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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찬우 Nov 18. 2024

너무 커다란 질문

숨겨지는 자세함

가끔 살아가다 보면 '왜 사는지', '삶은 무엇인지' 등의 질문이 떠오를 때가 있다. 주로 갑자기 삶에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렇다.


갑작스럽게 병에 걸렸거나, 회사에서 잘렸거나, 친했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했거나, 주변 사람들이 나를 별로 안 중요하게 여긴다는 생각이 들거나, 연인과 헤어졌거나, 중요한 시험에 떨어졌거나, 오랫동안 준비한 일을 실패했거나,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주변을 보니 내 처지가 그리 좋지 않다고 느꼈거나, 내가 산 주식이나 코인이 폭락하게 되거나, 내가 정말로 갖고 싶거나 경험하고 싶은 것을 누군가 너무 쉽게 얻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될 때 그렇다.


물론 어떤 소수의 사람들은 삶에 대한 너무도 큰 호기심으로 인해 공부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질문을 떠올리기도 하겠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그런 취향은 아니다.


일단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으니 답을 찾아야 할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사실 이런 종류의 질문에 대해서 속 시원하게 답을 찾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분야에서 답이라고 알려진 것들이 존재하긴 한다.


일단 종교의 분야에서는 꽤나 명쾌하게 답을 준다. 단지 우리가 그 답을 신뢰할 수 있느냐는 별도의 문제이다.  종교는 너무 다양하고 각자마다 고유하고 배타적인 해석을 가지고 있다. 신의 존재가 이 우주와 우리 인간을 만들어 냈다는 해석도 있고, 우리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라는 해석도 있다. 모두가 정답이 후보이면서 오답일 수도 있다.


철학은 답을 딱히 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떻게 해야 답을 찾을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해서 다양한 관점에서 지식과 지혜를 전달해 준다.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주로 서양 철학이 인식론에 의한 지식의 관점이라면 동양 철학은 경험론에 의한 지혜의 관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서양 철학은 주로 원리를 설명하는데 반해 동양 철학은 원리보다는 응용에 더 집중한다. 둘 모두 삶에 대한 답을 찾기에 많은 도움이 된다.


심리학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심리적 현상의 과정을 설명해 준다. 특히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상처를 입고 삶이 크게 흔들린 사람들은 왜 자신이 힘든지, 상대는 왜 그런 식으로 말을 했는지에 대한 다양한 관점의 해석을 들을 수 있다. 이런 개별적인 답변은 물론 '왜 사는지'에 대한 답이 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힌트는 될 수 있다.


역사는 인간이 집단적으로 그려온 수많은 흔적을 되짚어 봄으로써 삶을 주관적으로 정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수 천년 전부터 문명은 엄청난 발전을 이뤄내고 있지만 생각보다 우리 인간은 비슷한 일을 반복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 과정을 집중해서 보다 보면 우리 존재에 대한 패턴 인식이 가능해진다. 물론 패턴을 인식한다고 해서 본질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역시도 나름대로 힌트가 될 수 있다.


과학의 영역에서 특별히 생물학과 물리학 그리고 천문학 분야는 분명히 지식의 영역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인문학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다. 생물학은 우리 존재의 발생과 진화 그리고 왜 이런 형태의 모습이 되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물리학은 사물을 보는 관점, 그러니까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에서 객관적 관점에서 사물과 나 자신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천문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와 그리고 우리가 속해 있는 태양계, 은하계 그리고 결국 우주 그 자체에 대한 실제적 이해를 돕는다.


이런 분야들 말고도 다양한 많은 분야에서 우리가 왜 존재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는데 도움을 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런 것들에 대해 알면 알수록 우리가 얻는 것은 결국 내가 존재할 이유는 딱히 없으며, 내가 살가야 할 이유도 딱히 없다는 점이다. 심지어 종교적 관점에서조차 그렇다.


우린 그저 모두 살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 특히 천문학적 관점에서 보면 나 자신은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라는 행성과 우리의 생존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고 있는 태양이라는 항성도 이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정말로 있으나 마나 한, 사실상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점을 알게 된다. 어느 날 갑자기 이 태양계 전체가 다 사라져도 이 우주엔 그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우리들 개개인은 바닷가의 모래알보다도 그 존재감이 없는 존재들인 셈이다.


