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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영광, 시칠리아

당대 최대 부국 스페인의 흔적 찾아다니기

by 준비된 여행

시칠리아에서의 스페인 지배 시기의 흔적은 어느 시기보다 가장 눈에 많이 띈다. 지진으로 인한 재건축도 영향도 있었지만, 스페인 바로크 양식의 웅장함과 화려한 장식 때문에 눈에 잘 띄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Catania 바로크양식 건물


시칠리아의 주도인 팔레르모는 크기나 볼거리 면에서 시칠리아 관광의 핵심도시이다. 다른 곳보다 넓은 이 도시를 편하게 보는 방법은 원하는 곳에서 내려 버스로 이동이 가능하고, 오디오 가이드가 있는 홉 온 앤 홉 오프(Hop On Hop Off) 버스가 될 것이다. 주요 관광지를 24시간 동안 관광하는 데는 참 편리한 수단이다. 세계 유명 도시엔 어디나 있는 상품이기도 하다. 우리 가족여행에선 늘 이용하는 여행 방법이다.

팔레르모 구시가의 중심엔 Quattro Canti(4개의 코너란 뜻)가 있다. 정확히 4방향에 원을 중심으로 동일 구조의 4개 건물이 위치하고 있다. 네 방향이다 보니 하루 종일 태양이 위치를 바꿔가며 비춘다. 그래서 '태양의 극장'이란 별칭이 있는 곳이다.

이 건물들은 17세기에 왕립 건축가 Giulio Lasso가 설계한 것이다. 각 건물은 3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이하게도 도리아식인 1층, 이오니아식의 2층, 맨 위층은 혼합식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각 층마다 석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1층엔 각 계절을 표현하고, 2층은 스페인의 당대 지배자를 3층엔 팔레르모의 성인이 장식되어 있다.

콰트로 칸티처럼 차량이 통과할 수 있는 훌륭한 건축물이 팔레르모에 또 하나가 있다. 바로 노르만 왕궁 근처에 있는 Porta Nuova(새로운 문)이다. 이 문은 Cassaro란 구시가의 메인도로로 들어가는 입구이기도 하다. 이 문은 스페인 왕 찰스 5세가 1535년 현재 튀니지의 수도인 Tunis를 점령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문이라고 한다.


원래는 독수리의 문으로 불리는 건축물로 처음 세웠다고 하는데, 팔레르모 시민들은 부르기 쉽게 새로운 문으로 불러서 현재의 이름으로 고착화되었다. 1584년 건축 완료된 이 문은 1667년 화재로 파괴되었고 1669년 Gaspare Guercio가 다시 재건하였다.

전형적인 개선문 형태로 건축된 이 문에는 찰스 5세에게 정복된 무어인이 처량한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팔레르모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는 Fontana Pretoria(일명 수치의 분수)이다. 중앙 분수 주변에 Nymph, Triton 그리고 여러 신들의 조각상이 분수 주위에 배치되어 있다. 이 조각들이 모두 누드 상태라 수치의 분수란 별칭을 가지고 있다. 이 분수는 피렌체 조각가 Francesco Camilliani에 의해 1554년과 1555년 설계되었다.

각도에 따라 멋진 사진 연출이 가능한 곳이 이 분수이다. 여러 각도에서 전라의 훌륭한 인체를 보며 인간 신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을 해 보았다. 마치 고대 그리스나 르네상스 조각가의 시각과 미학 같은 것을 조금이나마 이해했다고나 할까? 그만큼 아름답게 만들어진 조각상들과 분수대이다.


스페인 시대의 것은 아니지만 팔레르모를 대표하는 웅장한 건물이 하나 있다. 영화 대부 3의 총격씬이 있는 엔딩 장면을 촬영한 마시모 극장이다. 완성하는데 20년이나 걸렸다는 이 거대한 근대 건물은 이탈리아에선 가장 크고, 유럽에서 2번째로 큰 오페라극장이다. 아쉽게도 대부분 유럽 도시에선 한여름엔 오페라 등 공연이 없어서 유명한 이탈리아 오페라를 감상할 기회는 없었다.


