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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소나 Jan 26. 2021

‘나도 수업에 들어갈 수 있다면’

하고 바랐던 소원이 현실로

자율학습실에서 일하다 보니, 부러운 사람들이 생겼다. 학생들을 따라 일반 수업에 들어가는 IA (보조교사)들이었다. 그들은 과학이나 수학 등의 수업에 들어가서 노트 필기를 하면서, 수업 중에 학생들을 도와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수업이 끝나면 다시 자율학습실로 돌아와 수업에서 받은 프린트 물이나 노트 필기 등을 공유 바인더에 복사하여 정리하고, 칠판에 숙제를 업데이트시키는 것도 그들의 몫이었다.  


그들이 왜 부러웠냐 하면, 나도 고등학교 수업을 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내 영어 실력으로 얼마나 알아들을 수 있을지 테스트해 보고도 싶었고, 무엇보다 선생님에게서 직접 배운 다음에 학생들을 가르친다면 훨씬 더 자신감 있게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나보다 먼저 일을 시작했던 한국인 동료가 말하길, 자신도 수학 클래스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들어주질 않았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는, 그냥 주어지는 대로 감사히 일하자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부서 담당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Chemistry 클래스에 들어갈 수 있겠냐고 묻는 게 아닌가.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바라던 일이긴 하나, 수학도 아니고 화학 과목이라니... 복잡한 원소 기호들이 눈앞에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난 애써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Sure!” (오.. 내가 무슨 짓을..)

실은 이러했다. 화학 수업에 들어가서 학생들을 도와주는 특수교육 선생님이 있었는데, 아기를 낳게 되어 출산 휴가를 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 공백이 생긴 자리를 내게 넘긴 것이다. 사실 수업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영어로 화학 과목을, 그것도 처음부터가 아닌, 학기 도중에 들어가서 공부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쉽지 않을 것 같아서 마음은 무거웠다. 아무튼 내 수준을 높게 봐주시니 나로선 감사할 일이긴 하나, 내가 과연 잘 감당할 수 있을까? 


이리하여 선생님 대타로 들어가게 된 화학 클래스. 수업은 막 새로운 단원으로 접어들고 있었는데, 바로 화학 원소를 배울 차례였다. 인도계인 담당 선생님은 긴 수염에 머리도 더부룩하고 슬리퍼를 끌고 다녀서 첫인상은 그렇게 좋지는 않았지만, 막상 수업을 듣고 보니 내 생각은 달라졌다. 아이들 의견에 하나하나 귀를 기울여 주면서 단호할 때는 단호하게, 집중력 있게 수업을 끌고 나가는 힘이 있었다. 학생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발표하고, 그 답이 틀렸더라도 항상 긍정적으로 답해 주는 선생님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설명도 귀에 쏙쏙 들어왔다. ‘참 괜찮은 선생님이구나!’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 반에는 내가 도와줘야 할 학생들이 대여섯 명 있었다. 그런데 미리 공부해 놓은 것도 없고 영어도 부족하니 어떻게 도와줄지 몰라 처음엔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그냥 선생님 말씀을 열심히 들으며 필기를 했고, 실험 시간엔 돌아다니면서 학생들이 어떤 실험을 하는지 지켜보았다. 숙제가 뭔지 잘 듣고서, 수업이 끝나면 자율학습실로 돌아가 숙제 목록을 칠판에 적고, 배운 내용을 정리해서 교실 바인더에 꽂아 놓는 것은 그래도 쉬웠다. 곧이어 자율학습실로 온 학생들의 화학 숙제를 도와줘야 하는데, 그게 제일 큰 부담이었다. 따로 답안지도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선생님도 수업 시간에 학생들 숙제 답안까지 일일이 체크하지 않았고, 답을 다 가르쳐 주지도 않았다. 그건 다른 수업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로선 학생들에게 답을 일일이 가르쳐줘야 하기에 따로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내용을 배울지 미리 예습을 하고, 수업시간에 잘 들으며 이해를 하고, 숙제를 미리 풀어서 학생들을 도와줘야 했다. 잘 모르는 문제는 수업 시간에 틈을 봐서 선생님에게 재빨리 물어봐야 했다. 


그래도 보상은, 좋은 선생님을 만나 흥미로운 화학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것. 하루는 애들을 데리고 나가서 실험을 보여 주는데, 액체에 물을 부었을 뿐인데 펑 소리가 나게 터져서 학교 전체가 놀란 적도 있었다. 선생님의 자유로운 실험에 웃음이 나면서도 화학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도중에 한 학생 때문에 힘든 시간도 겪었다. 까불거리던 흑인 학생이었는데, 수업 도중에도 잘 집중하지 않고 친구와 잡담을 하고 간식을 먹거나 실험 도구로 장난을 쳐서 그때마다 하지 말라고 제지를 했었다. 그런데 이 학생, 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말하면 ‘뭐래’ 하는 식이니 이 학생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대략 난감이었다. 내가 영어로 잘 세련되게 이야기했으면 또 몰랐을 텐데, 그냥 단순하게 하지 말라고 제지하니 아마 기분이 나빴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후로도 자율학습실에서 내가 수학이나 화학을 가르쳐 주려고 하면 잘 듣지도 않고 옆의 학생과 장난치면서 무시하는 태도가 느껴져서 기분이 안 좋았다. 굳이 마음 상하면서 가르치려 애쓸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학기말 시험이 다가오면서 모두가 마음 급해졌을 때이다. 어느 날, 그 학생이 먼저 내게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는 게 아닌가. 그 애가 먼저 부탁하는 순간도 오다니! 내 마음은 금세 환해졌다. 내 지식을 동원하여 열심히 가르쳐 주었고, 그 학생은 그 이후 태도도 달라졌고 도움을 잘 받아들이게 되었다. 화학을 어려워하던 어느 여학생은, 내가 한참 개념을 설명해 주니 이제는 이해하겠다며 고맙다고 눈을 반짝이는데 정말 뿌듯했다. 화학에 자신감이 생기니 수업 시간에도 학생들을 더 적극적으로 도와줄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건 언제나 보람찬 일이었다.  


학생들 학기말 시험이 끝나고 나니, 가을학기는 이제 봄학기로 바뀌게 되었다. 그 사이 더부룩한 머리에 긴 수염의 선생님은 핼러윈 날에 슈퍼 마리오로 변신하여 머리와 수염을 싹둑 자르며 단정하게 변신했고, 학기 마지막 날엔 자신의 애완견인 진돗개를 데리고 왔는데 개가 순하고 귀여워서 학생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진돗개라 더 반가웠지만, 학교에 개를 데려오다니 참 자유롭다 느껴졌다. 아무튼 이 선생님의 장점은 학생들 눈높이에 맞춰서 가르치려 노력한다는 것. 그 수업을 경험할 수 있어서 나도 참 좋았다.   


내가 미처 몰랐던 것이 있었다. 학기가 바뀌면 우리 IA들 스케줄도 바뀔 수 있다는 것. 내 다음 학기 스케줄에는 더 이상 화학이 없었다. 이제 못 들어간다니 아쉬움도 컸지만, 힘든 공부를 안 해도 된다니 홀가분하기도 했다. 잠시나마 화학과 씨름하며 웃을 수 있었던 시간들도 안녕. 잠시나마 수업을 경험할 수 있었다는 것에 만족하며 감사해야지. 이젠 자율학습실에서 올곧게 수학의 길을 가리라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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