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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국루터란아워 Apr 29. 2020

후기: 열다섯 번의 인터뷰에 관하여

본 매거진의 인터뷰어 봉사자로 활동한 김도헌 님

먼저 브런치 매거진 프로젝트를 통해 글을 쓸 기회를 마련해주신 한국루터란아워와 인터뷰를 도와주신 분들, 그리고 투박한 글을 읽어주시고 공유해주신 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많은 분들의 아낌없는 지지 덕분에 이 프로젝트는 무사히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브런치 매거진 <청년 그리스도교 봉사자를 만나다>에서 6개월에 걸쳐 인터뷰를 진행했던 과거를 정리해봅니다.



애매모호한 동기였지만 하고 싶었습니다. 예수 때문에.


이 프로젝트는 2019년 9월 20일, 어둑한 저녁에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의미 있는 교회 공동체에 대해 막연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날에도 학교 선배를 통해 연이 닿은 루터란아워 사무실을 찾았습니다. 참 감사하게도 선배는 고민을 토로할 기회를 잘 만들어 줬습니다. 그래서 일과가 끝나가는 저녁 즈음 남산 언덕 자락에 위치한 사무실로 자주 놀러 갔습니다. 무엇보다 언덕을 내려오면서 함께 나누는 대화가 참 재밌었습니다. 날로 늘어나는 청년층의 무종교 인구 비율을 전제로, '사람들은 왜 오랫동안 교회를 찾았을까' 고민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일들을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물음을 나누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는 이유를 직접 접해본다면 어떨까?

어쩌면, 교회 공동체의 고유한 가치를 생생하게 체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날것의 이야기는 교회 바깥에도 매력적인 소식이 되지 않을까?


주제 넘게 현 시국의 향방을 진찰하고 처방을 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그저 지금 있는 자리에서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해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대화는 서울역 앞의 한 국밥집에서까지 이어졌고 <청년 그리스도교 봉사자를 만나다>의 취지가 이끌어져 나왔습니다. 의미 있는 교회 공동체에 대한 막연했던 호기심이 교회 공동체에 대한 날것의 후기를 원하게 만들었습니다. 무종교 시대, 즉 종교에 대한 전면적인 무관심 속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청년들의 관심은 교회 공동체에 있어서는 분명히 매우 귀한 원동력일 것입니다. 또, 거창하게 표현하면 그것이 예수에 대한 오늘날의 살아있는 고백일 것입니다. 따라서 스스로 교회를 찾아온, 혹은 다니고 있는 청년들의 이야기 자체가 교회 밖 젊은 사람들에게 이해될 수 있는 그리스도교의 매력이 될 수 있겠지요. 더욱이 교회 한가운데에서 봉사하는 자발성이 담긴 목소리는 선교를 꿈꾸는 입장에서 놓치고 싶지 않은 생생한 매력일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문득 떠올랐던 생각이 이것이었습니다. “그러한 분들께 밥 한 끼 대접하면서 인터뷰를 하면 어떨까.” 이야기가 크건 작건, 교회에서 수고하시는 분들의 잘 안 보였던 생생한 이야기, 교회에 대한 그분들의 정직한 후기에 주목하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무엇보다 교회 현장에 대한 막연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평범한 개인 사업체와 어딘가 다르고, 세상 돌아가는 원리와 어딘가 다를 것이라는 그런 믿음이요. 경쟁 사회에 없는 교회의 여유를 믿었습니다. 모두가 체감하듯이 사회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유한성은 사람을 유구한 경쟁으로 이끕니다. 모두가 넉넉했더라면 항간에 얼굴 붉히는 일이 있었을까요. 누구에게나 한계가 있다는 사실은 그 한계를 극복하려는 각축장에서의 치열한 전쟁으로 사람들을 이끕니다. 그래서 경쟁 사회에는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누구에게나 중요하니까요. 그러나 그런 뻔한 세상과 교회는 다르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죽음이라는 가장 큰 한계 앞에서 사람은 가장 불안해집니다. 누구나 죽게 되고, 그래서 정해진 삶의 한계 안에서 부족함을 느끼기 마련이라 자신의 곳간을 키우고 쌓으며 위험에 대비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생명을 위해 유한한 곳간을 어떻게 지키느냐가 자연스레 최대 관심사가 되기에 사람은 낯선 존재를 신경 쓸 여유가 별로 없습니다. 자신이 쌓아 올릴 곳간을 낯선 사람이 방해만 안 하면 될 뿐이니까요. 자신과 다른 것, 자신과 무관한 것은 자기 곳간을 보호하는 일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니 종종 불쾌하기까지 한 다른 이웃은 으레 꺼려지는 존재겠지요. 쌓아올린 것들을 아껴 쓰며 지속되는 생존이 피곤해지는 공허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런 지루한 상황 안에서, 예수는 매우 흥미로운 행동을 합니다. 적어도 제가 알고 있는 예수는 돈 때문에 비참해지고 남에게 받는 인정 때문에 비루해지는 살벌한 이야기 대신, 어떤 소망을 여유롭게 이야기합니다.


