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행복하고 싶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의 유명한 단편선의 제목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이 질문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자. 정말로 우리는 무엇을 통해 살아갈까?
뭐, 원칙적으로 따지면 우리는 먹고 자고 싸고 숨쉬기에 살아간다. 이것이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그러니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답을 하자면 먹을 것, 공기 등이 가장 주요한 무엇의 후보가 된다. 하지만 우리는 먹고 숨 쉬는 과정을 삶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저 '생존'이다.
그러니 조금 더 생각을 해봐야 한다. 그런데 답을 찾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다. 그 답은 바로 행복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행복으로 산다. 행복은 삶의 목적은 아니지만 분명히 아주 강력하고 거의 유일한 수단이다. 단지 요즘 시대엔 행복이 너무 중요해져서 수단의 지위에서 목적의 지위로 격상되고 말았다. 원래는 살아가기 위해서 행복해야 하는데 지금은 행복하지 못하면 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단편을 통해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가 말한 사랑도 그저 행복한 삶의 한 방법론일 뿐이다. 단지 사랑은 매우 좋은 방법론이다. 그 방법론이 누군가는 사랑이고, 누군가는 돈이고, 누군가는 명예이고, 누군가는 인기이고, 누군가는 업적이고, 누군가는 봉사이고, 누군가는 가족이다.
행복에 이르는 길에서는 사람들마다 모두 각자의 기호가 존재하는 것이지 딱히 정해진 것도 무엇이 더 낫다 더 옳다 그런 것은 없다. 그저 자신이 행복한 것을 하면 된다.
사람에 따라서 맛난 것을 먹을 때 행복하고, 재미난 것을 볼 때 행복하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할 때 행복하고, 평소 가고 싶었던 장소를 갔을 때 행복하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는 것을 느낄 때 행복하고, 평소 갖고 싶었던 제품을 살 수 있을 때 행복하고, 따뜻한 불 앞에서 행복하고, 너무도 멋진 풍경을 봤을 때 행복하다.
이렇게 행복은 정말로 다양한 길이 있지만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행복에 이르는 길 중에서 아주 크게 차지하고 있는 방법론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착각'이다. 착각은 우리 인간의 행복하게 만드는 데 있어서 정말로 큰 영향력을 끼친다. 하지만 그것이 착각임을 알 방법이 없다. 처음부터 착각이기에 그렇다. 원래부터 착각은 깨어나지 못하기에 착각이다. 그러니 스스로 알아낼 방법은 없다.
누군가 나에게 내가 마음에 드는 선물을 줄 때 우리는 흔히 상대가 나를 위해서 준다고 믿는다. 이런 경험을 우리를 많이 행복하게 해 준다. 하지만 우리가 타인에게 선물을 줄 때 생각을 해보자. 우리는 과연 정말로 그 사람을 위해서 선물을 줄까?
물론 착각 속에서는 당연히 그렇다. 하지만 착각을 깨어나서 진실을 보면 우리는 그 어떤 때도 상대를 위해서 선물을 주지 않는다. 오직 나를 위해서 준다. 상대가 기분이 좋아서 나를 더 좋아하도록 만들고 싶어서, 나를 더 찾게 만들고 싶어서, 그래서 언젠가 나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고 믿기에 주는 것이다.
정리하면 상대가 나에게 언젠가는 유용하다고 믿어지기 때문에 주는 것이다.
사람의 유용성은 단순히 돈이나 물질적 이득에 국한되지 않는다.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모든 것이 나에겐 유용하다. 그러니 우리는 내 돈을 아낌없이 투자해서 타인에게 선물을 줌으로써 나를 조금 더 행복하게 만든다. 이것이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뭔가를 주고받는 이유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우리는 나 자신도 상대도 서로를 위해서 선물을 하고 있다고 '착각' 한다. 하지만 그 착각이 우리를 참 많이 행복하게 해 준다. 그렇기에 잘 대해준 상대가 내가 필요로 할 때 나 몰라라 하기 전까지는 이 착각은 유지가 된다. 설령 한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해 깨지더라도 착각 그 자체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가 사람을 잘 못 봤다고 여길 뿐이다. 그런 과정으로 인해서 우리는 모두 지금껏 다들 그렇게 상처를 받아 왔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상대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준다는 착각에서는 빠져나오지는 못했다.
집에서 키우는 개나 고양이의 모습을 보면서도 착각이 일어난다. 그들을 의인화하는 것이다. 그들의 이해 못할 행동이나 혹은 인간과 비슷한 행동을 보고는 마치 그들이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다고 믿고는 그들의 행동에서 다양한 행복을 경험한다.
주인에게 아주 충성스러운 개에 관한 이야기나 주인을 집사 취급하는 고양이에 관한 이야기들이 바로 다 그런 '착각'의 일종이다.
개는 원래 무리 생활을 했던 늑대의 후손이다. 그래서 개는 무리 생활에서 생겨나는 서열구조에 아주 익숙하다. 그러니까 무리의 강자에게 납작 엎드려서 충성을 다하는 것이 자신의 생존에 가장 도움이 된다는 것이 DNA에 새겨져 있다. 그래서 자신에게 먹이를 주는 주인에게 그토록 충성하는 것이다. 만약 그런 개라도 낯선 누군가가 밥을 주면 처음엔 경계하겠지만 그 과정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그 사람에게 충성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도 개는 한번 맺은 주인을 절대적으로 좋아하고 그래서 인간처럼 배신하지 않는다고 착각한다. 고양이는 정 반대이다. 원래 혼자 살던 동물이라서 무리 생활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먹을 것을 주는데도 그런 식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그런 태도를 우리가 착각해 해석해서 그것을 도도하게 군다고 여긴다.
