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과 노르만 지배 시기의 시칠리아 여행
이탈리아에 속해 있지만, 이탈리아와는 전혀 다른 섬 시칠리아.
아랍과 노르만의 왕국이 존재했던 시칠리아의 시기를 거슬러 올라가 본다.
현대 시칠리아의 주도인 팔레르모는 아랍과 노르만의 역사적 건축물과 문화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도시이다.
팔레르모는 로마어 '항구'에서 기원한 말로 BC 8세기에 고대 지중해 무역의 절대 강자 페니키아 무역상들이 처음 항구로 개발했던 곳이다. 그 이후, 카르타고를 거쳐 BC 254년 로마에 귀속된다. 535년 비잔틴 제국의 손을 거쳐, 831년 아랍 사라센인의 점령 뒤, 북아프리카와의 활발한 무역 중심지로 비로소 아랍세계 중심도시로 급속한 발전을 이루게 된다.
아랍인들은 북부 노르만인들을 '늑대'라 부르며 두려워했다고 한다. 노르만인들의 난폭함과 빠른 공격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노르만 정복자 Robert Guiscard(1015 ~ 1085)년 1053년부터 시작하여 6년 후에 칼라브리언 비잔틴 세력과 롬바르드족을 완전히 정복하고 새로운 지중해의 강자로 자리 잡는다. 그는 바티칸과의 협상을 통해 1059년 펄기아와 칼라브리아 공작의 칭호를 받고, 아랍의 사라센인들을 시칠리아에서 몰아내 다시 기독교화시키기로 바티칸과 약속한다. 기독교와 이슬람 간 세력 다툼으로 같은 지역의 종교가 지배자에 따라 여러 번 바뀌는 게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 약속을 위해, 그의 동생 로저 1세(1031 ~ 1101)는 1061년 시칠리아 메시나를 성공적으로 입성한다. 그리고 수도인 팔레르모로 곧장 진격하지만, 잘 정비되어 있는 사라센과의 전쟁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십 년 동안의 기나긴 전쟁을 통해 1072년에야 팔레르모를 완전히 그의 손아귀에 넣게 된다.
드디어 시칠리아의 노르만왕조(1072 ~ 1194)가 탄생한 것이다.
로저 1세는 현명한 왕이었기 때문에 자신들보다 앞서 있던 사라센의 생활방식과 문화에 감탄하고 아랍의 양식을 없애지 않고, 계승 발전시키기로 한다. 엄청난 돈을 들여 아랍 양식 위에 비잔틴 양식을 가미한 성당과 왕궁을 건축 또는 개축한다.
노르만 지배자는 관용의 정신을 기반으로 삼았다.
노르만, 아랍, 그리스인이 모두 함께 번영을 누리는 강력한 시칠리아를 건설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노르만이 지배하던 시기의 팔레르모는 그 당시 유럽 그 어느 도시보다 세련되게 문화가 융합된 코즈모폴리턴 도시로 재탄생하게 된다.
도시에 기독교 교회가 지어지고 있었지만, 모스크에선 여전히 무슬림들이 자신의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었다.
팔레르모에선 스페인 시기에 지어진 바로크 건물들도 많은데, 웅장하고, 약간은 허풍스러운 양식의 바로크 건물 사이에서도 아랍-노르만 양식의 관용의 건물들이 묘한 대비를 이루며 아름답게 공존하고 있다.
스페인의 과장된 가톨릭 신앙에 심취된 허풍과 신과 인간에게 진솔한 관용의 미를 보여주는 성스러운 분위기의 아랍-노르만 건물들은 진정 다른 감동과 느낌을 준다.
아마도 시칠리아에서만 느낄 수 있는 다양한 문화코드 아닐까?
연대기적으로 다른 과거의 두 시대를 동시에 한 곳에서 만나면서 복잡해지는 혼란의 상황에서 이질적이지만 조화로운 다양성을 느끼게 된다.
'난 지금 이탈리아가 아닌 시칠리아에 와 있는 것이다.'
