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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피아 이야기, 시칠리아 여행기 외전

Mafioso, Sicily

by 준비된 여행

부자나라는 돈 씀씀이가 달랐다. 스페인에서 볼 땐 변방인 시칠리아에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그들의 부와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막대한 돈을 썼다.

아마도 그들의 지배 시기에 대지진과 화산 폭발이란 자연의 재앙을 거치면서, 시칠리아 재건을 위해 최선을 다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20170724_100037.jpg 팔레르모의 콰트로 칸티

팔레르모 시내엔 크게 비교가 되는 부분이 있다. 화려한 팔레르모 관광지를 조금만 벗어나 도심으로 들어가면 2차 대전 때 파괴된 슬럼지역이 많다. 그곳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고, 파괴된 건물들이 이 긴 시간 동안 복구가 안되었단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2차 대전 후 심한 상처를 입은 팔레르모(무솔리니가 마지막 항전을 위해 숨어든 곳이 팔레르모라 더욱 연합군의 공격을 많이 받았다.) 재건을 위해 이탈리아와 EU는 막대한 돈을 투자하지만, 그 돈은 시칠리아 마피아의 수중에 들어가고 만다.

시칠리아는 또한 이런 어두운 면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스페인은 자연재해를 복구했지만, 현대의 이탈리아는 인간으로 인한 전쟁의 피해를 아직까지도 복구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마피아는 시칠리아를 대표하는 부정적 이미지이다. 마피아가 두려워 시칠리아의 화려한 관광자원에 비해 단체 관광객이 적은지도 모르겠다. 물론 시칠리아의 마피아는 영화화되어 할리우드 제작사나 감독, 배우에게 큰돈을 벌게 해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미국 파라마운트사 제작 영화 '대부'시리즈 말이다.

영화 대부에 나오는 마피아 가문이자 지방 이름인 꼴레오네는 실제 시칠리아에 존재하며, 마피아 관광코스로 개발되어 있다. 실제 이 마을에서 마피아가 생겨나기도 했고, 전설적인 마피아 두목도 잡히기도 하였다.


'마피아'란 말은 무려 110년 이전에 실제 존재했던 조직, 계층을 지칭하는 공식적 단어였다. 마피아로 알려진 'mafioso'는 최초 15세기에 등장한 말이다. 15세기 이후, 팔레르모와 같은 대도시의 발달과 상업의 발달로 많은 귀족들이 영지를 떠났다. 또한 스페인의 이주정책에 의해 농부들이 강제로 새로운 도시로 떠나게 된다. 이는 농촌지역 경작지와 수확물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귀족들이 도시로 떠나면서 그들의 농지를 관리인에게 맡겼다. 관리인들은 토지를 농민들에게 임대해주고 경작료를 받았는데, 이때 농민들에게서 돈을 회수하기 위해 고용한 사람들이 무장을 한 현대의 갱과 비슷한 농민의 한 무리인 'mafiosi'였던 것이다. 그들은 어떤 문제든 해결해 주는 불법적 해결사 같은 역할을 하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은 중간에서 돈을 가로채는 등 큰 혼란을 야기한다. 하지만 그 당시 지방관료들은 이 집단을 관리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마피오소는 지역 농민들의 두려움과 존경의 대상(개인문제 해결사 역할)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들은 400년간 존재하는 조직화된 불법(법을 초월하는) 집단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침묵의 규율(code of silence, omerta)을 만들었다. 이 규율은 현재 마피아에까지 내려오는 것으로, 침묵의 규율을 깨뜨리는 사람에겐 (내부에서 일어난 일을 발설하거나, 당한 일을 알리는 경우) 당사자나 가족에게 피의 복수가 실행되었다. 이 규율이 마피아를 시칠리아에서 오랜 기간 뿌리 뽑지 못하게 한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검사나 경찰에 조사를 받아도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 어떤 사실도 발설하지 않기 때문이다.


