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본토와는 너무 달랐던 시칠리아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여행의 목적은 평소 나의 삶과는 다른 삶, 다른 문화, 다른 사람들을 경험하고 배우며, 궁극적으로는 자기 성찰을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여행을 통해 휴식과 마음의 여유를 찾고, 짜릿한 즐거움들을 맛볼 수 있었다면 더할 나위 없는 행복한 여행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칠리아라는 지중해에서 가장 큰 섬은 (우리나라 제주도의 약 14배나 된다고 함) 상업적으로 성공할 만한 진정한 여행의 요소를 모두 갖춘 여행지라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이 나의 일주일간의 시칠리아 여행 후에 말하고 싶은 시칠리아에 대한 애정 섞인 첫 번째 표현이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제법 큰 그 섬 안에 한 껏 휴양을 즐길 수 있는 수많은 아름다운 모래 해변, 세계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활화산과 같은 다양한 대자연, 이런 자연이 주는 짜릿한 감동과 더불어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다양한 문화가 동시대에 공존하며, 더할 나위 없이 입과 몸을 달구는 훌륭한 음식문화가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시칠리아란 여행지에 대한 내 생각은, 이렇게나 훌륭한 관광의 최적 요소를 갖춘 여행지가 왜 아직까지 로마나 베네치아 같은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지 못하고 있나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이다.
실제로 시칠리아에선 유럽 여행지마다 볼 수 있는 중국인 관광객을 에트나 화산에서 10여 명 본 게 전부였다. 한국인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고, 동아시아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본 적도 없었다. 오히려 시칠리아 현지 사람들이 우리를 가끔씩 쳐다볼 정도였다. 보통 동아시아, 특히 중국인 여행자의 숫자를 보고 유럽 현지 관광지의 상품 개발이나 상업적 진척도(?)를 비교해 보는 습관이 생겨서 여행하는 모든 도시를 비교해 보곤 한다.
시칠리아는 이탈리아 본토에서 온 관광객이 대다수인 것 같았다. 아마도 여름이라 더욱 그럴 것이다.
이렇게 아직까진 시칠리아라는 숨은 보석이 평가를 못 받는 이유를 나름대로 해석해 보았다. 첫째는 시칠리아를 대표하는 부정적인 이미지인 마피아의 존재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직도 마피아는 시칠리아 인의 생활 속에 존재한다.(지금은 90년대에 비해 세력이 많이 약화됐지만 말이다. 몇 달 전 뉴스에도 팔레르모 시내에서 전직 마피아 보스가 살해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기나긴 시간 동안 법과 질서를 대신했던 마피아의 존재 때문인지, 질서의식이나 사람들의 직업의식(관광업 종사자도 말이다.)이 서유럽(이탈리아 북부 포함) 스탠더드에 많이 미치지 못한다. 사실 마피아는 관광객을 상대로 뭔가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어서, 외국인이 만나기는 어렵다. 만난다 한들 마피아인지 알 수도 없고 말이다. 요즘엔 난민 대상으로 이들을 유럽으로 이동시키는 중개인을 하며 신종 사업을 늘리고 있다고 한다.
질서의식은 중부 유럽 사람보다도 못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나의 경험과 더불어 내 동료(슬로바키아인)가 2주 전에 시칠리아를 다녀와서 이야기 해준 경험 때문이다.
여행자로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현지 운전자들의 질서 없는 막무가내식 운전 태도였다. 그리고 바가지 상술도 아직 많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시간을 지키지 않는 대중교통 시스템(동료의 말에 따르면 버스를 2시간 반이나 뙤약볕에서 기다려야 했고, 하는 수 없이 다음날 차를 렌트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과 호텔이나 상점에서의 바가지는 제법 있다. 내가 겪은 바로는 4번의 호텔 중 무려 2 군데서 택스를 속여 받으려 했다. 아이들은 호텔에 묶을 때 택스(지방세)의 대상이 아니거나 할인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체크아웃할 때 어른의 택스로 요구했다. 내가 따지면 그때서야 빼주는 식이다.
