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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기 Dec 31. 2015

세 번째 편지

새해를 맞으며

형께서 편지를 받으셨을 땐 새해를 맞으신 뒤겠지요. 2016년입니다 형. 새해에 어울리는 덕담을 적으려다가 어떤 말이 형을 흡족하시게 할 수 있을지 생각해봤어요. 의례적이고 상투적인 표현을 워낙 혐오하는 형이시니까요. 하지만 남을 기쁘게 하는 말을 고민하는 일이 어려워 결국 저를 기쁘게 할 법한 말을 생각해봤습니다. 형과 제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믿으면서요. 그리고 여기 조심스럽게 적습니다. 저는 올 한 해 형께 스며있는 사랑이 형의 마음을 구원해 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요. 계신 곳이 멀어 몸까지 다하지는 못하겠네요. 편지를 쓰기 위해 의자에 앉고 나서 잠시 지난 시간들을 헤아려 보았습니다. 새해를 맞아 형께 드리는 편지엔 당연히 저의 한 해를 돌아보는 내용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제게 있어 2015년은 유독 상황의 급변을 많이 겪었던 해였던 것 같아요. 이미 형께서도 제게 많은 이야기를 들으셨으니 이 말의 내막을  알아주시겠지요.


신변에 관한 이야기를 차치한다면 가장 많은 글을 썼던 해였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이고, 글을 쓴다는 자기소개는 언제나 저를 부끄럽게 해요. 글이라는 말에는 어떤 신성함 같은 게 있는 것만 같아요. 하지만 제가 쓰는 것이 글이 아니면 무엇이겠나요.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말씀드리렵니다. 전 올 한 해 가장 많은 글을 썼어요. 그런데 글을 가장 많이 썼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잉여시간이 가장 많았다는 걸까요. 절대 그렇지 않았고, 무엇보다 잉여시간을 모두 글쓰기라는 노동에 할애할 만큼 성실하지 않다는 것을 저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속에서 꺼내어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많았다는 뜻일 수도 있겠고, 마음을 보존하지 못하고 결국 몸 밖으로 뿌리쳤다는 뜻일 수도 있겠습니다. 또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는 뜻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도 제 얘기를 들어주지 않았다는 뜻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러고 보니 글쓰기가 얼마나 모순되기 짝이 없는 방어 기제인지를 새삼 알겠습니다. 어쩌면 가장 많은 글을 쓴 해였다는 사실은 2015년의 제가 유례없이 위태로웠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해요. 하지만 모든 사람이 위태롭다고 해서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니 둘의 사이엔 작은 비약이 있는  듯하네요. 그래서 두 말을 이렇게 이어보려고 합니다. 유례없이 위태로웠기에 ‘그 어느 때보다 구원이 갈급했고’, 그래서 가장 많은 글을 쓴 것이라고요.


이 진술이 참말 같은 것이, 이렇게 쓰고 나니 비로소 이 말을 뒷받침하는 기억들이 떠오릅니다. 조금만 버티면 좋아하는 카페에서 글을 쓸 수 있다는 생각으로 버틴 시간들이 참 많거든요. 정말 그랬습니다. 오늘의 일과로 이리저리 치였다면 내일의 일과를 겨우 얻은 잉여시간에 준비했을 법도 하지만 그 시간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어요. 그 시간들로 인해 내일을 살 힘을 얻는다고 믿었습니다. 저에게 있어 글이란 어디까지나 취미이니 저의 글쓰기는 전문이 아닌 생활의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하는데 이건 결코 글을 격하시키는 생각이 아니에요. 그것은 생활의 성패를 글쓰기에 맡긴다는 뜻입니다. 생활에 끌려다니는 게 아니라 생활을 꾸려나가고 싶었어요. 그러기 위해선 제 마음이 저도 모르게 상황에 휩쓸리지 않도록 자주 보며 지켜줘야 했고, 그러기 위해 글을 썼던 겁니다.


