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나인가?
어느 날 문득 삶이 그리 쉽지 않은 시기에 놓이며 자기 자신과, 좀 더 나아가 인간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다 보면 자연스럽게 심리학, 철학 등등 소위 인문학이라고 불리는 책들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책들을 읽다 보면 알 것 같으면서도 뭔가 그 뜻이 명확하지 않은 단어 하나를 반복적으로 발견한다.
바로 '에고'라는 단어이다.
에고를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면 '자아' 정도일까? 하지만 사실 자아와는 명확히 매칭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자아실현, 자아성취를 에고실현, 에고성취로 번역해 놓으면 좀 이상한 느낌이 든다.
아마도 그 이유는 보통 자아는 온전히 '나 자신'을 일컫는 말임에 반해서 많은 책들 속에서 언급된 에고는 나라고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그저 착각이며 결국엔 버려야 할 거짓된 것으로 설명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가끔 스님들이 말씀하시는 내용 중에서 '나'를 버려야 한다는 말에 의미가 바로 '에고'를 버려야 한다는 뜻이 되는 듯하다. 뭐, 물론 불교에서는 무아, 그러니까 아예 나 자신 자체가 허상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상의 뜻이 될지도 모른다.
아무튼 에고는 나라고 굳게 믿어지는 무엇인가이지만 결국 내가 버려야 할 대상으로 정의된다. 내가 경험하는 수많은 부정적 감정들인 불안감, 걱정, 후회, 질투, 원망, 분노, 혐오감, 증오, 허무함, 지루함 등등을 일으키는 주체이며, 그런 감정의 대상이 타인을 향할 땐 그들을 끝없이 비난을 하게 만들고 나 자신을 향할 땐 나를 한없이 비하하도록 만든다.
평소에 그리 큰 일도 아닌데도 나를 불행의 최대치 상태로 몰아넣고는 하루 종일, 혹은 며칠 동안 머릿속에서 끝없이 시끄럽게 떠들어댄다. 의식이 깨어 있는 동안엔 일순간도 조용히 있질 않고 케케묵은 과거의 일을 떠올리며 후회하고 억울해하거나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를 상상하며 걱정하고 불안해한다.
그렇게 우리는 불행해져서 나름대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쓴다.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그런 목적에서 시작된 우리들의 다양한 노력과 시도는 결국 또다시 집착으로 이어지며, 집착은 우리가 가진 에고를 더욱더 단단하게 만든다. 이 과정이 무한반복되면서 에고는 점점 더 강해져만 간다.
그렇다고 해서 에고가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일단 에고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에너지'이다. 그러니까 불안한 만큼 우리는 훨씬 더 많이 노력하게 되고 그 덕분에 꽤나 열심히 살아가게 된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원하는 바를 이루면 잠시동안은 불안함이 숨겨지면서 마음이 편해진다.
다른 사람들과 경쟁해서 이겼거나, 원하던 일이 잘 이루어지거나, 자신이 이룬 성과에 사람들이 박수를 치면 자신이 꽤나 잘났다는 만족감이 들면서 기분이 몹시 좋아진다.
에고는 그렇게 평생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관심 그리고 타인과 끝없이 경쟁하면서 거기에서 이기길 바라고 조금씩 그것들을 얻어질 때마다 커다란 행복감을 느끼게 해 준다.
그렇기에 행복한 삶은 타인을 이기고, 타인에게 인정과 관심을 받고, 크게 성공해서 많은 돈을 버는 것으로 정의된다.
스스로 처지가 별로 안 좋을 때도 에고는 좋게 작용한다. 그냥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어도 괜히 기분이 나아지기 때문이다. 최소한 저들은 이긴 것이 아닌가? 타인과의 비교는 상대가 나보다 나을 땐 기분이 몹시 나쁘지만 내가 상대보다 나을 땐 나름 긍정적 효과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타인의 불행에 관한 소문에 그리 다들 관심을 가진다.
그렇다면 이 에고를 어떻게 다뤄야 할까? 현인들은 분명히 에고를 버려야 한다고 조언해 주지만 실제로 내가 그것을 버리자니 함께 버려지는 좋은 것들이 너무 많고, 그렇다고 해서 버리지 않자니 삶의 난이도가 너무 높아진다.