팔레르모 시내에서의 운전은 내 일생을 통해 가장 힘든 운전경험이었다. 보통 큰길이 아니면 중앙선이나 차선이 지워져서 거의 없고, 차선 이용 또한 가변적이다. 서유럽에선 1대가 다닐 만한 폭의 도로에 1대에서 2대가 들어갔다 나갔다 한다. 오토바이는 어찌나 많은지, 중앙선을 침범하며 넘나드는 오토바이가 대부분이다. 일반 차들도 중앙선 침범은 일반적이다. 이중 주차가 된 곳이 많기 때문이다. 오토바이 운전자들도 반 이상이 시내에선 헬멧을 쓰고 있지 않았다. 아이들 둘을 오토바이에 태우고, 헬멧도 안 쓰고 운전하는 사람조차 있었다.
도무지 운전에 양보란 찾아볼 수 없었다. 가장 최악의 경험은 팔레르모 시내에서 공사 중인지 사고인지, 차로를 막아 모두 우회하여야 하는 도로에서 발생했다. 난 정상적으로 내 차선(앞차로 볼 때 아마도 차선이라고 느껴지는)을 가고 있었지만, 계속 옆 차들이 들이밀어 나를 차선 밖으로 내몰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직진해야 하는 내 차를 좌회전 쪽 차선으로 계속 밀려나게 만드는 것이었다. 계속해서 끼어드는 모든 차들이, 너무 붙는 것을 꺼려하는 내 약점을 이용해, 계속해서 밀어내는 것이다. 그 와중에서도 조금의 틈만 있으면 여지없이 오토바이들이 끼어들었다. 어떤 차는 인도로 올라가 다시 앞으로 끼어드는 황당한 상황도 발생했다.
보행자들은 아무데서나 불쑥 튀어나온다. 옆도 보지도 않고, 느릿느릿 걷는다.
시내의 경험은 그러했고, 한 번은 셀리눈테 라는 도시의 외곽도로에서의 황당한 경험도 있었다.
아무런 사전 경고 표지도 없이, 갑자기 도로 중간을 막아 놓고 있었다. 그것도 조그만 산을 넘어야 하는 도로에서 말이다. 공사하는 사람도 없고, 그냥 차를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 가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내가 표지판을 못 본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현지 사람들로 보이는 차 2대도 돌아 나가는 것이었다. 마음속으론 '여긴 내가 아는 이탈리아가 아니야'를 계속 되뇌었다.
그나마 내 렌터카가 감지 센서와 후방 카메라가 달린 차여서 아마도 사고가 나지 않은 것 같다. 도로의 많은 차들이 사고의 흔적들을 갖고 있었다. 그나마 그 차도 처음 내가 렌트 해 놓은 차는 너무 작다며, 렌터카 회사 직원이 심한 권유를 계속하여 사양이 좋은 차로 187유로를 (그것도 처음엔 128유로만 더 내면 된다고 하더니, 택스가 붙어서 187유로라고 결재할 때 돼서야 이야기함) 더 내고 업그레이드 한 차이지만 말이다.
나중엔 내장된 내비게이션과 센서의 도움을 많이 받아,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내가 가져간 내비게이션 하나로만은 부족했다. 2대의 내비게이션을 동시에 가동해야만 안정된 마음으로 운전할 수 있었다. 라운드 어바웃이 겹쳐지게 된 곳이 많아 빠져나올 때 정말 헷갈렸기 때문이다.
시칠리아를 쭉 돌아보려면 섬이 크기 때문에 렌터카가 꼭 필요한데, 운전이 쉬운 것이 아니란 단점이 있다.
시내에선 운전을 하지 말고, 도시 간 이동시만 차를 움직이는 게 가장 편하게 이동하는 방법이 될 것 같다.
이런 단점에도 시칠리아라는 섬을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유는 이 섬이 가진 독특한 문화적 매력 때문이다.
섬 하나지만, 이 안에 여러 문명과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 시칠리아이다. 마치 여러 나라를 여행한 듯한 느낌이 든다. 하루는 해변에서 일광욕과 휴식을 취하고, 다음날은 아르키메데스가 만든 풍차가 아직도 돌아가는 염전에 가고, 오후엔 산 꼭대기 중세 마을에 간다. 다음날엔 스페인풍의 화려한 건축물(스페인은 건축에 실용성보다 거대한 화려함을 추구한다)의 문화를 도시에서 느끼고, 오후엔 아랍과 비잔틴이 섞인 노르만인이 세운 성당에 가 보고, 그 옆 아랍풍의 회랑을 돌아보면 아랍의 어느 유적지에 와 있는 듯하다. 다음날엔 유명한 시칠리아 출신의 이탈리아 오페라를 감상하고, 저녁엔 북아프리카 음식으로 미각을 돋운다. 그리고 , 다음날엔 아테네보다 어쩌면 더 잘 보존되고, 더 거대한 그리스 신전들을 돌아본다. 오후엔 로마 원형경기장 유적을 보고,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한 그리스 반원형 극장도 돌아본다. 밤이 되면 스페인 어느 도시 광장에 온 듯, 화려한 스페인 풍 광장에서 멋진 해산물 파스타를 먹는다. 그리고 다시 해변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엔 등산화를 신고 해발 3천 미터가 넘은 활화산에서 15년 전에 큰 폭발이 있었던 분화구를 돌아보고, 세계에서 가장 활동적인 활화산에서 가스가 분출되는 광경을 사진에 담는다.
