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국물을 먹고 자랐다. '마시고'가 아니라 '먹고'라 쓴 건, 그 국물들이 나를 살찌우고 키워냈다 믿기 때문이다.
엄마는 삼시세끼 국이든 찌개든 국물 있는 음식 하나는 꼭 밥상에 올리는 사람이었다. 각자의 자리 앞에, 아니면 상 한가운데에 허연 김이 펄펄 오르는 대접이나 뚝배기가 있는 모습이, 우리 집 밥상 풍경이었다.
나는 뭐든 간이 맞는 국물만 있으면 밥 한 그릇을 해치울 수 있는, 국과 밥을 사랑하는 아이였다. 미역국은 호로록 넘어가는 감촉이 좋았고, 된장찌개는 국물 맛이 쏙 밴 두부나 호박을 국물과 함께 떠먹는 재미가 있었다. 북엇국의 개운함과 사골국의 몸이 더워지는 기분도 일찍부터 즐겼다. 조미료를 아주 살짝 넣은 엄마표 김치찌개는 감칠맛이 대단해서, 어릴 적 우리 집에 놀러 와 그 맛을 봤던 친구들이 아직도 잊지 못할 정도다.
전기밥솥을 사용하기 전에는 아침마다 디저트로 숭늉까지 먹을 수 있었다. 그 구수하고 따끈한 물을 한 대접 먹고 나면 뱃속까지 다 편해졌고, 학교고 뭐고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정작 그걸 끓여낸 엄마는 숭늉을 먹지 않았다는 건 나이가 좀 들어서야 알았다.
나의 국물 사랑은 스무 살 때 첫 위기를 맞는다. 대학 진학을 위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오면서, 나의 주거는 전적으로 어른들의 뜻에 따라 외할머니 댁으로 정해졌다. 엄마는 '반찬값' 명목으로 외할머니에게 생활비를 보내드리기로 했다. 나는 명절 때마다 외가댁에서 만났던 푸짐한 상차림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더랬다. 그런데.
낯선 방에서 뒤척이며 첫날밤을 보내고 난 아침, 할머니가 차린 밥상에서는, 아무리 찾아봐도 국물이 보이지 않았다. 일단 어마어마하게 쌓인 이 고봉밥은 좀 덜어내야겠고. 마른 밑반찬 서너 가지에 김치 두어 종류, 메인 요리는 두부조림인가. 할머니 손맛이 어디 가진 않았지만, 입 속이 깔깔한 게 밥을 먹어도 먹은 것 같지가 않았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국물은 없었다. 할머닌 원래부터 요리를 좋아하지 않았고, 식구가 간소해진 후엔 상차림도 줄여왔다는 걸 나는 몰랐다. 오늘은 늦잠을 주무셨나, 오늘은 마땅한 국거리가 없었나 보지, 이해하려 해도서운함이 커졌다. 버릇이 잘못 들어, 끼니마다 국물이 나오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던 거다. 내가 국을 끓여볼까 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요리는 내 할 일이 아니라 여겼고, 대학 신입생은 너무너무 바빴다. 과, 반, 동아리, 학회, 매일같이 이어지는 신입생 환영회에 해장은 절실하고 싸가지는 실종된 나는, 할머니에게 이제 그만 국물을 내어놓으라 당당히 요구하고 만다.
'넌 젊은 애가 무슨 국물을 찾냐'고 혀를 차며 할머니가 뚝딱 만들어준 첫 국물요리는, 총각김치찌개였다. 쉬어 터진 총각김치를 숭덩숭덩 썰어 들기름에 지지고 물을 자작하게 부어 파 마늘만 넣고 끓여냈는데, 그게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냄비 바닥까지 박박 긁어먹었다.
그 후 내가 국물 타령을 할 때마다 할머니는 있는 김치로 성의 없게 끓인, 그런데도 희한하게 맛있는 찌개들을 만들어주었다. 자식들 시집 장가보내고 손주들까지 장성한, 50년 넘게 해온 살림이 물리고 지겨운 게 당연했을 할머니에게, 어느 날 갑자기 말만 한 손녀가 굴러들어 와 반찬투정을 해댔으니.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늘 반은 덜어냈던 고봉밥을 국물이 있는 날엔 싹싹 비워내는 나를 보며 할머닌 어이없다는 듯, 그래도 웃어주었다. 갑자기 어른이 됐고, 아무리 맥주와 커피를 들이부어도 해결되지 않던 불안함과 허전함으로 몸부림치던 내게, 뜨끈한 국물을 먹여주었다.
