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능동태로>
내 첫 논문을 2001년 12월경 썼다. 내 박사과정 지도교수님은 학생들이 첫 논문을 쓸 때 책 한 권씩을 선물했다. "The Elements of Style"이라는 책이었다. 보통 저자의 이름을 따 "Strunk & White"이라고 불리는 책이었다. 그리고는 한 마디 덧붙이곤 하셨다. "꼭 읽어 보고 그대로 하렴."
처음에는 의례히 하시는 말씀인 줄 알았다. 한 번 쓰윽 읽어보니 한국에서 고등학교 때 공부했던 문법책들과 별반 달라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야심 차게 첫 논문을 써서 교정해 달라고 교수님께 갖다 드렸다. 그리고 며칠 후. 인품이 훌륭하셨던 지도교수님은 항상 논문 교정을 연필이나 파란색 펜으로 해 주셨다. 빨간색으로 고치면 학생들이 상처받고 글쓰기에 자신감을 잃어버린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충격은 연필로 교정한다고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내 논문은 연필로 쓴 각종 교정부호와 첨삭 투성이었다. 그리고는 말씀하셨다.
"OO, 네 논문엔 수동태가 너무 많아. Strunk & White에 능동태로 쓰라고 되어 있을 텐데. 꼭 수동태로 써야 할 때가 있어. 하지만 이 경우들은 절대 아냐."
지도교수님께 배운 영어로 글쓰기는 한국에서 배운 것과 정반대였다. 한국에선 과학이란 객관적인 학문이고, 따라서 사람이 아닌 사물이 주어가 되어야 한다고 배웠다.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주관적인 존재이므로...? 그런 발상은 누가 한 걸까? 인간의 존엄성 따위는 인정하지 않는,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우스운 인식이다. 어쨌든 사물이 주어이므로 당연히 영어 문장은 수동태로 써야 한다. 실험은 하는 것이 아니라, 실험되어지는 것이고, 현상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어지는 것이고, 결과는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되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Experiments were conducted. Phenomena were observed. Results were analyzed.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도교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Strunk & White에 뭐라고 나와있지? 글은 짧게 써야 한다고 나오지? 수동태로 쓰면 be 동사를 써야 하고 by도 넣어야 하니 길어질 수밖에 없고 그러니 능동태로 쓰는 게 경제적이라고 나오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과학자에겐 글을 수동태로 쓰는 건 비겁한 거야. 실험, 네가 한 거 아니니? 네가 발견한 거 아니니? 해석하는 건 네 생각 아니니? 그럼 네가 했다고 하고 책임을 져야지. Write actively and take responsibility."
망치로 맞은 듯했다. 내 오피스로 돌아와 지도교수님이 쓰신 논문을 찾아보았다. 맙소사. 정말 그 긴 논문들, 그 많은 논문들에 수동태는 한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었다. 그리고 정말 읽어보니 능동태가 수동태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읽혔다. 지도교수님이 쓰신 어떤 논문은 과학 논문이라기보다 한 편의 짧은 이야기를 보는 것 같았다. 아름다웠다.
"Brevity is the soul of wit. - Mark Twain -"
지도교수님 방 문에 붙어 있는 문장이었다. 글은 능동태로 책임감 있게 써야 한다는 거 외에 짧고 간결하게 써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그리고 두괄식으로 써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변죽을 울리지 말고 바로 결론을 말하고 그다음 그걸 서술하라고 알려주셨다.
그러나 지도교수님의 가르침을 난 완전히 체화하진 못한 것 같다. 20년이 지난 지금, 나의 글쓰기는 당시와는 많이 달라졌다. 가급적 능동태로 쓰려고 하지만 여전히 수동태가 많고, 글은 주절주절 한없이 길어진다. 두괄식과 미괄식 문단들이 마구 섞여 있기도 하다. 핑계를 대자면 비영어권 국가에서 변방의 과학자로, 세계 무대에서 살아남으려다 보니 그렇게 됐다.
능동태로만 쓰니 영어 교정 서비스 회사에서 다 수동태로 바뀌어 돌아왔다. 한국에 있는 영어교정회사들이 대부분 인도에 아웃소싱을 하기 때문에 영어 좀 한다는 인도애들 짓이다. 처음에 몇 번은 나는 능동태로만 쓸 거라고 customized request를 했지만, 매 번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 포기하게 됐다.
한국에 돌아와 독립적인 연구자로 미국에서 박사, 포닥 할 때처럼 짧게 핵심만 담아 논문을 써서 투고하자 다 reject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축적된 연구 성과가 없는 초짜 연구자인 데다가 논문을 심사하는 국제무대에선 내가 nobody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짧게 쓰더라도 이전에 비슷한 주제로 쌓아 온 연구 성과가 있으면 그 토대 위에서 이해를 할 텐데 그런 것도 없이 무조건 짧게만 쓰니 당연히 안 먹히는 거다. 그래서 그 이후부턴 매우 자세히, 따라서 길게 논문을 쓰게 됐다.
또 한국어와 영어가 뒤죽박죽이 되어 우리말 식으로 생각하다 보면 미괄식이 자연스러운 거 같아 미괄식으로 썼다 영어식으로는 두괄식이 맞다고 하니 두괄식으로 썼다가, 문단 사이에 일관성이 없어지기도 했다.
논문이든 그냥 평범한 에세이든 나는 글쓰기를 참 좋아한다. 주변에 논문 쓰기 너~무 싫어요, 글쓰기 너무 힘들지 않아요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보면, 전 아닌데요. 전 연구 결과가 없어서 논문을 못 쓰지 논문 쓰는 거 재미있어요라고 뻔뻔하게 말한다. 물론 잘 쓴다는 말은 아니다. 글쓰기를 좋아하지만 잘 쓰는 건 여전히 너무나 어렵고 힘들다. 그래도 나에겐 글쓰기가 일종의 성스러운 의식이고 고귀한 작업이다. 그래서 내 꿈은 논문을 200편, 300편 쓰기보다 정말 역사에 오래 남을, 두고두고 읽힐 기념비적인 논문을 한 편 쓰는 것이다. 물론 아이디어나 연구 결과도 좋아야 하겠지만 문장 하나하나가 너무나 아름다워 전문가, 비전문가 모두 감탄할 만한 그런 논문. 그런 논문 한 편이면 족하다.
글쓰기뿐만이 아니다. 인생도 한 번이면 족하다. 아름다운 인생을 살고 싶다. 그리고 그 인생은 능동태로만 쓰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