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생들끼리 치고받고 싸울 때>
둘에게서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카톡이 왔다. 실험실 출입 금지 5일 만이다.
"교수님, 이제 얘기할 준비가 된 거 같습니다."
다음 날 10시까지 내 오피스로 오라고 했다.
기철(가명, 남, 32세)이와 나영(가명, 여, 34세)이는 우리 실험실의 유이한 박사과정 학생들이다. 기철이는 이제 막 박사과정 4년을 마쳤고, 나영이는 늦게 공부를 시작해 이제 1년 반을 마친 상태이다.
사실 6일 전 그날은 정말 기분 좋은 하루였어야 했다. 여름방학이 끝나가고 있었다. 내가 여름 방학의 거의 2/3를 아파서 병원과 집에 있느라 학생들을 제대로 못 챙겨서 미안한 마음에, 또 의례히 여름 방학 때는 한번쯤 놀러 가기도 했기 때문에 실험실 차원에서 하루를 제치고 재미있게 놀기로 했다. 과천 서울대공원에 가서 서울랜드파와 현대미술관파로 나눠 재미있게 논 다음 저녁때 서울대공원 캠핑장에 모여 바베큐를 해 먹고 집에 돌아오는, 완벽한 계획이었다.
나는 오후에 현대미술관파에 합류해서 한국근현대미술전을 둘러보고 예약된 캠핑사이트로 먼저 가서 준비를 시작했다. 곧 나영이 차를 타고 코스트코에 가서 고기와 먹거리를 사 오기로 한 서울랜드파 학생들이 도착할 예정이었다. 짐을 받으러 카트를 빌려 캠핑장 입구에서 학생들을 기다렸다. 나영이 차가 들어오고 부지런히 짐을 내려 카트에 실어 캠핑장으로 올려 보냈다.
그런데 기철이가 보이질 않는다.
"아, 옷이 찢어져서 옷을 사가지고 따로 택시 타고 온다고 했어요."
같이 갔던 린아(가명, 여, 25세, 석사과정 2학기)가 대답한다.
"아니, 어쩌다가 옷이 찢어져? 뭐 짐 들다가 걸렸니?"
"... 네."
애들을 올려 보내고 차를 주차장에 세우고 온 나영이랑 캠핑장으로 올라가는데 나랑 눈을 안 마주치고 안색이 좋지 않다. 아니나다를까 무겁게 입을 연다.
"교수님, 저 지금 캠핑 못 하겠어요..."
나중에 얘기를 종합해 보니 늘 그렇듯 시작은 사소한 말에서 비롯되었다. 학부연구생들과 나이 얘기를 하다가 기철이가 자기나 나영이 누나처럼 나이 먹었다고 다 어른은 아니다라고 이야기했고 여기에 나영이가 "나는 너랑 동급 아냐"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영이가 화가 나서 한 말인지 그냥 농담처럼 한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말에 기철이는 또 그럼 자기가 누나보다 못하다는 말이냐며 화가 났다고 했다.
참 별 일 아니다... 그런데 계속 화가 난 두 명이 급기야 코스트코 가는 차 안에서 서로 폭발했다. 기철이는 자기를 무시한다며 화를 냈고 더 이상 나영이와 상종하지 않겠다고 했고, 나영이는 왜 그렇게 화가 났냐며 제발 지금 말해서 풀자고 했다. 코스트코 주차장에서 피하려는 기철이와 잡으려는 나영이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면서 기철이가 팔을 뿌리치다 나영이 차 앞 유리를 깼다. 이런 실랑이는 코스트코 안에까지 이어져 큰 소리가 나면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급기야 기철이는 나영이가 자기를 자꾸 잡으려 한다며 경찰을 부르는 일까지 벌어졌다.
어색한 두 사람을 사이에 놓고 바베큐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다음 날 기철이를 불러 상황을 들어봤다. 기철이는 그다음 날까지도 화가 난 상태였다. 자기는 잘못한 게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누나가 자기 의사를 무시하고 계속 잡아서 옷도 여러 번 찢어졌고 팔에 긁혀 상처도 많이 났다는 것이다.
