그 정도 지경에 처했으면 도망쳐라! 도망쳐도 된다. 드라마도 드라마지만, 나부터 살고 봐야 하지 않겠나. 실제로 건강이나 가정사 등의 사유를 대고, 또는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고 조용히 사라지는 보조작가들을 여러 번 봤다.


단, 온에어 상황에서는, 참을 수 없을 만큼 부당한 대우를 당한 경우가 아니라면 자기 자리를 끝까지 지키는 것이 맞다. 많아야 서너 명일 작가팀에서 팀원 한 명이 빠지면 아무래도 대본의 완성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 텐데, 대본이 삐걱거리면 드라마 자체가 흔들린다. 드라마가 흔들리면, 앞서도 말했던 수십 명의 스탭들에게 피해가 간다. 주연 배우의 중도 하차만큼 큰 타격이 되지는 않겠지만, ‘내가 빠져도 이 드라마에는 손톱자국만큼의 영향도 끼치지 않을 거다’라는 생각이라면, 그냥 이 일을 시작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도 이 드라마에 한 몫 한다는 자부심과, 책임감을 가지고 일해야 일을 마친 후에도 남는 게 있다.     


유명 작가의 보조작가로 일하면 인맥으로 데뷔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 있을 거다.

실제로 ‘김은숙 작가의 보조작가 출신’ 같은 수식어를 붙여 새 드라마의 작가를 소개하는 기사들을 몇 번 본 적 있다. 하지만 실력 없이 인맥만으로 편성이 될 리 만무하다는 건 이제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거고, (자기 작품 편성 받는 것도 하늘의 별 따기인데) 보조작가의 데뷔에 힘쓸 여력이 있는 작가는 극소수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데뷔로 가는 길을 다이렉트로 열어주지 않더라도, 누구나 알 만한 스타작가가 아니라도, 한 작품의 편성을 따낸 메인작가의 작업을 옆에서 지켜보고 도우면서는 얻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     


다음 글에서는 이 일을 하면서 얻을 수 있는 것들과 잃기 쉬운 것들 몇 가지를 추려, 보조작가 이야기를 좀 더 이어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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