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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댕경 Jun 09. 2021

#1. 기억

[댕경X인영구] 댕경으로부터

아직 내 방 한편엔 다 시들고 말라비틀어진 꽃다발이 있다. 치우려고 하면 마른 꽃잎들이 우수수 떨어져서 치우기를 포기하게 되는 그런 꽃다발. 마르기 전엔 참 예쁜 꽃들이었는데 이제는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바스러지는 걸 보니 꽃다발에게 작은 마음조차 써주지 못해 이렇게 된 것만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어떤 날에는 마음속 한편에 소중히 간직해놓은 내 기억들이 저 꽃다발과 같다는 생각도 한다. 분명 처음에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기억들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기억의 많은 것들이 바래지고 삭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 한 번씩 꺼내보고 싶어서 예쁘게 말려놓으려고 했지만, 오랜만에 꺼내보면 많은 것들을 잊어버리고 자그마한 기억의 파편들만 남게 되는 건 내가 그 기억들을 잘 관리해주지 못해서가 아닐까.



잊고 싶지 않았던 기억들이 많았다. 아직도 생각나는 어릴 적 추억 중 하나는, 내가 다섯 살 때 동생을 세발자전거 뒤에 태우고 ‘형아가 너 태워줄게!’ 하면서 낑낑대며 페달을 밟았던 것? 사실 지금은 정말 그랬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본가에 내려갈 때마다 동생과 내가 자전거에 함께 타고 웃으며 찍은 사진을 보면 왠지 그랬던 것만 같다. 정말 그랬던 게 맞을까. 어릴 적 사진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정말 그런 일들이 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게 슬프기만 하다. 나에게는 기억을 저장하는 머릿속 저장공간에 한계가 있어서 공간이 가득 차면 과거의 기억들을 밀어내고 새로운 기억들이 저장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조금 더 선명한 기억들은 그렇지 못한 기억들을 밀어낸 승자들 일지도 모르겠다.



꽃을 좋아하는 우리 어머니는 내가 가끔씩 꽃다발을 선물해드리면 며칠 가만히 두다 마를 때쯤이면 과감히 버리곤 하셨다. 당신이 좋아하는 꽃을 한 아름 선물해드렸는데 왜 버리시냐 여쭈어봤는데,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꽃은 꺾고 나면 아무리 관리를 잘해주고 예쁜 꽃병에 꽂아놔도 시들어부는 법이여. 예쁜 건 잠깐 봤으면 됐제. 선물해준 사람 마음은 남은께 괜찮어.’



기억에게도 마음이 있다면 꼭 전해주고 싶다. 더 오래 기억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기억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그리고 오늘은 꼭 방 한편에서 말라가던 꽃다발을 치워야겠다.









2020. 02. 24. 

대경.







*

[아우어 레터는 매주 수요일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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