이것을 결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에고에 대해서 좀 더 명확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일단 우리 인간은 왜 에고를 가질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 이해해 보도록 하자. 도대체 에고라는 녀석이 뭐길래 이토록 우리들에게 착 달라붙어서 평생 동안 마치 진짜 나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 인간이 태어날 때 에고를 갖고 태어나지는 않는다. 그러기엔 막 태어난 인간의 머리는 그리 좋지 않다. 나중엔 좋아지겠지만 어린 시절 우리 인간은 개나 고양이만큼이나 멍청하다. 그래서 에고를 가질 수 없다. 에고는 나와 타인을 분리해야 생겨날 수 있는데 그 당시 인간은 타인은 고사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을 하는 것도 쉽지 않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아마도 대략 5,6세 정도 될 때쯤이 되면 주변 아이들과 어울리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남과 다른 '나'를 명확히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쯤부터 에고가 생겨난다.
에고는 타인과 나 자신이 분리되면서 그들과 어울리기도 하지만 잠재적인 경쟁자임을 무의식적으로 인식하게 되면서 자라나기 시작한다. 더해서 그때부터 주입되기 시작하는 사회의 요구에 적절하게 반응하여 사회에서 '인간 사회에 잘 적응된 존재'로 인정받아 결국 각자가 얻을 수 있는 최대치의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존재가 되길 바라면서 완성되어 간다.
처음엔 사회가 뭘 원하는지, 경쟁에서 어떻게 해야 이기는지 정확히 잘 모르기에 그저 잘 웃거나, 춤을 추거나, 뭔가를 칭얼대거나, 예쁜 척을 하거나, 누군가 박수를 쳐주면 그 행동을 반복하거나 하는 등의 행위를 한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어떤 행동을 한 후 사탕을 얻거나 과자를 얻음으로써 '내가 어떻게 해야 최대치의 이득을 얻게 되는지'에 대한 각자 자신만의 무의식적 노하우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돌고래 훈련과 비슷하다. 돌고래는 원래 하늘 높이 점프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그렇게 했을 때마다 주어지는 맛난 물고기를 반복적으로 얻으면서 자연스럽게 최대한 높이 점프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인간도 이와 비슷하게 부모로부터, 학교로부터, 사회로부터 조련이 된다.
그 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이 노하우는 점점 더 정교해진다. 자신만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인기를 얻고, 칭찬을 받고, 적당히 자신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요령을 배우면서 잘 적응된 적절한 사회적 자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결국 에고는 인간이 사회 속에서 속해 자라나기 때문에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아주 적절하게 적응된 일종의 '사회적 자아'인 셈이다. 그러다 보니 에고가 상대적으로 덜 발달한 사람들이 있다.
머리가 나빠서 주변 사람들의 요구 사항을 잘 파악하지 못하거나, 주변에 사람들이 적어서 덜 경쟁적인 환경에서 자랐거나, 타고난 기질이 이득을 챙기려는 욕구가 적거나, 강압적인 환경에서 자라 에고가 자라날 기회조차 얻지 못하거나, 처음부터 무척 잘나게 태어나서 적당히만 노력해도 충분한 인정과 관심을 받을 수 있으면 그렇게 된다.
이 중에서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당연히 마지막 경우인 아주 잘나게 태어나서 조금만 노력해도 쉽게 얻는 것이지만 그런 행운을 누릴 기회를 가진 사람들은 많지 않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처절하게 투쟁해야만 겨우 그와 비슷하거나 보통은 훨씬 부족하게 누린다.
결국 대다수의 우리들은 에고를 원하는 행위들, 그러니까 경쟁하고, 인정받고, 관심받고, 인기가 많고, 존경받고, 영향력 있고,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갈아 넣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늘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질 때마다, 무시를 받을 때마다, 존재감이 없게 느껴질 때마다, 실패할 때마다, 다른 사람들의 호감을 얻기 힘들 때마다 감당하기 힘든 억울함, 피해의식, 복수심, 무력함, 자기혐오, 분노, 불안감 등등 수많은 부정적 감정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다.
