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혹은 흑백
웃을 수 있던 어느 날, 나에게 물었다. 너는 야행성이야? 나는 대답했다. 아무래도 야행성인 것 같아. 누군가는 내게 말했다. 너는 밤에 일하고 낮에 잘 수 있는 직업을 찾아야겠구나. 나는 대답했다. 낮에는 자고, 밤에는 놀고 싶어.
문득, 얼핏 주워 담았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말이 그 누가 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인간은 일하는 것이 적성에 맞지 않다는 말, 그 말이 꽤 내게 위안을 주었다. 나는 놀고 싶은 게 아니라 일하는 게 적성에 맞지 않은 것이야. 나를 토닥토닥 쓰다듬어주었다.
점점 말하기는 어려워지고, 매일 밤 나의 곁에는 우울이라는 이름이 함께한다. 고민을 해야 하지만, 고민을 하기 싫은 이 게으름. 답은 없지만, 누군가 문제를 풀어주면 좋겠다는 이기심. 나는 그런 것들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왜 나를 빚은 누군가는 내게 노력이나 성실이라는 이름의 재능을 불어넣지 않으셨을까. 나의 재능은 아주 보잘 것 없는 망상과 자기위안이 전부라는 사실을 깜박 하신 걸까.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나에게 복권 1등 번호를 불러주시면 아무 원망 하지 않을 자신 있는데.
옷이 찢어졌다. 새벽은 생각이 많아지는 시간이다. 내 귀에 속닥거리던 누군가의 이야기들도 잠시 잠에 청하고, 오히려 내가 타인을 찾아나서는 시간. 그들이 보여 지는 모습을 감상하다 보면 나는 끝도 없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때로는 평론가마냥 쳐다보기도 하고, 때로는 글자를 곱씹어 다시는 뱉어내지 않을 모양새로 입안에서 굴린다. 한 음절씩 먹어치우며 나는 그와 동시에 생각이라는 것을 멈춘다. 텍스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음절단위로 조각난 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어. 몇 번이고 반복해서 씹어 먹은 후에서야 나는 겨우 끼워 맞춰 문장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내게 글이란 때론 포기해버리고 싶은 퍼즐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문장을 써내려가는 의무는 필요악일까. 몇 번이고 고치고, 지워보지만 끝내 마음에 차지 않은 문장을 나는 사랑해야할까. 그렇게라도 사랑해야하는 걸까. 사랑 할 수는 있을까. 타인에게 비춰지는 나를 재단하기에는 근래의 나는 나에게 관심이 없다. 그들의 나는 어쩌면, 혹시나, 사랑이 존재하는 사람일 수도 있겠지. 그러나 이 순간 깨달은 것은 얼마나 야멸찬 사람인가에 대한 것이다. 동시에 얼마나 모순적인지 알까. 이 글, 최소한 이 단락 속의 문장들 중 마음에 차는 문장은 하나도 없음이.
고양이들이 떼를 지어 울부짖는다. 가끔씩은 어린 아기가 우는 소리로 착각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절망이 운다면 저런 소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캄캄한 밤이 아니라 이른 아침에 맞이하는 절망은 더 섬뜩하다. 절망은 언제나 도사리고 있겠지. 나는 귀를 막고 잠을 청해본다.
그렇게 그럴 듯 해지는 조차도 버거운 순간, 나는 새로운 페이지를 꺼낸다.
그렇게 한 단락씩 사라져가는 것이다.
*사진을 비롯한 모든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