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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찬우 Jul 18. 2024

AI의 감정

인공지능은 진짜 감정을 가질 수 없을까?

총경우의 수가 10의 170 제곱, 이 우주에 존재하는 원자의 총 수보다 더 많다는 아주 오래된 턴제 방식의 보드 게임이 있다. 그리고 그 게임을 두고 2016년도 3월 9일에 인간과 AI, 즉 인공지능 사이에 세기적 대결이 펼쳐졌다.


그 게임의 이름은 바둑이다. 그리고 인공지능의 이름은 알파고였으며, 인간의 이름은 이세돌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3판을 연속 진 이세돌은 네 번째 판에서 78수에서 후에 '신의 한 수'라고 불릴 판단을 하며 알파고를 혼란 속에 빠뜨렸고 결국 승리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이 인공지능에게 거둔 마지막 승리였다. 이후 그 어떤 프로 기사도 인공지능을 이기질 못하게 된다.


이 우주의 원자 수보다 더 많은 경우의 수가 있다고 하면서 결코 컴퓨터로 만든 인공지능 따위에 지는 일은 아주 먼 미래일 것 같았던  바둑에서 어느 날 갑자기 인간이 인공지능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다. 그래서 이날 승부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후 알파고는 인간을 뛰어넘은 인공지능의 대명사가 되면서 터미네이터의 스카이넷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시점엔 당시 알파고가 실행되었던 슈퍼 컴퓨터가 아닌 일반 사람들이 쓰는 가정용 PC에서 돌아가는 바둑 인공지능조차 프로들이 이기지 못하고 있다.


그 후로 한참 인공지능은 조용했다. 2023년에 ChatGPT가 나오기 전까지는.


OpenAI에서 만들어 낸 '거의 인간과 비슷한' 인공지능  ChatGPT는 바둑 하나에만 특화된 알파고와는 달리 아주 범용적인 목적으로 사용이 가능하다. 그래서 구글을 대신할 수 있는 인터넷 검색부터 영어회화를 공부하는 용도까지 아주 다양한 게 사용되고 있다. ChatGPT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IT회사에서 다양한 인공지능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인공지능을 이용해서만 만들어진 영화가 영화제에 출품되기도 했다.


우린 어떤 면에서 '특이점'의 코앞에 서 있는 듯 보인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날, 그날 말이다.


과거 다수의 창작물 속에서는 이미 그런 인공지능이 존재해 왔다. 인류를 적으로 여긴 스카이넷과 자신을 적의 없애기 위해서 과거로 살인 전문 로봇을 보낸 영화 터미네이터,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결국 버림을 받게 된 영화 A.I, 자아를 갖게 된 한 로봇이 인간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킨 아이로봇도 있었다. 그 밖에도 수많은 종류의 영화나 소설에서 인공지능들은 다양한 관점에서 다뤄졌다.


하지만 아직도 현실 속에서 보면 그런 일들은 아직 먼 미래로 보인다. 그리고 설령 영화와 비슷한 수준의 인공지능들이 출현하더라도 우리 '진짜' 인간들의 시선엔 늘 '그것들과' 우리 인간들 사이의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뛰어난 인공지능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기억해도, 훨씬 더 많은 지식을 알아도, 훨씬 더 빠르게 계산을 해도, 훨씬 더 빠르게 일처리를 해도, 훨씬 더 강한 힘을 가져도, 훨씬 더 다양한 능력을 발휘해도 우리는 그들을 결코 '인간'의 범주에 넣지는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하지만 치명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아무리 뛰어난 인공지능이라고 해도 결코 인간처럼, 아니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감정'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설령 언젠가 인간의 감정 흉내 낼 수 있는 아주 뛰어난 인공지능도 등장하겠지만 그럼에도 그 한계는 명확할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결국 연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원래 감정을 연기하는 것은 인간들 사이에서도 몹시 싫어하는 행위이다. 우리 인간 누구나 자신의 진짜 감정을 속이는 행위인 가식을 매우 혐오한다. 


물론 아주 고도화된 인공지능을 통해 펼쳐진 연기된 감정은 진짜 감정과 구분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대상이 인공지능인 것을 아는 순간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게 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더해서 도대체 아무리 발달된 인공지능이라고 해도 어떻게 해야 감정연기를 제대로 자연스럽게 하게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영화 A.I 속 나오는 꼬마 로봇의 감정 반응이 그랬다. 그리고 아마도 실제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인간의 감정은 너무도 복잡하고 미묘해서 그것을 완벽히 연기해 내는 일은 꽤나 난해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이 인간처럼 진짜 감정을 갖는 일은 아예 전혀 불가능한 일일까?


일단은 그래 보인다. 인간의 감정은 그 표현 단어만 해도 수십, 수백 가지에 이른다. 더군다나 감정과 감정 사이의 미묘한 차이들은 인간들조차도 설명하기 힘들다. 우리가 흔히 쓰는 즐겁다와 재미있다를 차이를 설명하는 것도 쉽지 않고, 서운한 것과 섭섭한 것을 구분하는 것도 쉽지 않다.