부모자식 간에 생겨나는 착각도 크다. 사실 부모와 자식이란 관계는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다. 동물들의 세상을 보면 알 수 있다. 무리를 지어 사는 동물에게 가족은 생존에 매우 중요한 파트너이지만 개별적으로 살아가는 동물일 경우엔 성체가 되는 그저 영역권을 두고 다툼이 일어나는 경쟁자가 될 뿐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가족을 보편적인 관계성을 초월한 무엇인가로 '착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것이 우리들에게 너무도 큰 이득을 주는 관계이기에 최대한 지키려고 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오랜 시간 가족과 함께 세상과 싸워가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어서 이젠 가족 자체를 기존 관계와는 전혀 다른 어떤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가족은 나의 안전을 위한 가장 강력한 보호장치이다. 그렇기에 몹시 소중하다.
이 외에도 우리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에는 정말로 수많은 착각들이 존재한다. 누군가를 돕는 마음에도, 누군가를 절실하게 사랑하는 마음에도, 진정한 우정을 꿈꾸는 마음에도,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때도, 숨 막힐 듯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도, 너무도 맛있는 커피 한 잔을 할 때도 일어난다.
그래서 인생의 쓴 맛을 볼 대로 본 현실적인 누군가는 그런 착각은 다 버려야 하고 진정한 현실을 봐야 한다고 한다. 차갑고 불친절하며 이기적이고 무의미한 현실을 봐야 한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8만 원의 원가가 드는 가방을 브랜드화시켜서 400만 원에 파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그 가방을 사는 사람들은 충분히 만족을 한다. 그저 돈이 많아서 사는 사람뿐만 아니라 그 가방을 사기 위해서 오랜 시간 힘들게 돈을 모아 온 사람들도 그렇다. 그 가방을 사는 게 아니라 '착각'의 행복을 사기에 그렇다.
눈 오는 날 창가에 앉아서 분위기 있게 먹는 커피 한 잔에는 하루 일당이 천원도 되지 않는 사람들의 열악한 노동력이 숨겨져 있다. 커피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소비하는 수많은 제품들이 그렇다. 너무도 재미있는 드라마에는 한 편 출연료가 억 단위가 넘는 배우들의 화려함과 연기자로 살고 싶지만 그 일자리만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어서 따로 알바를 하면서 살아가는 이름 모를 배우들의 힘든 현실이 담겨 있다.
이런 상황이기에 현실론자의 따끔한 일침은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한 가지 꼭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다. 그래, 그렇다. 다 착각이고 상상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사람도 안 만나고, 명품도 안 사고, 가족도 못 믿고, 남도 돕질 않고, 예술 작품을 감상하지도 않고, 드라마도 보질 않고, 커피 한 잔을 하는 여유도 즐기지 못하면 도대체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늘 나를 위해 하지만 너를 위해 하고 있다고 믿어지는 수많은 착각들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삶이 안전하다고 믿을 수 있을까?
현실과 진실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살아가야 하기에 착각에 의한 행복 역시도 매우 필요하다. 인간은 지금 당장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죽는 게 아니다. 앞으로 희망이 없기에 죽는다. 우리를 죽게 만드는 절망은 더 이상의 미래에 대한 행복한 상상을 할 수 없을 때 생겨난다.
인간이 이타적일 수 있다고 믿고, 보답을 기대하지 않는 순수한 도움을 믿고, 나를 위해 주는 선물이 존재할 수 있음을 믿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오직 나라는 존재 자체를 사랑한다고 믿고, 진실한 우정이 존재할 수 있음을 믿고,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말하고 있는 자신의 진심을 믿고, 우리가 오감으로 느낀 모든 것이 뇌에서 만들어 낸 착각이 아니라 진짜로 존재하는 현실임을 믿고 사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을 너무 믿거나 너무 믿지 않거나 둘 모두 문제가 된다.
어떤 의도인지 다 알아도 누군가 나에게 선물을 주면 기분이 좋은 것이다. 나를 위해서 하고 있지만 누군가를 돕게 되면 기분이 좋아진다. 다 허망한 것을 알지만 내가 쓴 글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면 기분이 좋아진다. 착취된 노동력을 알고 있더라도 한 잔의 커피는 참 맛있을 수 있다.
명품을 샀다면 꼭 그 제품의 원가를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 기분이 좋다면 그것으로 끝이다. 단지 딱 거기까지이다. 그 명품이 자기 자신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400만 원짜리인 줄 알았던 인생이 갑자기 8만 원짜리가 되고 만다. 자기가 쓴 글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때 기분이 좋은 것도 좋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이다. 그 글이 자기 자신이 되는 순간 관심을 받지 못한 글을 쓰게 되면 그때부터는 자신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진다.
진짜로 누군가를 위해서 했다고 믿으면 당연히 배신을 당하게 되고, 진짜로 누군가를 위해 봉사를 했다고 믿으면 전혀 감사해하지 않고 당연하게 여기는 상대에게 상처를 입는다.
우린 그저 현실을 딛고 상상 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면 된다. 현실을 딛고 있지 않으면 나락으로 추락할 염려가 있고, 상상을 하지 못하면 행복할 수가 없다. 이 둘은 모두 몹시 많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