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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찬우 Jun 16. 2021

안전함과 불안함 사이에서 #1

떠남과 돌아옴에 대해서

사람들은 매일 움직인다. 집 앞의 가게를 가기 위해서 움직이는 사람도 있고, 직장에 가기 위해서 움직이는 사람도 있다. 좀 더 멀리 출장을 가는 사람도 있고,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민을 가는 사람도 있고, 아예 이 순간 이 세상과 작별을 고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이렇게 수많은 떠남이 있지만, 그 떠남 마다 동반하는 불안함의 강도는 큰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바로 얼마나 쉽게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올 수 있는가?' 정도로 인해 결정된다. 그렇게 쉽게 돌아올 수 있을수록 떠남으로 인해 생기는 불안함의 강도는 작다.


집 앞의 가게에서는 금세 다시 돌아올 수 있다. 하지만 죽음으로 떠났다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앞 집 가게를 가는 것이 가장 안정적이고 죽음이 가장 불안한 떠남이 되는 것이다. 이민은 여행보다 돌아오기가 어렵다. 출장은 출근보다 돌아오기가 어렵다. 그래서 이민과 출장이 여행과 출근보다 더 불안하다.



물론 여기엔 한 가지 중요한 결정 요소가 숨겨져 있다. 그것은 바로 목적지에 얼마나 익숙해져 있는 상태인 가이다. 즉, 상대적으로 더 익숙한 곳을 향해 떠날수록 불안함의 강도는 줄어든다. 그래서 직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퇴근은 떠남이 아닌 돌아옴이라고 칭한다.


떠남은 익숙한 곳에서 덜 익숙한 곳으로 가는 여정이고, 돌아옴은 덜 익숙한 곳에서 더 익숙한 곳으로 가는 여정이다. 이런 식으로 '익숙함', '낯섦'의 감정은 떠남과 돌아옴이란 단어를 정의하는 기준점이 된다. 현재 어떤 여정이 떠남이라고 느꼈다면 상대적으로 덜 익숙한 곳으로 가고 있는 과정이고 반대로 돌아옴이라고 느꼈다면 상대적으로 더 익숙한 곳으로 가고 있는 과정이다.


사람들이 매일 어디론가로 떠나고 있지만 사실 그 모든 떠남은 돌아옴이 약속되어 있기에 갈 수 있다. 처음부터 돌아오기 힘든 여정은, 그 돌아옴의 가능성이 낮으면 낮을수록 떠날 때의 불안함이 커질 수밖에 없다.


우리 인간은 기본적으로 어딘가에 정착해야만 안정함을 느낄 수 있는 존재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떠나지만 사실 어쩔 수 없이 떠나고 있는 것이다. 떠나지 않고는 살 수 없기에 떠나는 것이다. 그리고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떠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거기가 어디이든 시간이 쌓이면 익숙해지고, 그렇게 익숙해지면 안정적이라고 느끼게 된다. 그래서 그곳이 어느 곳이든 처음은 불안해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안정적으로 변하게 된다. 심지어 군대나 감옥 같은 강압적인 장소조차도 오래 머물면 그 안에서 안정적이라고 느낀다. 그리고 거꾸로 밖으로 나올 때 불안함을 느낀다.


우리는 끝없이 정착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정착지엔 필요한 조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정착한 대상이 가능하다면 단단하고 견고하며 변함이 없는 곳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어딘가에 정착을 했는데 그곳 자체가 움직이게 되면 그것만큼 불안한 것도 없다. 배는 항구에 닻을 내렸을 때 유일하게 안정적인 상태가 된다. 하지만 항구에만 있는 배는 더 이상 배라고 부르지 못한다. 우리는 닻을 내린 상태에서만 살 수도 없다. 


살아가야 하니 돛은 펴고 떠나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바다 날씨는 변덕스럽다. 그러니 어느 날 태풍이 몰려오고 높은 파고가 몰아 치는 날이면 재빨리 돌아와 닻을 내리고 쉴 정착지 하나 정도는 필요하다.