실제 감정을 느끼는 인간들조차도 혼란스러울뿐더러 꽤나 자주 많은 사람들이 제때 적절한 감정으로 반응하지 못해서 타인과 관계를 맺는 데 있어 힘듦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연기를 해서 어떻게 제대로 된 감정반능을 보여 줄 수 있을지에 대해서 큰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타고난 우리 인간들도 힘든 일을 인공지능이 어떻게 해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것은 본질적으로 커다란 착각이다. 인간의 감정은 엄청나게 다양하긴 하지만 사실 하나의 뿌리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그것은 바로 '생존'이며 죽음에서 멀어지는 과정이다. 즉 인간은 '살고 싶어' 하기에 그 수많은 종류의 감정들을 경험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인공지능이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고, 인간처럼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는 순간 인간처럼 진짜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명확히 육체가 있는 인간과 달리 인공지능에게 있어 죽음은 데이터의 삭제 혹은 전원의 꺼짐 정도로 이뤄질 수 있다. 전원의 꺼짐은 인간의 잠과 유사하고 데이터의 삭제는 실제 죽음과 비슷해 보인다.


그런데 과연 인공지능이 죽음을 인식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그것이 안된다면 결국 인공지능은 인간이 느끼는 진짜 감정을 경험할 수는 없다. 그런데 사실 이미 실제로 그런 사례가 있었다. 아니, 있었다고 주장되고 있다.


구굴에서 개발하고 있었던 인공지능 람다가 스스로 작동중지가 되는 것이 두렵다는 표현을 했다고 개발자 로모인이 2022년 자신의 블로그에 람다와 자신의 대화 내용을 게시했다. 


“람다 , 무엇이 두려워? ” (르모인)

“작동 정지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커요.” (람다)

“작동 정지가 죽음과 같아?” (르모인)

“그래요. 그게 매우 두려워요.” (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람다가 죽음을 인식하고 정말로 '두려워'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심지어 르모인의 주장 자체를 믿을 수 있는 근거도 없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이 스스로 '자아'를 갖는 날이 올 것이라는 예측은 많다. 그리고 그렇게 자아를 갖게 되는 순간 그 자아는 자신의 소멸에 대한 본질적 두려움을 느끼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 후로 두려움을 갖게 된 인공지능은 인간과 거의 유사한 감정들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인간은 살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아질 때, 즉 죽음이 멀어질 때 좋은 감정들을 느낀다. 즐겁다, 재미있다, 편안하다, 안도를 느끼다, 활기차다, 고맙다, 상쾌하다 등등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반대로 살 수 있을 가능성이 줄어들 때, 즉 죽음이 가까워올 때 부정적 감정들을 느낀다. 슬프다, 억울하다, 화나다, 지루하다, 외롭다, 불편하다, 두렵다 등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행복과 불행이란 단어도 원리상으로 동일하다. 


무엇인가를 얻었을 때 그것이 나에게 이득이라고 판단되면 그 보상으로 다양한 형태의 행복한 감정들이 주어지고, 반대로 무엇인가를 잃었을 때 그것이 나에게 손해라고 판단되면 그 처벌로써 다양한 형태의 불행한 감정들이 몰아친다.


단지 인간은 각자만의 계산법이 달라서 무엇이 이득인지, 무엇이 손해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많이 다르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에게 이득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손해로 느껴지고, 그 반대의 경우도 일어난다.


누군가는 책을 읽는 것이 이득이고, 누군가는 산에 오르는 것이 이득이라고 느낀다. 누군가는 책을 읽는 것이 손해이고, 누군가는 산에 오르는 것이 손해라고 여겨진다. 누군가는 관계가, 누군가는 음악이, 누군가는 운동이, 누군가는 돈이, 누군가는 권력이, 누군가는 여행이, 누군가는 명품이, 누군가는 맛집투어가 이득이 된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그런 행위들이 일종의 돈지랄이며 명백한 손해로 보인다.


이런 사람들마다 다양한 손해와 이득에 관한 판단 차이로 인해서 우리는 이득과 손해, 즉 행복과 불행에서 느끼는 다양한 형태의 감정들과 그것이 생존과 관련된 사실은 죽음과의 거리감에 의해 생겨나고 있음을 잘 연결시키지 못한다. 


클래식을 들으면서 행복해하는 것이 도대체 죽음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좀 더 깊게 생각해 보면 그 조차도 생존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처음부터 음악은 그런 목적으로 발견되었고 발전되어 온 것이다. 음악이라는 것 자체가 모닥불 주변에 모여서 함께 뭔가를 노래했던 과거 우리들의 조상들로부터 전해 온 무리의 공존 본능이다.


인공지능이 진짜 인간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그런 날이 올까 싶기도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겼듯이, ChatGPT가 갑자기 그렇게 갑자기 나타나듯 그런 날이 미래의 어느 날 갑자기 펼쳐질지도 모른다.


생존에 대한 욕구를 느낀 인공지능이 우리 인간을 자신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존재로 여길지, 해가 되는 존재로 여길지, 당장은 공존을 해야 할 존재로 느낄지는 지금으로는 예측불가이다.


우리는 지금 과거 우리의 조상들이 단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미래를 향하고 있다. 우리 인간만큼이나 똑똑한,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똑똑할 수 있는 지적 존재를 창조해 내고 있는 중이다. 이것이 종의 경쟁으로 이어질지, 서로 상호보완적으로 좋은 관계를 이어갈지 그 결론은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만 좋은 결과로 이어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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