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은 이제 당연한 일이 아닌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가끔 육아가 버거울 땐 만약 우리에게 자식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남편이, 때로는 내가 서로를 향해 묻기도한다.
친정 엄마는결혼 후6개월도 채 지나지도 않아 슬슬 아이를 가져야 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김서방이랑 합치게 되면, 나 대학원 졸업하면, 이런저런 이유를 댈 때 이미 내 안에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는 걸 한 달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지만.
이때의 나는 정말, 몰라도너-무 몰랐으니까.
입덧으로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을 때가,
태교 여행 중 경부고속도로 6중 추돌 사고로 입원했을 때가,
임신성 당뇨 판정으로 입덧 후에도 제대로 음식 한 번 마음껏 먹지 못할 때가,
오피스텔에 혼자 누워 점점 불러오는 배로 밤잠을 뒤척일 때가,
정말 편한 시절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거의 30시간 가까운 긴 진통 끝에 아들이 태어났고, 의사는 탈진 직전인 내 가슴 위에 아들을 올려주었다. 아주 짧은 교감의 시간. 이때부터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일들 속에서 어떻게든 내 아이를 지켜내야 하는 자, 그렇게 우린 부모가 되었다.
신생아실로 옮겨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가 숨을 잘 쉬지 못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이는 태어난 지 몇 시간 되지 않아 구급차에 실려 큰 병원으로 옮겨졌다. 신생아중환자실에서 돌아온 남편은 두려움 가득한 눈빛으로 울먹였다.남편의 눈물. 아이가 빠져나간 뒤 바람 빠진 풍선 같은 내 배. 아래에서 계속 흐르던 피. 모든 게 낯선 것들 투성이.
아이를 낳은 건 분명한데 당장 볼 수가 없다니. 어쩌지. 어쩌지. 하며 손을 떨던 남편 앞에서 나도 같이 울었던가. 아님 괜찮을 거라 다독였던가. 지금도 그때가 꿈속 장면처럼 느껴지는 건 그 당시 우리에겐 비현실적인 사건임이 분명하다.
감사하게도 남편에겐 자신의 아들을 위해 한달음에 달려온 어머니가 있었다. 아이가 없는 회복실에 덩그러니 남겨진 우리를 보곤 괜찮을 거야. 걱정하지 마라. 다독여주셨다. 괴로워하던 아들을 바라보면서도 절대 흔들리지 않던 어머님의 눈빛을아직도 기억한다.
그때 난 어떤 통찰의 순간을 맞이한 것일지도 모른다. 마냥 슬퍼하거나 걱정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남편과 어머니가 아이에게 가있을 동안 병원코디네이터에게 어떻게 하면 아이에게 초유를 먹일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내 젖이 나올 수 있을지를 물었다. 24시간 이내에 나오는 초유는 꼭 먹어야겠다는 사명감은어디서 나온건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할 따름이다.
휴대폰 알람을 켜두고 4시간마다 유축을 했다. 비닐팩에 담긴 초유는 하루 두 번 허락된 면회시간에 남편의 손을 거쳐 아들에게 전달되었다. 열흘이 넘는 아이의 입원 기간 동안 나 홀로 주변 산모들의 안타까운 시선을 견뎌가며 산후조리원에서 지내야 했다. 남편은 하루 두 번 내가 밤이고 낮이고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모아둔 모유팩을 아이스박스에 챙겨 병원으로 날랐다. 그렇게 하면서 조금씩 웃음을 찾았고 아이는 마침내 우리 품으로 돌아왔다.
고난 당한 것이 나에게 유익이라. -시편119:71
만약 아이를 낳기 전의 순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자식을 가질 것인가? 거기에 대한 대답은 보류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참고 인내한 시간이 나를 더 강하게 만들어주었다는 사실. 이것저것 따져본다면 무엇보다 가장 고귀한 자발적 고통이 육아이지 않을까. 벌거숭이로 태어난 자그마한 아기를 먹이고 재우고 입히며, 자기 밥벌이는 할 정도로 키워내는 것이 부모의 임무이니까. 임무 수행 중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자식 앞에서는 흔들리지 않는 부모가 되기 위해 매일매일을 버티는 것. 오늘도 임무 수행 완료. 우린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아이도, 남편도,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