이런 식의 여행이 가능한 곳이 시칠리아이다. 실제 이런 코스로 이번 여행을 했다.
사실 시칠리아를 온전히 이탈리아라는 시각으로 보면 이해하기 힘든 점이 많다. 왜냐면 고대 로마시대라는 이탈리아 공통의 역사(사실 이탈리아 역사가 아닌 대부분 유럽이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으니, 이건 당연한 결과이다.)를 겪은 이후 이탈리아 본토와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라는 공통 역사를 가지게 된 것은 가리발디 장군이 시칠리아 마르살라에 상륙해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군대를 무찌른 1860년에 들어서의 일이니까 말이다. 이탈리아의 일원이 된 것은 고작 160년 전부터의 역사일 뿐이다.
간략하게 복잡한 시칠리아의 역사를 살펴 보자면, 시칠리아는 지중해의 거점인 이 섬을 갖고 싶어한 수많은 민족과 국가들의 침입을 받았다.
시칠리아는 기원전 735년경부터 그리스인들이 도시국가를 세우게 된다. 북아프리카 출신으로 무역에 능한 페니키아인들은 시칠리아를 침략의 목적이 아닌 무역의 거점 항구로 개발했지만, 그리스인들은 시칠리아를 침략하고 정착하게 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일찍부터 고유한 발전된 문명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일반시민의 삶은 그다지 풍족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리스의 땅이 돌과 바위로 된 지형이라 농작물을 키우는데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앞선 기술로 공예품 등을 수출하여 살아갔기 때문에, 비옥한 시칠리아로 많은 그리스인이 거점을 옮기게 된다. 한 때는 그리스 식민지였던 시칠리아가 그리스 본토보다 인구가 많았다고 한다. 실제로 그리스에 가 보면 산이 대부분 회색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시칠리아는 황토색이다. 산도 그렇고, 신전도 그렇다. 시칠리아에서 나는 석회암으로 그리스 신전을 지었기 때문이다. 그리스 고린도인들은 시라쿠스에 식민지를 세우는데, 이 도시는 BC415년 그리스의 지배하에서 독립을 선언한다. 그리고, 근대의 미국이 그러하였듯 시라쿠스도 그리스 본토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한다. 시칠리아 식민지의 발전은 남쪽 강자였던 카르타고(지금의 튀니지)를 자극하게 되고, BC480년에 카르타고의 하밀카르 장군의 지휘 하에 30만 대군이 침략하지만, 실패하고, 이후 BC 409년 그 유명한 (코끼리를 타고 알프스를 넘어 로마군에게 승리한) 하밀카르 장군의 조카인 한니발 장군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시칠리아는 카르타고와의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시라쿠스는 끝까지 로마에 항전을 하였는데, 이 시기 등장하는 인물이 (그리스인으로 알고 있는) 아르키메데스이다. 그는 시칠리아 시라쿠스 사람으로 위대한 수학자이며 탁월한 무기 발명가이기도 했다. 그의 무기로 한동안 시라쿠스는 로마군의 침입을 막을 수 있었다. 결국 아르키메데스의 노력에도 시라쿠스는 로마에 패배하게 된다. 승리한 로마 장군인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셀루스도 아르키메데스의 기술적 업적에 경의를 표하며 그를 살려두려 했지만, 로마의 병사들은 아르키메데스를 죽이고 만다. 로마제국의 지배하에서도 다른 본토 제국 도시들과 달리 시칠리아는 로마 시민이 아닌 이민족으로 노예로 분류되었다.
