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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낭1

일사병 챌린지

by 두만

베트남 다낭은 '경기도 다낭시'라고 불릴 만큼 한국인 관광객이 많은 곳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월요일 밤비행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제주항공의 보잉 737은 들뜬 한국인들의 열기로 가득해서 찐만두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코로나는 전생인가 싶을 만큼 사람들 99% 이상이 노마스크였는데 여행에 대한 흥분감을 낯선 사람들과 숨김 없이 공유할 수 있다는 게 어색하고 신기했어요. 다만 이 비행기는 작고 낙후해서 체취와 음식 등 좋지 않은 냄새들이 비행 내내 가시질 않았습니다. 저는 다소 둔감한 쪽이라 5시간 동안 별 생각 없이 잘 갔습니다만 일행분께서는 머리가 아프다고 하셨어요. 제주항공은 저가항공이고 기내식은 없지만 승무원분들이 친절하셨어요. 원하시는 승객분께 직접 타로도 봐드리고 소소한 이벤트도 여셨는데 어떻게든 손님을 즐겁게 해주시려는 모습이 귀여웠습니다.


새벽 1시 경 베트남 다낭의 페닌슐라 호텔에 도착해 새벽 3시경 잠들었습니다. 하지만 조식을 먹어야겠다는 일념으로 8시에 눈을 떴습니다. 대단한 메뉴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조식으로 시작하는 하루가 특별하게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과일은 생각보다 종류가 많지 않고 한국에 비해 당도가 낮은 편입니다.


함께한 일행이 호캉스를 즐기겠다고 해서 다낭 1일차 관광은 저 혼자 시작했습니다. 첫 행선지는 미케해변이었는데 제가 원하는 스팟은 택시로 7분, 그랩(베트남 택시) 요금은 3000원 내외였어요. 걸어서 가면 45분이 걸리는데다 바깥은 기온 35도를 웃도는데 어떤 미친 여자가 그 땡볕에 걷나 싶겠지만 그게 나예요. 저는 사실 걷는 걸 너무 좋아합니다. 길치지만 헤매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서 종종 되는 대로 낯선 곳을 걸어다닙니다. 낯선 곳에선 평범한 풍경도 특별해지고 힘든 일도 사소해지는 기분이 듭니다. 지면과 발 사이의 중력마저도 오랫동안 남는 기억이 되고요. 어떤 공간을 내 경험으로 흡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그래서 망설임 없이 걷기 시작했습니다. 얇은 샌들 바닥으로 모래사장의 열이 뚫고 들어와서 뜨거운 모래찜질을 하는 기분이었지만 그마저도 여기가 아니고선 겪기 힘든 경험이지요. 그렇게 15분쯤 갔을까요. 과일 노점 할머니가 어눌한 한국어로 저를 불렀습니다.


'마시써요, 마시써요 망고스띤'


여행지란 어쩌면 일상과 유리된 낯선 감정에 몸을 내맡기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판단력도 흐려지고요. 같잖은 동정심으로 발길을 돌리자마자 제 손에는 1kg 가량의 망고스틴이 들립니다. 내려놓고 가려다가 옆에서 굳은 얼굴로 보는 아들(혹은 남편)의 포스에 눌려 조용히 지갑을 꺼냈습니다. 돈을 찾으려는데 남자가 지갑에서 1만동을 빼갑니다. 저는 당연하게 손을 내밀었으나 기대한 잔돈은 없었습니다.

참다 못해 이러지 말라고 한 마디를 해보았으나 모자(혹은 부부)는 꿈쩍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가기로 합니다. 여행지에서는 좋은 기분만 느껴야 하니까요. 한손 가득 쥔 망고스틴은 무거워서 해변가의 어느 일행에게 나누었습니다. 저의 불행이 누군가에겐 행운이었네요. 저는 두세개만 집어 가방에 넣고 다시 걸었습니다.

사실 저는 이런 일에 뒤끝이 없는 편입니다만 남한테 모지리로 보이는 걸 꽤나 신경쓰는 편입니다.

아무튼 미케해변에는 잘 도착했습니다. 바다는 어디든 좋지만 동남아 특유의 청량한 바다 색깔 덕에 수도꼭지를 끝까지 켠 듯 상쾌한 마음이 왈칵 터져 나옵니다.


시내까지는 그랩을 이용했습니다. 한시장에서 내렸는데 아무래도 저는 쇼핑과는 거리가 먼 족속인지라 그냥 지나갔습니다. 기대한 것과는 조금 다르기도 했고요. 대신 시장 뒤쪽의 번화가를 30분쯤 걸었습니다. 한참 도시를 걷다 보면 낯을 가리던 여행지도 어느새 제게 민낯을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베트남에선 오토바이 행렬을 흔하게 볼 수 있는데 남녀노소 -심지어 정장치마를 입고도- 다양한 사람들이 오토바이를 이용합니다. 신호등도 별로 없고 있는 곳에서도 무시하기 때문에 무법지대나 마찬가지. 하지만 신기하게도 사고는 나지 않습니다. 전국민이 눈치게임이라도 하듯 운전에 그들만의 호흡이 있는데 여행자 역시 어느 순간 그 리듬에 동화됩니다. 하지만 늘 긴장하는 게 좋습니다. 사고는 언제 어디서 날 지 모르니까요.