답을 찾기 위해서 지식을 탐구했는데 답은커녕 그런 질문을 던질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된다. 그렇게 어느 순간부터 혼란스러운 상황이 찾아오게 된다. 힘들고 불행해서 '왜 사는지' 답을 찾았더니 결론으로 주어진 것은 '살 필요가 딱히 없다'가 된다.


설령 운 좋게 이런 절망적인 결론에 이르지 않았더라도 답을 찾기 자체는 너무 힘들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포기하고 그런 질문 따위는 던지지 않는 방식으로 대처해야 할까?


뭐, 그럴 수도 있다. 그것도 꽤나 좋은 해결책이다. 처음부터 멀쩡하게 살고 있었다면 떠오르지도 않을 질문이었으니 그냥 질문을 던지는 행위 그 자체를 멈추고 그냥 더 행복하게 위해서 노력하면 된다. 그것이 답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뭔가 좀 찜찜하다.


이쯤에서 뭔가 조금이라도 해결의 실마리를 잡기 위해서 살짝 관점을 바꿔보자.


한 개인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과 주말에 단풍이 곱게 물든 근처 산을 산행하는 것, 이 둘 중 뭐가 더 실현이 쉽겠는가? 당연히 후자이다.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물론 매우 좋은 삶의 목표일 수는 있지만 기준점도 애매하고 달성하는 과정도 너무 오래 걸린다. 대신 주말 산행은 주말만 되면 이룰 수 있다.


'왜 사는지' 그 질문 자체를 버릴 필요는 없다. 단지 우리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서 조금 더 집중할 수 있다. 질문을 너무 거대하게 던지게 되면 그 답을 찾느라 평생을 허비할 수도 있다. 물론 그 과정도 삶에 도움이 될 테니 허비라는 단어를 쓰는 건 잘 어울리지 않지만 아무튼 그렇다.


우주를 바라보다 보면 표현할 단어조차 떠오르지 않는 내 존재의 미미함에 삶 자체가 우습게 느껴질 수도 있다. 창백한 푸른 점으로 유명한 한 사진에서 보이는 철학적 관점이 그랬다.


탁월한 천체 물리학자인 칼 세이건이 제안해서 찍은 지구 사진이다. 이 사진을 통해 그는 "지구는 광활한 우주에 떠 있는 보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함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다"라고 표현했다.


:: 중앙 오른쪽 상단 부근의 아주 작은 하얀 점이 지구이다


그의 말이 분명히 틀린 것은 아니다. 이 우주적, 아니 이 태양계적 관점에서만 봐도 우리는 저토록 보잘것없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왜 사는가'와 같은 커다란 질문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그 커다란 질문에 너무 사로잡히게 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 삶은 생각보다 아주 작은 영역에서 존재한다.


노랗고 붉게 물든 단풍을 볼 수 있는 날은 그리 많지 않다. 하얀 눈이 내린 후에도 며칠이면 다 사라진다. 너무도 맑은 파란 하늘조차도 단 몇 시간 만에 짙은 구름 속으로 사라질 수 있다. 비 내린 후 하늘에 걸린 무지개는 찰나 간에 존재하다가 사라진다. 보고 있느냐, 보지 못하냐의 차이가 된다. 보는 이와 보지 못하는 이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단 한순간의 여유이다. 집착하지 않고 사로잡혀 있지 않으면 볼 수 있다.


너무 큰 질문은 답을 찾기도,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작은 질문들은 그저 내 안에서 머물다가 스스로 그 답을 찾는다. 내가 좋다면, 내가 행복하다면 그것이 답이다. 작은 질문들에는 그 어떤 객관성도 증명도 필요가 없다. 틀려도 아무런 상관없다. 사실상 맞고 틀림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


누군가 나에게 '왜 사는지'를 묻는다면 나는 개인적으로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답을 할 것이다. 그러면 '왜 행복해야 하는가'를 물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라고 답을 할 것이다. 이 질문과 답은 영원히 꼬리를 물로 무한대로 반복될 것이다.


왜 사는지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우리는 조금 더 자세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퇴근 후엔 뭘 할까?', '오늘은 뭘 먹을까?', '내일 무슨 영화를 볼까?', '주말엔 어디로 단풍 구경을 가볼까?', 정도의 질문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오늘 내가 그리 행복하지 않다면 내가 품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해서가 아니라 어쩌면 나는 너무 커다란 질문 속에 있지 않는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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