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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찬우 Jun 17. 2021

안전함과 불안함 사이에서 #2

대안의 존재들

우리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였다. 자신이 움직여서 뜻하지 않게 상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상대가 갑자기 움직여서 홀로 상처를 받기도 했다. 이런 경험들이 자꾸 쌓이면, 특히 상처를 주는 것보다는 받는 경험들이 많으면 그때부터 우리는 누군가와의 연결을 만들고 유지하는 것을 주저하게 된다. 


상처가 잦으니 새로운 인연과 관계를 맺는 것을 고사하고 기존의 연결선조차도 최대한 얇고 길게 늘어뜨려 상처를 입을 가능성을 낮추는 것이다. 언제라도 끊어질 선이었다면 어느 날 갑자기 끊기더라도 쿨하게 '그러니? 그래라.'라고 반응해줄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다일까? 우리는 정말로 그렇게 쿨할까? 


아니다. 우리가 아무리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도 결코 될 수가 없다. 떠남과 돌아옴에 관한 우리의 본능은 끝없이 새로운 정착지를 찾고자 하기에 그렇다. 그 욕구는 이미 고정된 집과 가족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다. 운이 나쁜 경우엔 아예 집과 가족의 존재 자체가 불안해서 어쩔 수 없이 어딘가 대안을 만들어야 하는 상태에 놓이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관계를 통해서 그 욕망을 이루려고 하는 노력은 과거 경험을 통해 너무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내가 열심히 붙여도 상대가 멀어지면 끝이다. 심지어 내가 강하게 붙이려고 하면 상대는 오히려 부담감을 느끼고 더 멀어지고 만다. 그러니 그 일이 내 뜻대로 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나마 인간관계 속에서 그 의도가 제대로 통하려면 결국 내가 누구나 붙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되는 수밖에 없다. 최대한 안정적으로 보여서 다른 사람들이 먼저 나에게 줄을 연결하려고 하는 사람이 되는 방법이다. 그러려면 사회적으로 이미 공인된, 안정에 크게 기여하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많은 돈, 강한 권력, 뛰어난 능력, 멋진 외모, 좋은 머리, 많은 지식 그리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성격이 필요하다.


가질 수 있다면 가지면 된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갖고 싶다고 해도 갖기가 쉽지 않다. 다들 원하기에 경쟁이 너무 치열하기도 하고, 아예 타고난 것이라서 처음부터 갖기가 불가능한 것들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들 중에서 몇몇 정도를 적당히 타고 태어나며 사실상 전체의 절반 정도는 아예 적당히 타고나지도 못한 형편이다. 그러니 삶 속에서 관계를 맺는 일이 힘들다. 누군가와 연결된 밧줄이 내 의지가 아닌 상대의 움직임으로 인해 끊기게 된다. 결국 상처를 받는다.


이어짐과 끊어짐을 반복하게 되는 인간관계는 반드시 상처를 동반한다. 누구도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으려고 하지 않아서 그렇다. 우리는 매일 쉼 없이 늙어가고 있기 때문에 가만히 있으면 매일 나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제처럼 오늘을 살기 위해서, 1년 전처럼 올해를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움직여서 조금이라도 더 앞으로 나가야 한다.


가진 돈으로 주식을 사면 10% 오르는 순간과 10% 떨어지는 순간이 올 수 있다. 이 둘은 같은 수준의 이득과 손해일까? 아니다. 만약 그 돈을 그냥 은행이 넣어 놨다면 2%의 이득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니 10%가 오르면 결국 8%의 이득이 되고, 10%가 떨어지면 실제로는 12%의 손해가 되고 만다. 


우리는 누구나 매일 늙어가기 때문에 가만히 있으면 나이를 먹은 만큼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죽지 않기 위해서라면 무조건 어제보다 오늘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져야 한다. 그래야 지금의 자리가 겨우 유지된다. 그래서 다들 그렇게 매일 움직이는 것이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위한 힘든 노력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노력은 의도치 않게 누군가와 연결된 끈을 변화시키고 만다. 느슨해지기도 하고, 끊기기도 하고, 팽팽해지기도 하고, 새로 맺어지기도 한다. 그런 과정의 부작용으로 수많은 상처라 생겨나고, 그렇게 생겨난 상처들 속에서 사람들은 관계 자체에 서서히 지쳐간다. 너무 지치면 몇몇만 남기고 다 정리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안정에 대한 욕구가 있기에 어딘가 붙일 곳이 필요하다. 그러자 똑똑한 사람들은 이제 대안을 찾아냈다. 사람이 아닌 존재에 붙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취미에 붙이고, 여행에 붙이고, 책에 붙이고, 텃밭에 붙이고, 캠핑에 붙인다. 사람만 아니면 되기에 개나 고양이에게도 붙인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상대가 임의로 나에게 떨어져 나갈 가능성이 거의 없다면 거기에 붙인다.



요즘 시대가 바로 그런 변화 속에 있다. 관계는 언제든 끊길 수 있기에 처음부터 느슨하게 맺는다. 그래서 서로 언제든 맺고 끊음이 가능해졌다. 그로 인해 관계 속에서 상처를 받는 일은 최소화되었다. 오히려 상처를 받거나 해서 징징대면 쿨하지 못한 사람, 질척거리는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그 상태로 자신만의 고유하고 안정적인 대상을 정해서 거기에 붙이면서 살아가고 있다.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내용을 잘 정리해 남들에게 알린다. 내 삶의 안정성을 '좋아요'라는 반응으로 확인한다. 여행 사진을 올리고, 취미 사진을 올리고, 책 소개를 하고, 텃밭에 가꾼 작물 사진을 올리고, 개와 고양이 사진을 올리면서 네가 잘 살고 있다고 인정해주고, 내가 잘 살고 있다고 인정받는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로 우리가 원하던 것이었을까? 


아니다. 원래는 그러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초등학교 시절, 중고등학교 시절 그런 것들이 그리 재미있지 않았다. 그 시절 우리는 친구가 가장 중요했다.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 친구가 최고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다들 인기가 있고 싶었지만 잘 되지 않아서 많은 상처를 받았던 것뿐이다.


지금도 그리 다르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그런 친구들을 원하고 있다. 여행, 취미, 책, 텃밭, 개와 고양이는 좋은 것이지만, 여행, 취미, 책, 텃밭, 개와 고양이에 친구가 함께 하면 훨씬 더 좋아진다. 


그것이 무엇이든 사람이 함께할 때 훨씬 더 나아진다.


사람이 빠져 있는 대안은 어쩔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더군다나 그 대안들 역시도 완벽히 영구적이지는 못하다. 사실 정말로 그것을 원한다면 돌멩이가 최고다. 하지만 돌멩이와는 감정적 교류를 할 수가 없다. 상처를 받지는 않지만 행복해질 수도 없다.


그 어떤 것도 사람의 존재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너와 나는 처음부터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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