로마시대 이후, 시칠리아는 북아프리카의 반달족의 침략을 받게 되지만, 535년 비잔틴제국의 벨리사리우스 장군은 시칠리아에 시민의 환영하에 이 섬에 들어오게 된다. 비잔틴제국의 장군은 아랍족, 사라센족의 연합군으로 시칠리아를 기반으로 대륙으로 진출하고자 하지만, 이를 기점으로 들어온 사라센인이 827년 시칠리아를 지배하게 된다. 당시 모든 교회는 모스크로 바뀌게 되고, 이슬람 영향권에 들어간다. 아랍인의 지배를 통해 무역과 농업이 번성하게 된다. 아랍에서 들여온 오렌지, 사탕수수가 재배되고 관개농업이 발전하게 된다. 팔레르모는 이때부터 200년간 스페인의 코르도바와 더불어 아랍세계의 중심지로 발전한다.
이후 1053년 유럽 북부 노르만족은 사라센을 축출하고, 1072년 로저 1세를 시작으로 노르만 왕국이 시작하게 된다. 로저 1세와 2세의 시기가 시칠리아의 전성기로 그 당시 유적을 팔레르모 왕궁 등에서 볼 수 있다. 그 당시 처음으로 시칠리아에 법전이 도입되었고, 많은 비잔틴양식의 교회들이 건축되었다. 그래서, 아름다운 노르만-아랍 건축물들이 현재까지 남아있게 된다.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합리적인 행정시스템으로 당시 아랍인을 등용하였고, 시칠리아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하지만, 노르만 시대도 후세에 이르러 복잡한 왕권 분쟁으로 독일계 왕권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프랑스 앙주 가문이 차지하게 된다. 1282년 프랑스 압정에 시달리던 시민이 봉기하게 된다. 시민의 봉기 뒤에 스페인 아라곤이 있었으므로, 스페인의 아라곤과 프랑스 앙주 가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다. 결국 스페인의 승리로 500년간의 스페인의 본격 통치가 시작된다.
이 기간 동안 1669년 에트나 화산의 폭발과 1693년 대지진으로 많은 도시가 폐허가 된다. 스페인은 바로크풍의 많은 화려한 건축물을 지진으로 무너진 노토, 라구사, 모디카 지역에 짓게 되는데, 이 건물들이 현재 건축사적으로 중요한 관광상품으로 중부 시칠리아에 위치하고 있다. 그 당시 스페인은 남미에서 들여오는 물자로 상당한 부를 축적한 상태였으므로, 대단위 건축 공사가 가능하였다고 한다. 1734년 스페인이 어려워지자, 프랑스 부르봉 가문이 시칠리아를 다스리게 된다. 나폴레옹이 1799년 나폴리를 점령하였지만, 시칠리아로는 내려오지 않았다. 1815년 나폴레옹이 패하자 부르봉가의 왕인 페르디난드는 다시 나폴리와 시칠리아 왕국(2개의 시칠리아)의 왕이 되었으나, 시칠리아 시민사이엔 독립과 본토와의 통일을 염원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드디어 1860년 4월 팔레르모의 혁명 위원회는 부르봉 왕가에 대항한 혁명을 일으킨다. 이때를 놓치지 않은 이탈리아 왕국의 가리발디 장군이 천명의 군대로 1만 5천의 부르봉 군대를 이기게 된다. 부르봉 왕가에 대한 압정에 시달리던 시칠리아 시민들은 이탈리아 사보이 왕가에 통합을 원하게 된다. 이탈리아 왕국의 엠마누엘 2세 왕이 드디어 시칠리아의 통합 이탈리아 군주가 된다.
시칠리아엔 정복했던 자들의 다양한 문화가 현재의 관광자원으로 고스란히 남아있다. 정복자들 문화는 유적, 건축물, 요리,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섬이면서 여러 문화를 간직한 다양성의 결정판. 무엇보다 지중해의 강렬한 태양을 가진 바다와 대자연의 재앙이자 축복인 활화산 에트나를 가진 시칠리아의 매력을 내 여행 경험담을 통해 되새겨 보고자 한다.
앞으로 이 메거진에 올릴 글들은 시간을 거슬러 시칠리아에 남겨진 정복자들의 문화유산과 풍요로운 자연을 도시별로 되짚어 볼 것이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도 가장 감각적이라는) 시칠리아 요리와 새로운 미각에 눈을 뜨게 할 세계적인 시푸드 맛집 등을 소개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