그의 관용의 왕국에선 그리스, 아랍인들은 계속해서 자신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었다. 또한 아랍의 행정가, 건축가, 관료들도 계속해서 노르만 왕정에서 일할 수 있었다. 그의 사후, 그의 아내 Adelasia가 집권하다 아들인 로저 2세 (1095 ~ 1154)가 왕위를 물려받는다.
로저 2세 역시 현명한 군주였다. 그의 시기의 시칠리아는 다른 유럽 어느 나라보다 학문과 예술분야에서 앞서 있었다. 그는 또한 그 당시 가장 효율적인 다문화에 적합한 행정을 펼쳐 다른 유럽 국가들의 부러움을 샀다. 또한 그는 그의 왕국을 시칠리아 아래의 섬 '몰타'와 남부 이탈리아, 북부 아프리카 일부까지도 영토를 확장시켰다.
노르만의 문화 융성 시기를 목도할 수 있는 곳이 바로 팔레르모 시내의 노르만 궁전과 대성당이다.
그리고, 팔레르모 시내에서 차로 약 30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곳에 아랍-노르만 양식의 세계적 걸작 '몬레알레 대성당'이 있다.
팔레르모 시내의 대성당은 1185년부터 건설된 아랍-노르만 양식의 건축물이다.
수세기 동안 다양한 문명과 접하면서 여러 양식이 덧붙여진 복합 양식의 성당이 되고 말았다. 팔레르모의 대주교였고 영국 왕 윌리엄 2세의 교사이기도 했던 영국인 Walter of the MIll에 의해 지어졌다. 위대한 건축물인 몬레알레 대성당으로 인해 그의 세력이 줄어드는 것을 염려한 대주교가 팔레르모에 몬레알레 못지않은 대성당을 짓기로 한 것이다. 9세기의 모스크(모스크 이전에는 기독교 Cahpel로 지어진 곳이었다.) 위에 대성당을 지은 것이다.
또 하나, 팔레르모 시내의 주목할 만한 아랍-노르만 건축물은 노르만 왕궁과 팔라티나 Chapel이다.
지금은 시칠리아 지방의회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로 원래 9세기에 지어진 아랍 왕궁을 노르만 식으로 만든 것이다. 아랍의 이전 시기엔 로마의 성터로 이용된 곳이라고 한다. 궁전 안엔 팔라티나 채플이 있는데 내부를 처음 보는 순간 그 화려함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이 교회는 로저 2세가 1130년에 지은 건물로 왕궁 2층에 있다. 이 곳은 팔레르모 관광 중 가장 중요한 코스이기도 하다. 시칠리아 여행 전체를 통틀어 한 곳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을 본 곳도 바로 이 곳이었다.
대리석 바닥과 나무로 된 muqarnas 천정은 아랍-노르만 건축물의 진수를 보여준다. 또한 아랍식 벌집 모양의 조각은 두 융합 문화의 복합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체플 내부 빼곡히 비잔틴 양식의 모자이크로 장식된 천정과 벽면은 누구나 탄성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이 훌륭한 모자이크는 로저 2세가 1140년에 그리스에서 비잔틴 모자이크 화가들을 특별히 데려와 작업토록 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나무로 된 천장도 놓쳐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기독교 교회 안에 이러한 아랍 양식의 장식을 한 곳은 유일하다고 한다. 이러한 특이성으로 인해 로저 2세가 사실은(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무슬림의 종교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슬람의 문양이 교회 곳곳에 많이 드러나 있다.
왕궁의 외부공간은 이슬람의 건축양식이 더욱 잘 드러난다.
또한 왕궁으로 사용되던 곳이라 여러 곳의 생활공간도 존재한다.
각 룸마다 특색이 있고, 화려한 천장 모자이크 장식이나 벽화가 존재한다.
어떤 방에선 보수작업이 한창이다.
어떤 화려한 건축물과 유물도 후세인의 세세한 관심과 유지가 아름다움을 지속시키는 필수 요소이다.