하지만, 저 자신을 위한 글을 쓰는 태도가 그랬다면 남을 위한 글을 쓰는 태도는 사뭇 달랐던 것 같아요. 남을 위한 글이라니, 이 얼마나 자기만족적이고 허구적인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분명 저 자신이 저를 위하는 남의 글을 읽고 힘을 얻었던 적이 있었음에도 어쩐지 그렇게 느꼈어요. 아니, 그렇게 느껴야 할 것만 같았습니다. 패딩 점퍼 안에 잠옷만 입고 밖에 나갔던 적이 있어요. 칼바람이 부는 날이었는데도 찬 기운의 침입 없이 참 따뜻하다고 느꼈는데 어쩐지 그 따뜻한 기운이 다름 아닌 저의 체온을 느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이란 게 이렇지 않을까 했어요. 하지만 이렇듯 저는 저의 옷으로 자기 체온을 느끼며 따뜻해질 수 있는데, 내가 따뜻한 옷을 입는 일로 어떻게 남을 따뜻하게 할 수 있을까요. 나의 따뜻함을 과시하는 일 밖엔 되지 않는다, 전 이런 생각으로 죄책감을 느끼며 한 해를 살았습니다.


하지만 형, 얼마 전 저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습니다. 옷처럼 즉물적으로 저를 지켜준다 생각했던 글 역시 사실은 지극히 추상적인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지요. 옷처럼 든든하다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깃털처럼 가벼운 것이었단 말입니다. 저는 착각을 했던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을 가지고 생활의 무게를 견딜 수 있었던 걸까요. 착각이 믿음의 한 형식이라 생각하니 그제야 알 수 있었습니다. 저를 지켜줬던 게 글이 아니라 글에 대한 제 믿음이었다는 사실을요. 그렇게 생각하니 저를 위해 적힌 남의 글이 따뜻했던 이유 역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글이 저에게 온기가 되었던 게 아니라 그 사람이 글에 담은 믿음이 저를 따뜻하게 해 줬던 것이었어요. 여기서 믿음이란 단순히 ‘넌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폭력이지요. 사실 그 믿음은 저를 향한 게 아니에요. 제 안에 분명 있지만 저조차도 감각하지 못하는 것, 이를테면 제 심장에 대한 믿음입니다. 제가 글을 통해 제 체온에 접근할 수 있었듯 그 사람 역시 글을 통해 저를 지나쳐 저의 심장에 대고 말을 건넸던 것입니다. 너를 믿는다고요.


그러니 형, 저는 이제 남을 생각하며 글을 쓸 땐 그 사람의 얼굴을 생각하며 글을 쓰지 않으려고 해요. 그 사람의 심장, 그곳에 깃든 사랑, 생명, 욕망과 같은 것들을 떠올리며 글을 써야겠습니다. 읽을 때도 마찬가지겠지요. 그것들은 필사적으로 나를 살리려 하는데 입술이 그것들의 목소리를 압도해 귀를 소유하고 있어요.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 분명 존재하듯 귀로 들을 수 없는 소리가 분명 존재할 겁니다. 저는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들에게 말을 걸겠습니다. 제가 아프지 않아서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아닐 겁니다. 오히려 너무나 아팠고, 위태로웠기에 그것들이 더욱 강한 목소리로 제게 닿으려 했던 것입니다.


이 편지를 쓰기 전에 제가 1년 전 쓰고 혼자 간직했던 글들을 읽어봤습니다.  그중엔 2015년을 처음 맞는 저의 다짐이 있었지요. 멍청하진 않았는지 앞으로의 한 해가 마냥 행복하길 바라진 않았더라고요. 그 마음은 지금도 동일합니다. 올해에도 저만치서 행복과 불행이 순번 다툼을 하며 저를 기다리고 있겠지만, 그들을 만나는 일보다 그들이 떠나고 난 뒤의 제 얼굴이 기대됩니다. 저는 얼마나 더 겸손하고, 깊어진 얼굴을 하고 있을까요. 꼿꼿하기 보단 꿋꿋하게, 당당하기 보단 담담하게 살아나가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형. 비문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말이 상투적으로 굳어진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이건 기원이 아니라 명령이었던 거예요. 복을 많이 받아야 한다는. 그러니 새해 복 많이 받고야 마세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요.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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