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찬우 Feb 10. 2024

감정 바라보기

그것이 진짜 내 감정일까?

며칠 전 우연히 안타까운 기사 하나를 읽게 되었다. 요약본으로만 봐서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오랜 시간 온몸이 마비되었다가 기적적으로 회복되어 일상의 삶을 살아가던 사람이 이후 또다시 차 사고를 당해 결국 다시금 온몸이 마비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참 기구하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보고 있다가 문득 그 기사에 달린 베스트 댓글이 눈에 들어왔다.


'삶이 이토록 잔인하다니, 내가 신을 결코 믿지 않는 이유이다.'


기억력의 한계로 인해 정확한 내용은 아니지만, 대략 이런 느낌의 글이었다. 그리고 이 댓글을 읽으면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보통 사람은 평생 단 한 번도 겪기 힘든 그런 일을 두 번이나 겪게 된 안타까움으로 인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기 힘들어, 혹시나 만약에 존재한다면 한 사람에게 '너무도 가혹한' 삶을 주관한 신에 대한 분노를 강하게 느낄 수 있고, 그런 내용이 많은 사람들에게도 공감을 일으키는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또 하나는, 나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모든 일은 그저 우연히 일어난 사건들의 연속이라고 여기기에 이런 종류의 사건을 접해도 딱히 신에 대한 원망까지는 사고의 범주가 넓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왜 신을 결코 믿지 않는다는 사람의 글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신에 대한 강한 원망이 느껴질까, 하는 생각이었다.


조금 생각해 보니 그것은 아마도 그것은 신 자체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평소 신을 믿고 있다고 말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분노인 것 같았다. 즉, 댓글 내용 자체는 신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이 되지만 실제 내용은 신이 있다고 주장하는 타인을 향한 강한 분노인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순간 기사의 내용과는 딱히 연관도 없이 댓글을 통해 느껴진 사람들의 감정 변화, 그러니까 사고를 당한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신을 믿는 사람을 향한 분노로 이어진 '감정의 전이'에 대한 아주 오래된 생각이 떠올랐다. 한 번쯤 꼭 정리를 해보고 싶었지만 좀처럼 엄두가 나질 않았던 생각이기도 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수많은 종류의 감정을 경험한다. 그래서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만 해도 수십 종류가 된다. 참 많고 복잡하며, 각 표현마다 설명하기 힘든 미묘한 차이가 존재해서 딱 맞게 사용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감정은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눠짐을 알 수 있다.


하나는 나를 향한 감정들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위에서 말한 기사를 본 순간 느끼는 공통된 감정, 안타까움이나 슬픔과 같은 것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다른 하나는 내 안에 생겨난 감정들이 이후 머릿속 생각을 통해 '판단' 되면서 생겨난 타인을 향한 감정들이다.


그렇게 인간의 감정은 '내 안에서 머무는 감정'들과 '타인을 향해 흐르는' 감정, 크게 이 둘로 나뉘게 된다. 그리고 기억을 잘 떠올려 보면 내 안에서 생겨난 감정들은 상대적으로 약하고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흐트러진다. 반대로 타인을 향한 감정들은 강렬하고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증폭되기도 한다.


내 안에서 머무는 감정들에는 두려움, 놀람, 즐거움, 기쁨, 슬픔, 아쉬움, 서운함, 소외감, 안타까움, 귀찮음, 부러움,  호기심, 심심함 등이 있다. 물론 이런 감정들도 아주 크게 경험할 수는 있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만약에 혹시나 기억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이미 타인을 향한 감정으로 전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그렇게 전이 후 감정만 기억한다.


두려움과 놀람은 분노로 곧잘 전이된다. 누군가 나를 깜짝 놀라게 하면 순간적으로 두려움을 느끼지만 금세 나를 놀라게 한 상대에 대한 두려움만큼의 분노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즐거움이나 기쁨은 곧잘 우월감으로 전이된다. 내가 겪고 있는 기분 좋은 일은 '내가 훌륭한 사람' 이거나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 이거나 다른 이들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으로 이어지기에 그렇다.



슬픔은 분노로 이어지기 쉽고 그것은 또다시 자괴감이나 복수심으로 전이된다. 슬픔만큼 분노가 생겨나고 그 분노가 자신의 능력 부족으로 인한 것이란 생각이 들면 자신을 공격하는 자괴감이 되고 누군가의 실수나 의도라는 생각이 들면 참을 수 없는 원망이나 복수심이 든다.


아쉬움이나 서운함은 상대에 대한 배신감이나 미움 등으로 전이된다. 이게 심해지면 상처가 되고, 그로 인해서 원망이나 분노까지 이어진다. 내가 친하다고 믿었던 친구가 나와의 약속을 깨고 다른 친구를 만나러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가 바로 그것이다. 친했었다고 믿었을수록 서운함은 강렬한 분노와 원망으로 전이된다.


소외감 역시도 쉽게 분노나 원망으로 전이된다. 나를 소외시킨 상대에 대해 커다란 분노를 느끼고 더해서 원망을 하게 되면서 복수까지 하고 싶어 진다. 나에게 소외감을 느끼게 했으니 나 역시도 너도 같은 감정을, 아니 그보다 더 큰 소외감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 상대가 아예 무시를 당하는 느낌을 받게 하고 싶은 것이다.


안타까움이나 아쉬움이 분노나 원망으로 전이되는 과정은 이미 위의 기사의 댓글에서 봤다. 귀찮음은 곧잘 자신을 귀찮게 하는 대상에 대한 짜증으로 전이된다.