벽화 중엔 독수리가 토끼를 움켜쥐고 있는 모자이크도 있는데, 왕권의 상징을 표현했다고 한다. 동물들의 모자이크로 벽을 장식한 것이 이채로왔다.
이제 아랍-노르만 양식의 최대 걸작인 몬레알레 대성당을 소개할 차례가 되었다.
몬레알레는 고지에 위치한 곳으로 마을 자체가 아담하고, 소박하지만 뭔가 성스러운 느낌이 감도는 곳이었다.
몬레알레 대성당은 시칠리아 노르만 시대의 걸작 건축물이다. 시칠리아를 방문한 사람은 놓치지 않아야 할 핵심 관광지이다. 시칠리아 노르만 왕 윌리엄 2세는 할아버지 로저 2세 때 건축된 팔레르모의 팔라티나 채플이나 체팔루(영화 시네마 천국 해변 촬영지로 유명한 휴양지)의 성당을 능가하는 대성당을 짓기로 결심한다. 그는 팔레르모 남서쪽 8 Km 떨어진 몬레알레 언덕에 노르만, 아랍, 비잔틴 요소를 가미한 최고의 성당을 만들게 한다. 이 성당은 현재 중세 이탈리아를 통틀어 최고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성당의 정교한 예수 모자이크 성화는 비잔틴 미술을 설명하는 미술 교과서에 항상 나온다고 전직 미술교사 출신답게 집사람이 귀띔해 준다.
당시 이 정교한 모자이크를 만들기 위해 시칠리아와 베네치아의 유능한 장인들을 총동원하였다고 한다. 10년간의 작업으로 1184년에 완공한다. 벽과 천정에는 42개의 성경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노아의 방주를 표현한 부분은 꼭 봐야 한다. 쌍안경을 준비해 하나하나 이야기를 세심히 살펴보는 관광객도 보였다.
이 성당은 무료입장이 가능하다.
성당 옆에 아랍 양식으로 건축한 회랑이 있는데(입장료를 받지만, 전혀 아깝지 않음) 윌리엄 왕도 아랍 건축물을 좋아했던 게 틀림없다. 회랑에 앉아 작은 분수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를 듣고 있자면 아랍인들의 정교함을 볼 수 있다. 아마도 그들은 자연을 이용해 감성을 업그레이드하는 데 탁월한 사람들이었음을 느낄 수 있다. 아랍식 건축물은 항상 흐르는 물을 이용하는데, 물 떨어지고 흐르는 소리까지를 고려해 건물에 퍼지도록 만들어 놓는다.
왕과 귀족들을 위한 소리를 통한 힐링 장치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물론 근거 없는 내 추측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아치를 받치고 있는 여러 개의 기둥은 모자이크 패턴으로 같은 게 하나도 없다. 각 기둥마다 뭔가 기이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이 세밀함의 극치, 어느 기둥 하나 같은 모양의 부조가 없다.
특히 이 곳은 우리가 방문한 날 너무도 한적하여, 집사람과 둘이서 적막한 이 곳에 정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스페인 그라나다 알람블라 궁전 못지않은 아랍 양식 건축물의 진수를 고요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게 이 곳의 장점이다. 알람블라는 관광객이 너무 많아 사진 찍기도 어려울 정도이다. 금세 다른 사람에게 좋은 자릴 내주어야 하고, 늘 단체 관광객에게 떠밀려 다니는 지경이니 말이다.
우리 부부는 중세 어느 아랍의 왕족이라도 된 듯, 물 떨어지는 소리만 들리는 최고의 힐링 공간에서 정서 순화를 하였다.
정말 문을 닫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아이들을 호텔에 남겨두고 오지만 않았다면, 아마도 해가 질 때까지도 그곳에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시칠리아 여행 전체를 통틀어 가장 고즈넉한 힐링과 성찰의 시간이었다.
다음 글은 최대 전성기 노르만 시대를 지나, 500년간 지배하며 건축사적으로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스페인 지배 시기의 시칠리아를 만나보러 갈 차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