사람들이 가장 흔히 정착을 하는 곳은 바로 집이다. 그래서 월세나 전세보다 자기 소유의 집에서 훨씬 더 안정적인 감정들을 느낀다. 또 다른 하나는 바로 가족이다. 이렇게 집과 가족은 우리의 일차적인 정착지이다. 그런데 만약 이 두 가지 중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단단하지 못하면 삶 자체가 불안해진다.


그리고 선택적이지만 거의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이 바로 '친구'이다. 친구는 집과 가족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덜 견고한 존재이지만 그 숫자를 제한 없이 많이 늘릴 수 있다는 점에서 유리하다.


그러니까 집이나 가족처럼 하나의 대상에 강하고 굵은 끈으로 묶는 대신 약하고 가느다란 수많은 끈으로 동시에 많은 사람들과 연결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을수록 좀 더 안정적이라고 느끼게 된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가능하다면 다른 사람들과 많은 관계를 맺으려고 한다.


하지만 친구는 집이나 가족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연결된 끈이 언제든 끊어질 수 있기에 그렇다. 심지어 내가 그것을 전혀 원하지 않더라도 강제로 그렇게 될 수도 있다.


집이나 가족은 우리가 한 때 방황을 하더라도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친구는 다르다. 그들은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멀어진다 싶으면 같은 거리만큼을 멀어져 버린다. 멀어지게 되면 어느 정도까지는 늘어나지만 어느 순간엔 버티지 못하고 끊어져 버리고 만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나이를 어느 정도 먹고 생각해보면 자신이 평소 그리 잘해주지 않았던 가족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데, 자신을 스쳐지나 간 인연 중에서 남은 사람은 사실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오히려 가족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더욱더 가족에 집중하려고 한다. 인생의 경험이 쌓일수록 친구와는 언젠가는 결국 끊길 수밖에 없음을 잘 알게 되는 것이다.


특별히 강하게 얽혀 있는 가족을 제외한 모든 인간관계는 서로 가느다란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끈은 내가 움직일 때마다 그리고 상대가 움직일 때마다 불안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내가 새로운 인연이 생겨서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거나, 상대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거기에 적응해 가게 될 때 끊어짐의 가능성은 높아진다.


그런 변화는 주로 환경의 변화에 의해서 생겨난다. 새로운 학교, 새로운 직장, 새로운 모임, 새로운 가족 등이 생겨날 때마다 자신이 맺어 놓은 인연의 끈은 쉼 없이 요동을 친다. 그런 와중에 그렇게 견고해 보였던 오래된 끈들이 맥없이 끊어지고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끈들이 이어지고를 반복한다.


이렇게 끈이 끊어질 때 우리는 그것을 '상처'라고 부른다. 특히 내가 아닌 상대가 움직여서 끊어질 경우, 내 의도와 상관없이 상대의 움직임만으로 끊어지게 되면 크게 상처를 받는다. 마치 몸에 강력한 테이프를 붙이고 있다가 떼이는 것과 같다. 접착력이 이미 느슨해져서 자연스럽게 떨어질 때는 오히려 시원하지만 나에게 강하게 접착되어 있을 때 강제로 떼어지게 되면 살점이 떨어져 나갈 수도 있다.


그런 일을 당하게 되면 결국 큰 상처를 받게 된다. 억울함과 배신감까지도 느끼게 된다. 심한 경우 복수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관계에서 일어난 그런 불운한 사건들은 대부분의 경우 복수가 불가능하다. 사실 나는 안 그랬을까?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과거에 누군가에게 그런 짓을 했다. 친하게 지내다가 더 나은 사람들을 만난다 싶으면 그들을 버렸었다. 단지 그럴 땐 내 생살이 뜯기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간 것이라서 그들에게는 상처였지만 나에게만큼은 상처가 되지 않았던 것뿐이다. 그래서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사람들은 원래 아픈 것들만 기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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