2000년 전, 가난한 촌동네 출신 예수는 누가 봐도 단번에 알 수 있는 작은 곳간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기록에 따르면, 예수는 다 가진 것마냥 이야기하고 다닙니다. 특히, 그는 초라한 사람들을 매우 따뜻하게 대접하고 다가오는 모든 사람에게 섬세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예수는 그 누구도 갈취하지 않고도 얼마나 여유로웠는지, 자신의 곳간을 노리는 원수조차 불쌍히 여기며 병든 사람을 여린 마음으로 환대했습니다. 무엇보다 죽음 앞에서, 예수는 무척 여유로웠던 상황을 치열하게 떠올리며 자신의 곳간을 부수고 사람들을 대접했습니다. 예수는 자신마저 내어줄 수 있는 초월적 여유를 사람들에게 소개했습니다. 상상하기 어려운 기이한 일입니다. 모두가 알듯이 비어있는 곳간은 다른 사람을 도울 수가 없습니다. 만약 가난한 곳간이 많은 사람을 도와주었다면, 그 곳간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누군가를 갈취한 도적의 곳간일 테지요. 또한, 도적의 곳간은 여전히 가난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무엇보다 여유로웠습니다. 그는 자신이 말했던 '하나님 나라'의 곳간으로 현실의 한계를 극복합니다. 예수는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 충족으로 나무에 매달려 자신의 곳간을 부수기까지 합니다. 예수가 보여준 초월적 여유 혹은 그가 나타냈던 삶의 의미, 사랑. 미약하게나마 사람들이 교회에 가는 이유를 추측하건대, 예수에 대해 남아있는 기록은 머리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지만, 사랑은 온전히 이해될 수 없기에, 사람들은 이해를 초월하여 예수를 신뢰하지 않았을까요.


한편, 예수의 방식대로 초월적 여유를 한 번이라도 맛본 당대 추종자들은, 그 여유가 너무 아늑했던 탓이었을까, 마가의 다락방에 다시 모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예수의 추종자들은 나무에 매달린 예수를 보고 도망쳤었습니다. 상상해봅니다. 공통된 경험을 하고 도망친 야인들 사이에 어떤 높고 낮음이 있겠습니까. 권력자들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반역자 예수를 위해 죽음을 무릅쓴 자리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가겠습니까. 그 자리에서는 지위와 신분을 떠나, 세간의 익숙한 방식에 따라 도망쳤던 과거를 솔직히 고백하며 자신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과 예수의 여유를 비교하지 않았을까요. 자신이 느꼈던 예수의 강렬한 여유를 떠올리며 자신의 곳간이 더는 필요하지 않음을 느끼고 초월적 여유로 이를 부수려 하지 않았을까요. 마음을 찌르는 십자가에서의 자기 부인을 반복하며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 자리에서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꼬"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고민 가운데 자신의 삶 속에 있었던 예수의 여유를 공유했을 것이며 물건을 나누고 모이기에 힘쓰고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삶을 통찰했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그들은 여유의 끝자락을 붙잡고 삶을 공유했을 것입니다.