밥벌이를 하느라 밥 먹을 틈이 없는 팍팍한 시간들을 보내던 나는, 조금 늦게 내 주방을 갖게 됐고, 이젠 내 손으로 매일 국을 끓인다. 국물을 좋아하는 남자와 결혼해, 평일 저녁엔 내가, 주말엔 남편이 인터넷 레시피를 찾아가며 국과 찌개를 끓였다. 처음엔 콩나물국 하나 끓이는 데 한 시간이 걸렸고, 찌개 하나 끓인다고 간을 열 번 스무 번 보느라 밥 먹기도 전에 배가 불러오곤 했다. 그래도 포기할 순 없었다. 외식보단 집밥이 좋았고, 새 식구와 함께 차리는 서툰 밥상이 뿌듯했기 때문에. 아직 엄마나 할머니 솜씨에 가닿으려면 멀었지만, 이젠 제법 간은 맞춘다. 입맛에 맞는 국물 하나면 나도 남편도 다른 반찬이 필요없다. 가끔피자나 치킨을 시켜먹을 때도, 기념일이라고 스테이크를 썰고 온 날에도, 우린 드라마 주인공이 먹는 해장국을 보며 침이 고인다. 내일은 어떤 국을 해먹을까 얘기하며 벌써 뱃속이 든든해진다. 내가 좋아하는 걸 스스로 만들 수 있다니. 그걸 다른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도 나눌 수 있다니. 이제야 진짜 어른이 됐다고 느낀다.
능숙해졌다고 해서 늘 손쉽고 기꺼운 건 아니다.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이나 요즘같이 많이 더운 날엔 불 앞에 오래 서 있어야 하는 국물요리를 만들기가 부담스러워진다. 그럴 땐 엄마 생각이 난다. 엄만 매일 매 끼니를, 그 많은 국들을 어떻게 끓일 수 있었을까. 어떤 마음으로 끓였을까.
오늘은 국을 끓이지 말자 다짐한 나는 엄마에게서 얻어온 물김치를 내놓거나, 시어머니가 보내준 오이지로 냉국을 만들기로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국물, 태어나 지금까지 참 꾸준하게도 지켜온 국물 사랑이다.
결혼하고 나선 엄마 생일마다 우리 집으로 식사초대를 한다. 다른 날은 몰라도 엄마 자신의 생일까지 상을 차리게 하고 싶진 않아서다. LA갈비는 양념까지 되어있는 마트 제품이고 아귀찜은 동네 맛집에서 포장해온 거지만, 미역국은 한나절을 꼬박 들여 내 손으로 직접 끓인다. 할머니가 그 자리에 함께 한 건 딱 한 번. 오랜 병원 생활 중 잠시 건강이 회복돼 엄마 집에서 지내실 때다. 평소 식사를 잘 못하셨는데, 내가 끓인 미역국을 한 대접 깨끗하게 비워주셨다. 콧속이 시큰해졌던 건, 십여년 전 질리게도 먹었던 할머니의 총각김치찌개가 갑자기 너무나도 그리워져서였다.
사진 : "만개의 레시피", 율맘써니님의 레시피에서. 할머니가 해줬던 찌개랑 비슷한 비주얼이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다시 병원에 입원한 할머닌 이젠 목으로 음식을 넘기는 법을 잊으셨다. 쉽지 않다는 거 알지만, 딱 한 번만 더 할머니에게 국 한 그릇 대접할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다. 이왕이면 할머니 생일날. 그럴 수만 있다면 한나절이 아니라 1박 2일을 들여서라도 최고로 맛있는 미역국을 끓여야겠다.
나중에 또 후회하지 말고 엄마에게도 더 많은 국과 찌개를 끓여줘야겠다. 엄마가 내게 먹인 그릇 수는 반의 반의 반도 못 채우겠지만. 그 나머진 언젠가 만날 우리 아이에게 끓여주면 되지 않을까. 그 아이도 나와 남편처럼 국물을 좋아했으면 좋겠고, 그래도 국물 하나는 참 맛있게 끓였던 엄마로 기억됐으면 좋겠다.
염분을 많이 섭취하게 돼서 국물요리가 건강에 안 좋다는 말은 조금 서운하다. 국물도 없다는 으름장은 원래 뜻과는 다른 의미로 무시무시하다. 국물 없는 밥상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내겐 너무 허전한 것이어서. 그러니 조금 번거로워도 나의, 내 가족의 밥상에는 계속 국물이 올라올 것 같다. 어릴 적 기억 속의 우리 집 밥상 풍경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