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쌀쌀해질 때 부모님께 전활 걸었다.
드시고픈 게 있으시냐고 여쭈었더니, 아버지께서 양식을 드시고 싶다고 하셨다. 지난해 크리스마스이브에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함께 식사한 때를 말씀하셨다. 이번에는 그 장소보다 더 좋을 레스토랑을 검색하고 예약했다.
예배를 마치고 서둘러 부모님 댁에 도착했다.
어머니가 차려주신 점심을 먹고 집안에 손봐야 할 것이 있는지 둘러보았다. 수도필터부터 갈고 청소를 했다. 베란다 창문에 낡은 뽁뽁이가 떨어져 있었다. 새 뽁뽁이를 사서 붙이고 낡은 문풍지도 떼어 버렸다. 한결 깨끗해졌다. 부모님께서도 한결 따스해진 것 같다고 좋아하셨다.
곧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커피 음료를 먼저 받고 스파게티, 리조또, 스테이크, 피자들이 연이어 나왔다. 아버지는 매우 맛있게 식사하셨다. 한식을 좋아하시는 어머니도 즐겁게 식사하셨다. 도란도란 이야길 나누었다. 아버지는 말씀이 원체 없으시기 때문에 눈빛을 보면 안다. 매우 기쁘고 만족하시는 모습이셨다. 그 순간 일생일대의 생각을 처음 했다. '유학 가질 않길 잘했어.'
나의 증조부께서는 지역에서 꽤 존경받는 분이셨다.
증조부를 뵌 적은 없지만, 꼬맹이 시절 머리가 허연 어르신께서 증조부께서 훌륭한 분이시라며 40대였던 우리 아버지께 머리 숙여 인사하시는 걸 봤다. 증조부께서는 어떤 분이셨을까 궁금했다. 김구 선생님과 서신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분이 있으셨고, 광복절 전에 태극기를 만들어 주민들에게 나눠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일본군이 퇴진하기 전 증조부를 베고 가려고 집에 들어왔는데 대청마루에 좌정하신 증조부께서 "벨 테면 베어라"하고 외쳤다고 하셨다. 일본군은 주춤하더니 그냥 달아났다고 한다. 김구 선생님과 정당활동을 하셨고 그분의 서거 후 운구함을 들었던 이들 중 한 분이셨다. 이승만 대통령이 장관직을 제안했지만 당신께서 배운 것이 없다고 사양하셨다. 정당 변경의 제안도 사양하셨고 김구 선생님의 당을 고수하셨다. 출마 당일 어떤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무혐의 처리되는 과정이 반복되어 낙선을 4번 하셨다. 당을 바꾸기만 하면 쉽게 해결될 사안이었으나 증조부께서는 그러지 않으셨다. 지역민들은 증조부를 존경하는 마음에, 난이 그려진 화투패를 던질 때면 증조부의 성함을 외쳤다고 한다. 약국에서 일할 때 한 동향 어르신을 알게 되었는데, 증조부께서 얼마나 유명하셨는지 궁금한 마음에 증조부 성함을 여쭈었다. 그 어르신은 그분을 어떻게 아냐고 되물으셨고, 나의 증조부 되신다고 답하니, 당신 평생에 그분의 증손녀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며, 증조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내가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증조부의 아드님들, 그러니까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 되시고, 나의 할아버지 되시는 분은 경찰이셨다.
할아버지의 동생은 장교셨다. 6.25 전쟁 시 참전하셨는데, 할아버지는 전쟁의 참혹함에 경찰을 그만두고 공장에서 일하시다 팔을 다치셨다. 장교셨던 작은할아버지는 처자식은 나라에 맡긴다며 위험한 지역에 참전하셨고 결국 전사하셨다. 장손이신 나의 아버지는 증조부를 매우 존경했고 그분의 뒤를 따르고 싶었던 마음이 크셨다. 증조부께서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고등학생인 아버지는 서울에서 고향으로 전학을 하셨다. 친인척들이 서울에서 계속 공부해야 한다고 말렸지만 증조부 곁을 지키고 싶으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당신 삶에 아쉬움이 있으셨다.
많은 이들의 기대가 있었지만 그에 미치지 못했다고 생각하신다. 사업은 아빠 적성에 잘 맞지 않은 것도 같았고 가난했다. 증조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란 어린 나도 가문을 일으키고 싶었다. 아버지께서 시골로 내려오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도 있었다. 증조부께서 당을 바꾸기만 했어도 낫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했다. 그런 나에게도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건보공단을 다니던 중 유학을 결심하였다.
이 회사랑 결혼하겠다 할 만큼 애정이 큰 건보공단이었고, 유학을 다녀와서 다시 입사할 생각이었다. 과거 한번 유학 기회를 포기한 적이 있어 이번에는 기필코 유학을 가겠다는 의지로 사직을 결정했다. 아이비리그 후보대학 중 콜롬비아대학이 내 지원에 관심을 갖는 메일을 회신해 좀 더 준비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런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께서 시술을 하실 예정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조기 위암이셨던 것이다. 상피세포를 발라내면 되는 시술이라 큰 수술은 아니었지만 나의 행보를 주저하게 되었다. '지금 가면 5년은 미국에 있어야 할 텐데... 그럼 아버지는...'
고민 끝에 고향에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나의 다음 행보에 대한 불안함도 있었지만 하나님이 인도해 주실 거란 믿음으로 결정했다. '지금은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다.' 이후 아버지는 잘 회복하셨다. 안도했고 나의 다음 여정을 고민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마음이 마냥 괜찮았던 것은 아니다. 아버지처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함이 있었다. 아쉬움과 원망이 뾰족한 결정체가 되어 부모님께 뾰족한 반응을 하곤 했다. 꿈과 기회를 잃어버린 듯한 낙심이 불쑥 튀어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감사할 일이 많다.
아버지께서 사람들의 기대만큼 할 일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잘 버텨주셨고 우리들과 함께 해주셨다. 나는 일과 공부를 병행하면서 제약조건에서 나 자신을 성장시키는 법을 배웠다. 나 자신을 성장시키면서 가족과 함께 하는 법을 배웠다. 오랜만에 아버지 어머니를 뵈면 무엇이 불편한지 한눈에 보인다. 아버지께서 허리가 불편하시다고 했는데, 신발을 신는 모습을 보니 허리를 구부리신다. 나는 허리를 구부릴 필요가 없는 길이가 긴 신발주걱을 바로 주문하였다.
미국 유학을 가지 못한 섭섭함이 마음 속 깊이 자리잡고 있었던 모양이다.
15년이 흐른 뒤 오늘에서야 문득 나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스스로에게 인정했다. '그래, 이게 행복이지. 우리 가족들과 이렇게 웃으면서 마음 평안히 식사하는 이 일상이 행복이지. 진짜 원하던 게 이거지. 유학 안 가길 잘했다.' 음식도 잘하고 분위기도 좋은 레스토랑을 더 섭외해서 예약해 뒀다. 연말이라 두 번은 더 갈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