나영이도 마찬가지였다. 자기는 기철이가 왜 화가 났는지 모르겠고 대화하자는 게 뭐가 잘못됐냐는 것이다. 오히려 큰 소리 내고 자기 차 유리를 깨고, 심지어 경찰까지 불러 난생처음 경찰 앞에서 진술까지 하게 만든 석헌이에게 사과를 받아야겠다는 것이다.
정말 충격적이었다. 무엇보다 나이 30대의 그래도 나름 지성인이라고 하는 대학원생들이 서로 소리를 높여 욕설을 섞어가며 공공장소에서 싸우고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차 유리창을 깨고, 옷을 찢고 할퀴고, 경찰까지 불렀다는데 경악스러웠다. 더구나 이 아이들이 내 학생들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마냥 공부만 하고 연구만 하는 순진한 학생들이 아니었다.
싸우게 된 발단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 말이 싸울 일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서로 간의 불만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풀려고 했다는 게 지도교수로서 도저히 용서가 안 됐다. 그런 아이들이 내 학생일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기철이는 전력이 있었다. 자기를 무시한다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과 자주 트러블을 일으켰다. 그래서 손절한 친구, 후배들도 여럿이고, 한 번은 후배랑 주먹다짐을 한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혼내고, 타이르고, 사과시키고, 어떻게든 둥글둥글하게 만드려고 내 에너지를 쏟았다. 이젠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지쳤다.
둘에게 최후통첩을 했다. 학교에 나오지 마라. 둘 다 본인들이 뭘 잘못했는지 돌아보길 바란다. 충분히 성찰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 건지 계획이 서면 그때 연락해라. 억지로 사과할 필요 없다.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나는 더 이상 너희들을 가르칠 수 없다. 지도교수를 바꾸든, 학교를 떠나든 해라.
정말 둘 다 내보낼 생각이었다. 기철이 입장에서는 4년이나 했는데 학위를 포기하고 나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박사 학위를 받아서 뭣하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다. 어느 조직에서 그렇게 매번 트러블을 일으키는 사람을 좋아하겠나. 나영이 입장에서도 애까지 있는 경단녀가 어렵게 다시 공부할 결심을 하고 입학했는데 이렇게 1년 반 만에 그만두는 게 억울할 거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학위는 고사하고 가정에서도, 아이하고의 관계에서도 문제가 될 게 뻔하다. 이번 기회에 깊이 성찰하고 근본적으로 변하길 바랐다.
하루, 이틀, 사흘, 시간이 흘렀고 두 사람이 빠진 실험실은 조용하기만 했다. 꼬맹이 석사과정 학생들과 밥 먹고 회의하고 연구 얘기도 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5일째 연락이 왔다.
다음 날 아침에 셋이 모였다. 기철이부터 자신이 잘못했던 일들을 담담히 풀어갔다. 앞으로 변하겠다고 했다. 나영이도 무조건 대화하려고 억지를 부리지 않겠다고 했다. 미안하고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주고 기다려줘서 고맙다고 한다.
기철이에게 앞으로는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화를 내지 않겠다고 다짐하라고 했다. 대화로 풀라고 했다. 이젠 어떠한 폭력도 용인하지 않겠다고 했다. 나영이에게도 화성인, 금성인처럼 남자들은 화가 나면 회피하려는 성향이 있으니 그걸 억지로 대화하자고 강요하면 안 된다고 했다. 때로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자신의 문제해결방법만이 옳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다행이다.... 돌아와 줘서. 그리고 무엇보다 본인들의 잘못을 깨닫고 인정하고 변화하겠다고 해서.
며칠 후 그룹미팅. 공지사항에 아래 내용을 추가했다.
[폭력예방교육]
* 연구실 내 폭력 발생 시, 무관용 원칙에 따라 경중/원인에 관계없이 즉시 제적 처리함.
* 폭력행위는 아래 사항을 포함함.
- 언어폭력: 고성, 욕설 등으로 위협하는 행위
- 물리적 폭력: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파손하여 위협하는 행위
- 신체적 폭력: 자신 혹은 상대방의 신체에 상해를 가하는 행위
- 성폭력: 상대방에게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거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침해하는 행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