부러움은 쉽게 질투나 열등감으로 전이된다. 원래 누군가 평소 갖고 싶었던 것을 가졌거나, 이루고 싶은 것을 이룬 모습을 보면 부러움이 생긴다. 그런데 여기에서 ‘내가 뭐가 부족해서 저걸 갖지 못했을까’에 대한 생각이 나면 질투가 되고, '나는 저런 것도 가질 수 없는 부족한 존재구나'라는 생각이 들면 열등감이 된다.


호기심은 딱히 전이되지 않는 편이지만, 호기심을 통해 발견한 새로운 것을 타인에게 전할 때 자랑스러움이나 우월감으로 전이된다.


심심함은 원래 딱히 문제가 없어야 하는, 단순히 어느 순간 갑자기 할 일이 없는 상태이지만 곧잘 지루함이나 심한 경우 우울함까지도 전이된다. 내 삶이 심심하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에 불안함이 쌓이게 되면 지루해지고, 그런 지루함을 오랜 시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게 되면 우울해지거나 허무해지기도 한다.


이런 감정들 말고도 아마도 더 많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점은 바로 우리가 흔히 경험하고 있는 감정들은 대부분 '내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발생한 후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감정'이 아니라 '그런 감정들이 판단된 후 자신이나 타인을 향하는 감정'이라는 점이다. 즉, 판단된 감정이란 뜻이다.


우리는 매일 기쁘거나 슬프거나 즐겁거나 심심하다. 그리고 간혹 순간적으로 놀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운이 나쁜 날엔 소외감을 느끼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한다. 가끔은 누군가에게 부러움도 느끼고 먹고사는 것이 뭔가 많이 귀찮기도 하다.


이 정도의 감정만 느끼고 산다면 삶의 난이도는 그리 높지 않다. 하지만 전이된 감정들을 느끼기 시작하면 삶의 난이도는 극상승하게 된다. 분노, 원망, 짜증, 열등감, 우월감, 자괴감, 질투, 허무함, 울적함, 불쾌함 등등 하나하나가 주옥같다. 우리를 매일 괴롭히는 감정들이다. 그나마 우월감은 나은 편이지만 슬프게도 우월감은 열등감과 짝을 이뤄 다닌다. 그러니까 우월감을 느끼는 사람은 반드시 열등감도 느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렇게 감정의 전이를 하고 있는 것일까? 스스로를 더 힘들게 하는데 말이다.


그 이유는 바로 최초에 느낀 감정들의 원인을 알고 싶어서 그렇다. 그 과정을 통해 그 감정들을  또다시 경험하지 않고 싶어서 그렇다. 그러려면 좋은 감정들이라면 그 원인이 나에게 있어야 하고, 나쁜 감정들이라면 그 원인이 타인에게 있어야 한다. 내가 원인인 감정들은 내가 원하면 언제든 느낄 수 있고, 타인이 원인인 감정들은 그 시람만 비난하면서 멀리하면 안 느낄 수 있다. 이 과정은 행복한 삶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하다. 우린 정말로 그런 과정을 통해 행복해질 수 있을까? 슬픔보다 분노를, 부러움보다 질투를, 기쁨보다 우월감을, 심심함보다 우울함을 느끼는 것이 더 행복해진 상태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우린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고 있을까? 그냥 두면 자연스럽게 사라질 감정들을 오직 나에게 유리하게끔만 원인을 분석한 후 더 기분이 나쁜 감정들로 변형시킨 후 더 기분이 나빠지고 타인이 더 싫어지고 심할 경우 인간혐오증에 걸리기도 한다.


'그런 감정을 또다시 겪어서 손해를 입을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서 순간적으로 느끼고 금세 사라질 감정들을 모조리 불행한 기억의 영역으로 끌고 간다. 그리고 변형된 채 마지막으로 느껴진 '자신이나 타인을 향한 부정적 감정'이 진짜 내 감정인줄 착각한 채 살아간다. 그렇게 삶이 분노, 원망, 억울함, 자괴감, 질투심, 우월감, 허무함으로만 채워져 간다. 


두 번이나 온몸이 마비된 사람의 삶은 참 안타깝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화를 낼 필요는 없다. 처음부터 왜 그 두 가지 사실이 연관이 있어야 할까? 신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 사람의 삶이 그토록 운이 없으라고 딱히 기도했을 것 같지도 않은데 왜 그들은 분노의 대상이 되었어야 했을까?


감정은 그냥 감정이다. 결코 누군가의 탓이 아니다. 운이 나쁘거나 운이 좋았서 생긴, 기분이 좋거나 나쁘거나 한 상태이다. 그런데 그 원인을 그토록 주관적으로 판단해서 타인에게 공감을 강요한 후 얻은 더욱더 기분이 나빠지고 오래 기억되는 감정으로 만들어 내고는 결국엔 더 불행해지고 만다.


뭐, 그렇게 평생 살아왔으니 나머지 삶도 그렇게 살아가도 된다. 단지 하나는 꼭 알아야 한다. 최종적으로 남 탓을 하든 내 탓을 하든 그것은 결국엔 '내가' 기분이 나빠지는 손해라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나를 더욱더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행복하고 싶다면 무엇보다도 전이를 막아야 한다. 하지만 너무 오랜 시간 그렇지 않게 살아왔기에 그것을 멈추는 일은 정말로 어렵다.


그럼에도 정말로 내 행복이 그렇게 소중하다면 최소한의 노력은 해봐야 하지 않을까? 많은 돈을 쓰는 것보다, 많은 에너지를 쏟는 것보다, 많은 시간을 쏟는 것보다 사실 가장 효과적이고 현실적이며 오래갈 수 있는 행복의 길이다.


행복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오랜 시간 비행기를 탈 필요도 없고, 수십억의 돈을 모을 필요도 없고, 아주 힘든 일을 해낼 필요도 없다. 그냥 내 머릿속에 있다. 언제나 그랬다. 지금껏 나만 몰랐을 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함께 하자, 다만 내 뜻대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