2차 대전 전까진 시칠리아 농촌지역에 국한되던 마피아의 활동은 대도시로 확장하며 건설이나 프로젝트성 기금 등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1900년대 초까지 시칠리아는 마피아의 절대적 통제하에 있었다. 시칠리아의 경찰, 판사, 정치가들도 모두 마피아의 손아귀에 있었다. 하지만 1922년 로마에서의 독재자 무솔리니 등장은 시칠리아 마피아에 큰 타격을 입히며 시칠리아에서 미국으로 마피아 세력이 이주하는 도화선이 된다. 반면 마피아의 등살에 힘들어하던 시칠리아 인도 비참한 삶을 버리고 신대륙으로의 이주가 크게 증가한다. 무솔리니는 자신 이외에 시칠리아를 지배하는 세력(무솔리니의 등장 당시, 시칠리아의 주요 관료들은 마피아 출신이거나 그들과 관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가차 없는 무솔리니의 마피아 숙청은 시칠리아 내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고, 이들을 신대륙으로 이주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미군 등 연합군 승리는 무솔리니 이전 세력의 재등장을 의미했으며, 마피아는 다시 시칠리아 인의 생활무대에 다시 등장하게 된다. 연합군은 마피아를 정치범으로 착각해 석방하는가 하면, 시장으로 마피아를 임명하는 등 실수를 저지른다.

1953년엔 미국과 시칠리아를 대표하는 6개의 마피아 가문(cosche)이 회합을 하며 첫 번째 시칠리아 위원회를 결성한다. 그들은 60년대 초 신종 사업인 마약거래를 통한 급속하고 효율적인 사업 확장에 매진한다. 이 위원회의 장인 꼴레오네 출신의 Luciano Liggio는 미국과 시칠리아 조직의 중요한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60년과 70년대를 통해 마피아는 마약거래를 통한 급속히 부를 축적하고, 그들의 경쟁적 욕심은 마피아 가문 간에 이권을 확보하기 위한 다툼으로 점철된다. 이 기간 동안 수백 명이 죽어나갔다.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경찰국장인 Carlo Alberto Dalla Chiesa의 암살사건이다. 그는 중앙정부에서 반 마피아 활동을 위해 파견되었는데, 1982년 팔레르모에서 매복하고 있던 마피아에게 살해당한다.

이 사건은 조사를 위해 시칠리아 검찰과 치안판사에게 광범위한 권한을 주는 계기가 된다. 이때 4년간의 목숨을 건 치열한 조사를 하고 후에 영웅으로 추앙받는 시칠리아 출신의 Giovanni Falcone 검사가 등장한다.

그는 미국에서 최초로 큰 마피아의 가문의 보스인 Tommaso Buscetta를 체포하고 회유를 통해 '침묵의 규율'을 깬 마피아 조직 내부 상황을 파헤치는 마피아 수사의 큰 전환점을 마련한다. 그의 마피아 내부 이야기 발설에 이탈리아 전 사회에는 경악하였고, 많은 마피아 간부와 보스들을 체포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팔코네 검사는 시칠리아에서 나고 자란 사람으로 어린 시절부터 마피아의 해악을 몸소 체험했다. 그는 시칠리아를 마피아로부터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계속되는 신변의 위험에도 목숨을 건 채, 사회 변화를 추구하였던 시칠리아의 진정한 영웅이었다. 하지만 그는 1992년 5월 부인 및 경호원과 함께 팔레르모에서 마피가 설치해 놓은 폭발물로 살해당한다. 불과 몇 달 전 뉴스에서 그의 동상이 목이 잘린 채 발견되었다니, 아직도 그의 꿈은 완성된 것이 아닌가 보다.

팔코네 검사의 뒤를 이어 그의 친구인 용감한 치안 판사 'Paolo Borsellino'가 조사를 이어받지만 두 달도 되지 않아, 보르셀리노 판사도 차량 폭발로 안타깝게 마피아에게 피살되고 만다.