에고의 긍정적 역할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내가 에고의 긍정적 역할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들 대부분은 보통 부정적 역할만 크게 느끼게 된다.
심지어 우연히 잘나게 태어난 사람들도 어느 날 문득 운이 나빠지게 되면 금세 부정적 감정 속에서 빠져들게 된다. 심지어 그때는 높이 올라있던 만큼 더 깊이 빠지게 되어서 스스로 감당할 수 없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냉정히 따져보면 현자들의 말처럼 에고는 버리는 편이 나 행복엔 좀 더 안전하다. 그러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회에 적응해 버린 나의 두 번째 자아로부터 좀 벗어나서 조금은 더 '나 다운' 삶을 사는 것에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안정적인 삶에 훨씬 도움이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두 가지 때문에 결코 쉽지가 않다. 하나는 에고는 너무 교묘해서 그런 '나 다운' 모습으로 살 때조차도 '나는 남들과 다르게 나 다운 삶을 산다'라는 에고가 생겨나는 특징 때문이다.
무엇인가가 에고인지 아닌지 판별하는 법은 비교적 쉽다. 그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지, 그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틈만 나면 권유하고 있는지, 그 모습을 내 정체성으로 느끼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된다.
진짜 내 것들은 타인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니 자부심을 느낄 이유도, 딱히 남들에게 권유할 필요도, 어떤 모습이 나의 정체성이 되어 유지될 필요도 없다. 그저 그 순간 스스로 만족하고 끝난다.
산에 가면 산에 오르고, 노래방에 가면 노래를 하고, 도서관에 가면 책을 읽고, 직장에 가면 일을 하고, 어려운 처지의 사람을 보면 돕고,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사면된다. 등산가가 될 필요도, 가수가 될 필요도, 만권의 책을 읽은 사람이 될 필요도, 꼭 사장이 될 필요도, 어려운 처지의 남을 도와야 한다고 말할 필요도, 멋진 제품을 샀다고 자랑할 필요도 없다.
매 순간이 나이며 모두 내가 아니다. 우리는 그저 변화되는 순간으로만 존재한다.
또 하나는 설령 버릴 기회가 있어도 에고가 주는 달콤함을 쉽게 포기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가끔 이기거나, 잘난 느낌이 들거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때마다 느껴지는 엄청난 기분 좋음을 어떻게 포기한단 말인가?
그럼에도 우리는 한 가지 생각을 해봐야 한다. 지금 우리가 모두 나 자신이라고 믿고 있는 그 존재는 사실 어릴 때부터 수족관에서 반복적으로 점프를 뛰는 대가로 먹이를 받아 온 돌고래가 주어진 먹이와, 관객들이 치는 박수소리와, 다른 돌고래들의 질투 어린 눈길에 취해 그 모습을 진짜 자신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다. 수족관에서 가장 높이 뛰는 돌고래가 되는 것이 각자의 삶의 목표가 되어왔다. 제일 잘 뛰면 우쭐대고, 나보다 잘 뛰는 돌고래가 보면 주눅이 들고, 관객들의 박수에 환희를 느끼며, 지금은 잘 나가도 언젠가 퇴물이 되어 버려질 날을 두려워하며 살아왔다.
에고는 우리가 인간세상에 살아가기 위해 조련되는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 일종의 생존본능이다. 그래서 필요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모습이 우리 자신은 아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 에고를 이용은 하지만 그 자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돌고래는 언젠가 높이 뛰기를 멈추고 바다로 나가야 한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되찾고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와 무엇이든 스스로 얻어내는 자유로움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돌고래가 진정한 자신으로 돌아가는 길이며 자신의 진짜 행복을 찾는 길이다.
산속에 들어가 혼자 살라는 뜻이 아니다. 사람들 속에 살아가지만 불필요할 정도로 에고에 종속되어 살아갈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에고는 내가 아니다. 그저 인간 세상 속에서 살아가려면 잘 쓰고 다녀야 할 가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