지금 전 세계가 앓고 있는 코로나19도 그렇지만, 알게 모르게 닥쳐오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 모두가 녹록치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여유와 공유는 정말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의 여유를 존중하고 신뢰하였기에 인터뷰를 통해 삶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일이 하나의 교회가 될 테니까요. 국밥집에서 프로젝트의 이런 취지를 가만히 듣던 선배는 흔쾌히 도와주셨습니다. 단, 인터뷰가 진솔하고 ‘정직한’ 대화의 장소여야 한다는 조건으로요.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누군가에게 신뢰받는 경험이 즐겁고 감사해서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루터란아워가 요구하는 정직함은 솔직한 고백에 대한 절실한 요청으로 다가왔습니다. 정직하려면 자신을 거스르는 희생이 있어야 함을 직감으로 어렴풋이 느낀 채 말입니다.



잠긴 문도 흔들어 보았습니다. 초짜라서.


학기 중에 짬을 내가며 진행한 이 프로젝트는 기획부터 인터뷰까지 전부 처음해보는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교회나 선교단체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봉사였고, 누군가를 인터뷰하는 일 자체가 낯설었습니다. 더구나 청년 그리스도교 봉사자에게 어떤 다과나 음식을 대접할까, 어떻게 인터뷰해야 할까 등은 당장 고민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인터뷰 대상자를 만나는 것부터가 막연했기 때문입니다. 하고 싶어서 했던 일이고, 루터란아워에서 편집을 맡으면서 활동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이기에 감사하기도 했지만, 섭외부터 원고 작성까지 대부분을 혼자 해내려니 갑갑했습니다.


만남 자체가 매거진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내내 가장 큰 고민이었습니다. 사람을 만날 수 없으면 인터뷰 자체를 시작할 수 없으니까요. 만나는 사람에 따라 인터뷰 내용도 완전히 달라집니다. 만나서 물어볼 질문은 뻔합니다. 봉사자에게 다가가 "당신은 교회를 왜 다니는지" 잠시 물어보는 일이죠. 단순한 질문이지만 무게가 있습니다. 상상해보세요. 누군가 갑자기 이러한 질문을 제시한다면, 아마도 대다수는 흠칫 놀라 미묘한 시간 동안 자신을 돌아볼 것입니다. 당황할 수도 있고 어쩌면 멋쩍은 웃음으로 자리를 피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 경험이 녹아든 솔직한 동기를 늘 정리한 채 거리를 돌아다니기는 번거로우니까요. 따라서 무작정 카메라를 들고 길거리에서 질문하기가 어려운 노릇이었습니다. 이것은 카페처럼 차분한 공간이 필요한 과제였습니다.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지도 고려해야 했습니다. 날것의 이야기는 편안한 공간에서 나올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인터뷰 참가자마다 어떤 장소를 가장 편안하게 여길지, 어디에 가야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을지 정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대형교회, 중·소형교회, 상가교회, 개척교회, 미자립교회, 대학 기독교 단체,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교회, 그리고 여건이 된다면 교외나 시골지역의 교회까지, 최대한 많은 환경에서 나온 목소리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다양한 환경에 엄존하는 청년 그리스도인들의 진솔한 동기와 풍성한 자발성을 공유할 수 있도록 말이지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개인적으로는 이 지점이 가장 아쉬웠습니다. 좀 더 애를 써서 찾아봤다면 웹진의 가치를 더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곳이 많았을 텐데.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일이 섬세한 작업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는 과정이었습니다. 시간과 자본이 충분하지 않은 여건에서 홀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것은 예상보다 많은 경험과 능력을 요구했습니다. 인터뷰 대상자와 함께 나눌 식비만 지원되는 상황에서 저는 발로 뛰었습니다. 모르니까 직접 찾아가서 물어볼 수 밖에요. '교회마다 찾아다니며 그곳 봉사자에게 잠시 인터뷰를 부탁해보면 어떨까?' 그렇게 발이 아파지는 시간이 왔습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이 웹진 프로젝트는 교회 '봉사자'가 대상이지 '교회'는 대상이 아니었기에, 인터뷰 진행 여부는 요청을 받은 사람의 자유로운 재량과 의사에 달려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프로젝트는 교회와 연계한 활동이 아니기에, 봉사자는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인터뷰를 해도 괜찮을지'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따라서 애초에는 교회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인터뷰 진행 여부는 인터뷰를 요청 받은 봉사자의 재량에 달려 있고, 저는 교회를 찾는 것이 아니라 봉사자를 찾아야 했으니까요. 그러나 봉사자가 있을 법한 장소, 봉사자를 만날 수 있는 곳은 교회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인터뷰를 요청해보는 것이 저에게는 태어나 처음 해보는 새로운 일이었습니다.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교회를 찾고 교회에 문의했습니다. 이곳에서 봉사하는 청년 교인을 인터뷰하는 게 가능한지 말입니다.