번화가를 걷다 보니 관광지로 유명한 핑크성당이 보였습니다. 성당이 핑크색이라서 관광지가 되었다니. 이 사소한 변화 하나가 마케팅이 된다는 게 제법 신기합니다. 성당은 밖에서만 잠깐 구경하고 가보고 싶었던 콩카페 1호점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직원에게 메뉴 추천을 부탁했더니 코코넛 커피 스무디를 추천합니다. 베트남에서는 영어가 그다지 잘 통하지 않는 편이지만 파파고를 적극 이용하면 의사소통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카페는 이미 만석이었고 제 앞으로 대기줄이 꽤 길었지만 코코넛 커피 스무디는 맛이 좋았습니다. 베트남 여행 전 물갈이에 대한 얘길 많이 들어서 배탈이 날까 걱정했는데 저는 밖에서 파는 걸 먹어도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어렸을 적 인도의 비위생적인 성장환경이 만들어준 면역력인가 봅니다. 제 경우에 한해 괜찮았던 것이니 민감한 사람들은 알아서 조심하는 게 좋겠습니다. 낭만과 무모함은 정말 한 끗 차이입니다.

번화가 쪽에서 한강 다리를 건너갔습니다. 평일 정오의 쨍한 햇볕을 맞으며 다리를 건너는 미친 여자는 역시나 저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중간쯤 왔을때 후회했습니다. 사람들이 하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다리를 건넌 후 바로 눈에 띈 쇼핑몰 빈컴플라자에 들어갔습니다. 시원한 곳에 들어가니 일사병처럼 머리가 핑 돌았습니다. 약간 토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쇼핑몰을 구경했습니다. 특별히 살 것은 없었으나 눈요기로 꽤 좋습니다. 여러 의류매장과 식품매장, 소품샵 등이 입점해 있거든요. 저는 이곳에 입점한 스파브랜드 매장에서 남자친구에게 줄 (다소 튀는) 기묘한 이야기 콜라보 셔츠를 사갔는데 결국 남자친구에게 한번도 입혀지지 못했습니다.


오후에는 2일차에 가려 했던 호이안으로 향했습니다. 시내에 갈 때 이용했던 그랩 기사를 개인적으로 콜해서 호이안에 갔습니다. 그랩보다 조금 저렴합니다. 여기도 기사들에게 수수료 같은 게 있는 모양이에요.


호이안은 한국의 인사동 같은 곳입니다. 상업화된 전통 마을 그런 느낌인데 포토스팟이나 먹거리를 좋아한다면 재밌을 것 같습니다. 마사지도 많아요. 세 걸음에 한번씩 '마사지, 마사지!' 외치면서 다가와 적극적으로 호객하는 언니들을 볼 수 있습니다. 다낭은 한국인들이 큰손이라 그런지 대체로 호의적인 편이고 치안도 좋은 편이에요. 하지만 혼자 다니면, 아무래도 특히 여성이 강매와 호객의 대상이 되기 더 쉽고 번화가 뒷골목으로 가면 조금 노는 언니 오빠들도 많답니다. 물론 유흥가도 많고요. 비단 베트남뿐만 아니라 어딜 다니든 안전하게 다녀야겠지요.


저는 호이안의 투본강 옆을 하염없이 걸었습니다. 소원배 기사가 호객을 합니다. 얼마냐 물었더니 20만동이라고 합니다. 보통은 15만동인 걸 알지만 통통배를 저 혼자 타니 그냥 20만동을 주기로 합니다. 그리고 소원배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베트남에서 가장 인상적인 경험 중 하나였어요.

배는 엄청 낡은 나뭇배지만 안에 구명조끼가 있습니다. 일몰 직전의 늦은 오후에 타니 시원한 바람이 느껴졌습니다. 배를 타면서 본 호이안의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어딘가 슬프고 그렇지만 마냥 슬프지만은 않았습니다. 이곳은 베트남 전쟁의 거점도시였던만큼 유럽식 건축물이 무척 많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벗어나면 시가지와는 다른 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낡은 민가, 떠도는 소, 우거진 수풀. 관광객으로 가득한 번화가보다 이런 양가적인 풍경들이 호이안의 역사적 가치를 더욱 옹골차게 품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집에 돌아가려고 보니 핸드폰 배터리가 5프로 정도 남아있었습니다. 앞에서 안전을 강조한 것과는 다른 행보네요. 부랴부랴 그랩 기사를 불렀는데 다행스럽게도 꺼질때쯤 기사가 도착했습니다. 위급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보루가 사라지니 초조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도시의 풍경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저녁엔 일행과 나가 쌀국수를 먹고 11시쯤 잠을 청했습니다. 항불안제와 멜라토닌을 먹지 않았는데도 잠에서 한번도 깨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의 수면장애는 역시 운동부족이 문제였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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