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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기 Nov 13. 2015

12. 주황색 고독

주황색 고독

저기 저 우울의 바닷물을 들이키는 여인
토악질하며 게워내는 고독이 나는 참 슬프다
여인의 위장은 소금기로 절여졌고 허파는 비쩍 말라 호흡에도 피가 난다
念粉이 필요하기로서니 흡수하지도 못할 슬픔을 섭취할 필요는 없었다
정말 나에게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멀쩡한 나는 어떡하라고

한 손에 수통이 있지만 건넬 수가 없다
내가 마시는 물이 저 여인에겐 또 다른 바닷물이다
이미 몇몇의 물을 받아 마셔봤던 저 여인에겐 내가 까마귀일 것이다
그러니 나는 관음 중이다
이만치서 터질듯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니 나는 관음 중이다

저기 저 물을 찾아 멀어지는 여인
후들거리는 발자국이 나는 참으로 밉다
조금이라도 이해해 보려 눈에서 소금을 짜내보지만
이것으로 저 여인의 혀돌기를 상상함은 모독이다
그래서 무릎으로 여인이 뱉어낸 고독이 있는 자리까지 기어갔다

여인의 고독은 피가 섞여 붉은 색이었다
불가능성 뒤에 오는 것이 충동이라
그 빨간 토사물을 움켜쥐고 목구멍에 쑤셔넣었다
비릿하며 역겹게 시다.
그러더니 이번엔 내가 잔뜩 토악질을 해댔다
여인의 빨간 토사물 위에 노란 토사물이 덮였고
부끄러워진 나는 모래흙으로 감춘 뒤 도망쳐 나왔다

입 안에 시큼함이 남아 수통을 꺼내 물을 마셨다
이게 바닷물이었으면, 이걸 마시고 나도 붉은 토악질을 할 수 있었으면
빌어먹게도 물이 시원했다.

글을 쓰는 나를 좌절하게 만들고, 그럼에도 글을 쓰게 만드는 건 타인의 아픔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이다. 타인을 생각하다보니 나에겐 그 '타인'에 대해 특정한 이미지가 생겨버렸다. 앞서 소개했던 <시쓰겠단 시> 이후로 나는 그 '타인'을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했다. <주황색 고독>은 그 '타인'의 이미지와 그를 대하는 나의 태도를 묘사한 시다.

이 시는 이야기를 갖고 있다. 어딘가 아파보이는 여인이 바닷가에 있다. 목마름에 이성이 마비된 것인지 자살하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바닷물을 들이키고는 토악질을 하며 더욱 괴로워한다. 그리고 그 모습들을 멀리서 지켜보는 '나'가 있다. '나'는 괴로워하는 그녀에게 어떤 도움도 줄 수가 없다는 사실에 어쩔 줄 몰라한다. '나'에겐 물이 있지만 '나'에게서야 마실 수 있는 물이지 여인에겐 바닷물 같은 것이다. 여인은 이미 나와 같은 이들의 물을 받아마시며 죽을 경험을 했고, 물을 건네는 나는 그녀에게 죽으라고 말하는 것일 테다.

여인은 물을 찾아 아픈 몸을 이끌고 떠났고 그 곳엔 '나'만 남았다. 여인의 몸을 절이는 소금기를 이해하려 눈물을 짜내보지만 그것으로 그녀가 머금은 소금기를 상상하는 것은 그녀에 대한 모독임을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여인이 있던 자리에 성큼성큼 다가갈 수가 없다. 감히 그럴 수 없어 '나'는 그 자리까지 무릎으로 기어간다.

가까이서 본 여인의 토사물은 피가 섞여 붉은 색이었다. 아까까지 '나'는 여인에게 다가갈 수 없음에서 오는 결핍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충동을 느끼고 보고 있는 그것을 손으로 움겨쥐어 입 안에 넣었다. 맛은 비릿하고 역겨웠다. 그러더니 '나' 역시 여인이 쏟아냈던 자리 위에 토악질을 했다. '나'가 쏟아낸 것은 여인의 것과 달리 정상적인 노란색이었다. 그것을 본 '나'는 수치스러워졌고 주변의 흙으로 그것들을 덮은 뒤 자리에서 도망쳤다. 자리를 빠져나온 나는 입안에 남은 시큼함을 없애려 갖고 있던 물을 마셨다. '나'는 물을 마시며 여인을 생각한다. 이게 여인이 마시던 바닷물이었으면, 여인처럼 나도 붉은 토악질을 했으면 하고 생각하지만 물은 시원했다. '나'는 이제 괜찮아졌다.

요컨대 내가 가진 타인의 이미지란 이런 모습이다. 보이긴 하지만 말은 걸 수 없는 거리를 나와 두고 있고, 마시면 죽는 바닷물을 들이켜 괴로워하고, 고통에 겨워 붉은 토사물을 쏟아 내곤 하는 여인. 이 여인을 생각하면 나는 먹먹해진다. 굳이 바닷물을 상상한 것은 소금을 뜻하는 한자인 "鹽(염)"과 생각을 뜻하는 "念(념)"의 소리가 같음에 착상한 것이다. 여인이 마셨다는 바닷물(소금물)은 결국 생각이 가득 담긴 "말"을 의미한다. 타인의 생각은 대부분 나에게 공허한 것이다. 여인에게 '나'는 타인이니 어떤 말을 건넨들 그것은 공허한 말이고 그것은 여인을 더 괴롭게 할 것이었다.

이 시에는 마침표가 두 개 찍혀있다. 그리고 그 마침표들은 '나'가 여인을 생각하며 무언가를 입안에 넣고 그것의 맛을 느끼는 부분에 찍혀있다. 그리고 그 행들에는 '시'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다. 나에게 있어 시란 무력감을 이겨내고자 하는 발버둥과 같은 것, 시를 쓴 나만 즐기려했던 '이스터에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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