다양한 교회의 모습을 중심으로 대학생인 저에게 익숙한 대학사회, 그리고 실제적으로 제가 찾아다닐 수 있는 수도권 지역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렇게 각 형태를 종합해서 70여 곳 이상을 조사했습니다. 직접 현장에서 문을 두드리기도 하고, 주보에 적힌 연락처로 전화하거나 이메일도 보내보고. 모든 것이 처음이기에 낯선 사람에게 제가 하고 있는 프로젝트 활동을 소개하는 일조차 큰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여러 곳에 문의를 드렸지만, 교회의 반응들은 그렇게 좋지 않았습니다. “그럴 청년은 없다.” 교회마다 너무나도 속히 거절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제가 이런 시도를 해보는 게 처음인지라 설득의 기술(?)이 미숙한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거절하기 전에 교회에 있는 봉사자들에게 한 번 물어보기라도 해주시지…. 아쉬움을 안고 더 뛰어야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어쩌면 저는 편한 길을 선택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봉사자에게 교회 다니는 동기를 물어보려 한다는 말은 화를 내시는 분이 있을 정도로 당혹스럽고 난처한 질문이었습니다. 교회 사무실을 지키는 교역자들의 의사를 존중해야 하기에 아쉬움을 뒤로한 채, 거절에 적응하며 다른 방법을 찾아보았습니다.


감사한 순간들도 많았습니다. 인터뷰 일정을 잡기까지 선뜻 도와주셨던 많은 손길도 있었습니다. 프로젝트 홍보를 도와주었던 대학 동기들, 인터뷰에 선뜻 나서주었던 대학 기독교 단체들, 그리고 새로운 시도에 관심을 기울이고 오히려 필자를 챙겨주려 했던 지역교회 분들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기꺼이 시간을 내어 조용한 카페에서 저의 질문들에 본인의 속마음을 조심스레 털어놓아주셨던 인터뷰 참가자분들께 감사했습니다. 하루는 인터뷰를 위해 잠시 참가자와 카페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분이 교회를 다니는 동기와 교회에서의 경험을 묻는 과정이었습니다. 참가자는 가정 환경을 통해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리스도교를 접했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나중에서야 그리스도교의 의미가 비로소 다가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저는 이런 질문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선생님께 2세가 생긴다면, 본인이 경험한 신앙의 변화를 토대로 선생님은 어떻게 그리스도교를 자신의 2세에게 소개하고 싶나요?” 참가자분은 오묘한 표정으로 질문이 어렵다고 답했습니다. 그러나 재밌는 질문이라 꼭 답변하고 싶다고, 잠시 동안 골똘히 커피를 바라보셨습니다. 카페에서의 그 장면과 느낌이 가장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함께 대화하고 있는 상대방에게서 투명하고도 내밀한 깊이가 느껴질 때, 사람을 살게 하는 은혜가 이런 것인가 싶었습니다.


제가 한 일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인터뷰 참가자가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생각하는지 가늠해보아야 했습니다. 식사나 다과를 대접하며 듣게 되는 이분들의 체험과 현실에 귀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사소하고 가벼운 이야기에 집중하고, 묘한 감정이 느껴지면 어떻게든 섬세하게 풀어내야 했습니다. 무엇이 이 사람을 교회로 이끌었는지, 그래서 이 사람은 무엇을 느꼈는지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상대방의 언어를 이해하고 표정에 공감해야 했습니다. 인터뷰 때마다 섬세한 관심이 요구되는 순간을 경험했습니다. 공감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전한 상대방의 말은 결국 그 사람을 핑계 삼아 내놓는 제 자신의 이야기가 될 테니까요. 더불어 인터뷰 자리가 저 개인의 호기심을 넘어 삶을 공유하는 시간이 되게끔, 제게 여유로운 마음이 꼭 필요했습니다. 오롯이 ‘듣기’ 위해, 인터뷰 직전까지 마음이 여려질 수 있도록 제 자신을 자주 돌이켰던 것 같습니다.