1980년대와 90년대에 많은 사람들이 도시 한복판에서 피살되었다. 팔레르모에서의 살인 사건은 흔한 일상이었다고 한다. 주말에 가족과 함께 희생된 가족 친지의 묘지에 소풍을 가는 일이 흔한 일상의 픙경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두 영웅의 반 마피아 활동에 대한 헌신은 시칠리아 시민들을 각성시키는 계기가 된다. 팔레르모 시민들은 정부에 대책을 강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하고, 침묵의 규율을 드디어 깨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친다. 영웅 2명이 드디어 시칠리아 시민을 움직인 것이다. 이탈리아 정부는 1992년 7월 7천 명의 군대를 시칠리아에 파병하고, 법 집행권 등 강력한 권한을 부여한다. 시칠리아 경찰들도 대부분 가족이 마피아에게 희생된 사람들이 많아 적극 협조하게 된다. 강력한 정부군의 활동으로 1986년 500명의 최고위층 마피아가 검거되고 재판에 넘겨진다. 347명이 유죄 선고를 받고 19명이 종신형에 처해진다. 1993년엔 capo di tutti(보스 중의 보스)인 Salvatore Riina가 잡히고, 팔코네 검사 등의 살해죄로 종신형에 처해진다. 1998년 정부는 군대를 시칠리아에서 철수시키고 마피아와의 전쟁이 승리했음을 선포한다.


현대사회에서도 마피아가 시칠리아에서 오랫동안 활개를 쳤던 이유로 현직 정치인과의 커넥션이 가장 중요하게 꼽히고 있다. 마피아와 연루된 거물 정치가가 많았고, 전직 내무부장관도 재판에 회부된 적도 있었다.

역사적으론 제2차 대전 후, 마피아는 기독교 민주당과 손을 잡는다. 기독교 민주당이 오랫동안 시칠리아와 이탈리아의 수권 정당이었는데 이들은 초기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마피아와 손을 잡았고, 후에 많은 이권을 마피아에게 넘긴다. 정치와 마피아의 검은 커넥션은 시칠리아를 수렁으로 몰아넣게 된 것이다. 후에 개혁적인 기독민주당의 시칠리아 정치인들이 나왔지만 마피아의 핍박을 받거나 가족이 희생되는 안타까운 상황이 발생된다.


마피아 최대 보스 살바토레 리나의 체포 이후, 감옥에서도 그의 통치는 계속되지만 그의 후계자인 Leoluca Bagarella가 1995년 잡힘으로써 세력이 크게 약화된다. 2006년 20년의 도피생활 끝에 시칠리아의 대부로 알려진 Bernado Provenzo가 체포되고, 이듬해 그의 후계자마저 체포된다.


2013년에 1993년 마피아에 의해 피살된 가톨릭 반 마피아 운동의 첫 희생자이며 창시자격인 Don Giuseppe Puglisi신부의 시복식에 무려 5만 명의 시칠리아 시민이 참가했다고 한다. 이제야 시칠리아 시민은 그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제대로 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2105년 말 경찰 조사에 의하면 'Revenge 5'라는 조직의 조직원 37명을 카타니아에서 체포했는데, 긴급구호를 하는 NGO의 이름으로 마약거래를 하고 구급차를 마약을 운반하는데 이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지난 조사에 의하면 70%의 소규모 상공인이 마피아에게 보호비(pizzo) 명목으로 갈취당했다고 하는데, 요즘엔 보호비를 거부하는 상인들을 돕기 위한 Addiopizzo란 단체에 가입하기도 한다고 한다. 이 단체는 보호비를 거부하는 상인들을 돕는 일을 한다고 한다.


20170723_173400.jpg 팔레르모의 반 마피아 기념비

시칠리아 마피아는 아직도 현존하는 중요한 국제 범죄 조직의 하나이며, 시칠리아에서도 사라진 것은 아니다.


어쩌다 보니 마피아 이야기가 주요한 스토리가 되어, 스페인 시대의 영광을 간직한 시칠리아에 대해선 다음 편에 이어가도록 해야겠다.



다음 에피소드로 이어지 글은 스페인의 영광, 시칠리아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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