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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 Dec 31. 2019

내가 떠날 땐 누가 나를 배웅해줄까

할머니를 떠나보내며

외할머니가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났다.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칼국수 한 그릇 먹고 커피를 마시러 가던 중에 부고를 전해 들은 나는,

너무 놀라 길바닥에 선 채로 울음이 터져버렸고,

친구는 제 어린 딸을 달래듯 내 손을 꼭 잡고 지하철역까지 데려다주었다.

택시를 타라는데, 지하철이 빠를 것 같았다.


지하철 안에서도 계속 훌쩍이면서도,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할머니 돌아가셨어. 발인날 휴가 낼 수 있으면 내고, 회사에 장례용품 지원 신청해줘.

... 이 와중에 시할아버지 장례식 때 남편 회사에서 보내왔던 종이컵이나 젓가락 같은 게 떠오르다니.

머리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할머닌 요양병원에 계셨다.

식사를 제대로 못해 콧줄을 낀 지도 오래였다.

치매로 방금 한 얘기도 잊기 일쑤였고

망상 증상까지 있었지만,

자식과 손주들은 분명히 알아봤고

우리가 하는 농담에 웃어주는 건 물론 본인도 툭툭 농담을 던지곤 했다.

불편하고 답답하고 아프면서도. 그렇게 계속 그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실 것만 같았는데.


이제 그만 아프고, 그만 답답하고 싶으셨나 보다.


병원을 제일 많이 찾았던 건 아빠, 그러니까 할머니의 사위였다.

거의 매일 출근하듯 했기 때문에, 임종 전날, 할머니가 의식이 있을 때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눈 사람도 아빠였다.

그날도 평소처럼 말씀도 많고 불평도 많았던 할머니는, 자꾸만 돌아가신 할아버지 얘길 물었다고 했다.

이 양반이 어딜 가서 날 데리러 안 오냐고.

살아선 그렇게 투닥거리시더니.

이젠 사이좋게 지내고 계시려나.


엄만 하루 종일 할머니 걱정을 하면서도

할머닐 보러 가는 건 두려워했다.

보고 오면 몸살 나도록 가슴이 아프니까.

병원 환경이 마음에 안 들지만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할머니를 보내며 엄마는 참 많이도 울었지만,

이젠 할머니가 고통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니까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진다고 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콧줄을 자꾸 빼려고 해서 손을 묶어놨었고, 그걸 참 싫어했었는데.

이젠 우리 할머니, 자유다.   



크리스마스이브와 크리스마스, 빈소를 찾은 조문객들은 대부분 사촌동생들, 그러니까 할머니의 친손자들의 친구들이었다.

20대 남자애들만 넷.

여자친구랑 데이트하기로 한 날이었을 텐데.

동생들에게도 내게도 잊지 못할 크리스마스다.

남편에겐 레스토랑 예약한 거 얼른 취소하라고 농담을 했다. 농담이 나왔다.


조문이 어색한 사회초년생들, 그 모습도 참 예쁜 청년들로 가득 찬 장례식장을 보니, 어쩐지 마음이 애틋해졌다. 나와 그들이 참 멀게 느껴졌고, 나와 죽음은 한 발짝 가까워졌다는 걸 느꼈다.


조문객이 없을 땐 향이 꺼지지 않도록 지키려 제단 앞에 쭈그려 앉은 채 긴 시간을 보냈다.

사진 속 활짝 웃는 할머니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내가 죽으면 누가 내 사진 앞에 향을 올려줄까.


옆 호실 젊은 망인에겐 상주가 없었다.

전광판의 상주 이름 자리엔 부, 모, 형제의 이름이 있었다.

승화원에선 우리 차 앞 차에서 무연고자의 관이 내려졌다.


떠날 때 배웅해줄 자식이 없다면 많이 쓸쓸할까.

배웅하는 자식이 너무 젊다면, 미안하고 후회스러울까.

어차피 그땐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하겠지만,

지금은 그 풍경을 상상할 수 있어서 조금 서글프다.


죽어서도 누군가의 마음속에 남고 싶은 욕심, 그렇게라도 삶을 연장시키고 싶은 욕망 때문에,

사람은 아이를 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시 할머니를 생각한다.

할머닌 치매가 심해지기 전에도 내게 아기 소식을 물은 적이 없었다.

그저 신랑이랑 사는 게 재밌냐고, 신랑이 잘해주냐고만 물었다.

결혼하고도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할머니 눈엔 내가 어리게만 보여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할머닌 나의 난임을 걱정하거나 안쓰러워하지 않은 유일한 가족이었고,

그래서 할머니랑 함께 있는 시간이 참 편안했다는 걸, 이제서야 깨닫는다.


할머니의 바람대로 신랑이랑 서로 잘해주면서, 재밌게 살아야겠다.

그리고, 꼭 자식이 아니더라도, 곁에 있던 누구라도, 그가 단 한 사람일지라도,

내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해줄 수 있도록.

선한 삶을 살고 싶다.

그렇게만 살 수 있다면, 그게 또 부모로서도 부끄럽지 않은 삶이 되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할머니가 떠난 뒤에도 세상은 그대로인 것처럼 보이지만,

 나간 접시처럼, 보이지 않는 어느 한 구석이 깨져버렸다는 걸 느낀다.

그 깨진 부분을 다시 채워줄 새로운 생명을 만날 수 있기를.

그리고 할머닌 다른 세상에서 부디 평안하시길.

새해 소망으로 빌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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