또한, 호기심이 배려를 앞지르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살펴야 했습니다. 상대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궁금한 것들이 많아집니다.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며 묻다보면, 섬세히 다루어야 마땅한 개인의 과거를 그저 손쉽게 체크하고 넘겨버리는 일종의 답변지로 여기기 십상입니다. 경험과 기억을 함께 나누고 다른 이에게까지 흘려보내는 과정에는 많은 준비와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설명되는 과거와 고백되는 과거의 느낌은 사뭇 달랐습니다. 누군가의 과거에 바탕한 솔직한 생각을 전하는 일이 그 사람의 과거를 들추는 무례가 되어서는 안 될 일이지요. 한편 봉사자들이 자신의 이야기 가운데 본인이 소속되어 있었거나 현재 소속되어 있는 교회 공동체에 대해 평가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솔직한 이야기에 주목하는 것은 고사하고 인터뷰 자체를 껄끄러워하는 교회가 많은 게 현실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인터뷰 참가자가 자칫하면 "네가 감히 우리를 배신하고 뒷담화를 해?" 같은 비난과 공격을 받을 수도 있는 민감한 상황을 감수했습니다. 그래서 자발성이 담긴 동기와 정직한 고백을 중요시하면서도, '선'을 지키기 위해 애썼습니다. 정직한 이야기가 가지는 매력을 기대하면서, 인터뷰한 내용을 어디까지 공개할 것인지를 두고 참가자분들께 사정하는 일도 다반사였습니다.



어?! 내가 하려던 게 원래 이런 거였나?


인터뷰 참가자가 대부분 모태신앙, 또 목회자·선교사 자녀였던 것은 전혀 의도하지 않은 부분이었습니다. 애초에 정해둔 인터뷰 대상의 조건은 단순히 20대 청년 중에서 봉사 경험이 최소 2년 이상 되었던 분들이었지요. 방문했던 작은 교회들은 교인이 별로 없어서 소속된 청년 대부분이 봉사를 맡고 있었지만, 여하튼 아이러니한 상황이었습니다. 모태신앙이 아니라면, 교역자의 가족이 아니라면 사람들이 교회에 다닐 일은 이제 없는 것일까. 그렇다고 성급하게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참 기이한 일이었습니다.


인터뷰 참가자 대부분은 가족에 의해, 가족으로부터 그리스도교를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2년 이상의 봉사 경험을 갖춘 인터뷰 참가자로 목회자 자녀가 가장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의 분위기는 뭐랄까, 고단한 느낌이 좀 강했습니다. 감히 거칠게 평가하자면,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힘으로 공동체가 존속되고 있다는 느낌이랄까요. 두려움은 의무를 만들고 사람을 지치게 합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두려움이 당연한 일상이 되면, 본인이 정말 원하는 것에 대한 주장 따위는 가뜩이나 피곤한 상황에 피곤을 더하는 잘못된 행동일 뿐입니다. 이런 일이 가장 가까운 삶의 자리, 가정에서 벌어진다면 더더욱 그러하겠지요. 행복한 가정과 가족 구성원의 안정적인 지지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요. 나의 불만과 불편이 가족 구성원의 생계가 걸린 일 때문에 생겨났다면, 혹은 가족 구성원에게 안정적으로 지지받지 못하는 종류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가족의 행복을 위해 내 자유가 침해되는 것쯤이야 별 일 아니지.' 불행한 일입니다. 자유롭기 위해 가족과 싸워야할까요? 이들은 교회에서 힘을 느꼈습니다. 신앙생활을 '일'로 느끼면서 말입니다. 힘에 억눌려, 생존을 위해, 지루함을 참아냅니다. 자신이 왜 이곳을 좋아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교회에 마음이 가지 않습니다. 고민하고 생각하고 스스로 결단할 공간이 없습니다. 사회생활의 불편한 가면을 쉬는 날 없이 착용해야 합니다. 자기를 돌이켜 주님을 향하기로 선택하는 결단의 순간에 주어지는 값진 기쁨이 정말 그런 곳에서 생겨날 수 있나요?


힘으로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은 간편합니다. 그러나 힘으로 결박된 공동체는 매력이 없습니다. 자발성이 없습니다. 가족 구성원이 이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어떻게 소개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물론 '다 그런 것만은 또 아니겠지만', 인터뷰 대화 너머에서 지금껏 어떤 상황을 겪어왔는지 짐작은 갑니다. 누군가를 부자유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을 자유하게 하는 길로 그리스도교를 소개할 수는 없을까요. 저는 목회자 자녀도 아니고, 그런 어려운 상황과는 멀리 있기에 너무 쉽게 이야기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나무에 매달리신 예수의 사랑을 떠올려 봅니다. 예수의 여유가 간편한 힘에서 비롯되었던가요.


다만 불행과 거리가 먼 사례도 없지 않았고, 인터뷰를 하면서 깨닫게 된 진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인터뷰에 참가하신 분들이 이런저런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이유를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떠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인터뷰 참가자들 각각은 알게 모르게 자기 삶의 우연이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고백해준 것 같습니다. 세상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예측과 통제가 안 되기에 우리는 골머리를 앓습니다. 그러나 인터뷰 참가자들은 공통적으로 절망 가운데에서 차분히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든지 자신을 긍휼히 여겨주는 존재를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존재가 자신의 고난에 고스란히 동참하고 있음을 기억할 때, 그분들은 '나와 함께 고난받음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는 초월적 여유를 가졌음'을 잊지 않은 것이 아닐까요. 현재 고통당하고 있는 자신을 그 초월적 존재가 여유롭게, 그리고 강하게 지지해주고 있음을 떠올리며 그 여유에 동참하여 자유롭게 되는 자신을 발견한 게 아닐까요. 하나님의 사랑을 여유로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 제가 인터뷰 참가들에게서 본 매력적인 진실은 이것입니다.



작은 모래알이 되었기에 느끼는 보람


인터뷰를 마친 참가자분들에게서 종종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뭔가 정리되는 느낌이다.” 저는 그저 참가자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런 일이 있었는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물었을 뿐입니다. 이 매거진 프로젝트는 참가자 자신에게도 스스로 신앙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자신이 교회에 다니게 된 동기를 물으면서 말이지요. 사실 생각할 수 있는 자리는 흔합니다. 마음만 먹으면 사방이 자신을 돌이켜보는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매거진을 통해, 누군가의 삶이 공유될 수 있었다는 점이 특별했습니다.


인터뷰에서 정직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지닌 매력도 게재된 글들 속에 어느 정도는 녹아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아주 싱싱한 날것을 전했는지 묻는다면, 살짝 아쉬웠습니다. 그러나 묻는 저도 답하는 참가자도, 그리고 매거진을 읽으며 함께 해주신 분들까지 모두가 평소 자신이 교회에서 어떤 생각을 하며 인생을 만들어 왔는지 고민해볼 수 있는 자리였기에 본 매거진 프로젝트는 제게 크게 감사할 거리입니다.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당혹스러운 순간도 있었고 아이러니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기대가 컸던 탓인지 인터뷰를 거절 당할 때마다 마음이 어려웠던 게 사실입니다. 작고 무기력한 빈손의 의미를 알아가는 순간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게 되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작은 모래알이 되었기에 보람을 느낍니다.


많은 분의 호쾌한 여유와 동참이 없었다면 단 하나의 인터뷰도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브런치 매거진을 시작한 루터란아워, 저와 만나 솔직한 대화를 나눠주신 인터뷰 참가자분들, 활동에 도움을 주고 지지해주었던 대학 기독교 단체들과 동기들, 그리고 <청년 그리스도교 봉사자를 만나다>의 투박한 제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이후로도 정직한 이야기들이 이 자리를 통해 계속 나누어지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주> 본 브런치 매거진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처음부터 15번째 인터뷰까지 봉사자로 활동해 준 김도헌 님(연세대학교 신과대학 신학과 재학)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향후 인터뷰어 봉사자 활동을 희망하시는 분은 한국루터란아워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이메일: info@korealutheranhou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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