최근엔 씨네오페라를 본 적이 있었는데, 베르디의 오델로 공연이었다. 실제 공연을 각 도시의 극장에서 실시간으로 상영하는 방식이다. 최근 내가 좋아하게 된 독일 테너 Jonas Kaufmann의 오델로 초연이 런던에서 있었는데, 이 공연의 실황중계였다. 중간 쉬는 시간도 동일하므로 너무 늦은 시각에 끝나긴 했지만, 돈과 시간이 아깝지 않았던 공연이었다. 문제는 이탈리어 원어 오페라라 영어로 번역이 될 것을 예상했는데, 현지어인 슬로박어로 자막이 나와서 내용을 추측하며 보는 수밖에 없었다. 재미있던 사실은 실제 공연은 아니지만, 극장에 온 사람들(중년 이상이 대다수)이 대부분 실제 공연을 가는 것처럼 잘 차려입고 극장에 왔단 것이다. 아마도 공연의 감정을 배가시키기 위해서 그랬을 것이다.


영화 대부 3에서도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공연이 마시모 극장에서 있었는데, 그 장면에 대한 생각과 유명한 그 오페라의 간주곡(대부 3 엔딩곡으로도 나옴)의 음률을 흥얼거리며 둘러보는 마시모 극장에선 모든 오페라 가수가 한 번쯤은 이 무대에 서보고 싶어 한다는 말이 실감 났다.



카타니아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오페라 작곡가 벨리니의 고향이다. 벨리니 박물관을 둘러보며 언젠가 이탈리아에서 노르마 공연을 꼭 보리라 마음먹었다. 마리아 칼라스가 부르는 오페라 노르마 중 '정결한 여신'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오페라곡이다. 칼라스의 음색과 곡의 애절한 선율이 언제 들어도 전율을 느끼게 하는 곡이다. 노르마는 마리아 칼라스를 최고의 소프라노로 전 세계에 각인시킨 작품이기도 하다.

Vincenzo Bellini는 34세의 짧은 삶을 산 천재 작곡가였다. 훌륭한 외모로 파리 사교계 여성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벨리니는 할아버지, 아버지가 작곡가이며 음악교사인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천재답게 여섯 살 때부터 작곡을 시작했다. 그는 1826년 25세의 나이에 성공적인 데뷔 공연을 나폴리에서 가진다. 그 당시 오페라는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의 벨칸토 창법이 유행하였는데, 극적인 표현보단 아름다운 소리와 연주 효과에 중점을 둔 방식이다. 그래서 가수들의 성량, 화려한 기교가 중요시된다. 벨리니는 벨칸토의 최고 걸작 '청교도'를 비롯하여 '노르마', '해적', '캐퓰렛과 몬테규', '몽유병자'등 서정적인 걸작들을 남겼다. 젊은 나이에 파리 근교에서 급성장염으로 병사한 벨리니는 고향 카타니아의 성 아가타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벨리니가 잠들어 있는 카타니아의 성 아가타 대성당

본격적으로 벨리니의 고향 카타니아의 스페인 영향을 돌아보자.


카타니아 싼 프란세스코 광장에 있는 Belliniano박물관은 1801년 태어난 벨리니가 살았던 집으로 지금은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있다. 그의 친필 메모, 사진, 피아노, 데스마스크가 전시되어 있다.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는 색다른 의미를 가지기도 하는데, 카타니아의 가장 유명한 파스타가 이 오페라의 이름을 따라 만든 'pasta alla Norma'이다. 맛도 물론 훌륭했다.

프랑스에서 죽은 벨리니를 41년이 지난 1876년 안치한 곳이 바로 성 아가타 대성당이다. 인상적인 대리석 파사드를 받치는 2개의 기둥은 카타니아의 고대 로마 원형경기장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카타니아 수호성인인 아가타의 유물도 보관되어 있다.

성 아가타 대성당


카타니아 관광의 핵심은 용암으로 만든 코끼리상이 있는 두오모 광장이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다.

구시가 중심광장으로 대리석 바닥에 용암과 석회암이 대비를 이루는 건물들이 조화롭게 펼쳐져 있는 멋진 광장이다. 시라쿠스 두오모 광장과 더불어 시칠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억에 영원히 남기고 싶은 광장이었다. 광장 중심엔 Fontana dell'Elefante라는 코끼리 동상 분수가 있다. 1736년 건설된 것으로 순진하게 웃고 있는 용암으로 만든 카타니아의 대표 아이콘 코끼리의 모습이 카타니아를 찾는 관광객들을 기쁘게 한다. 코끼리는 이집트 오벨리스크를 등에 이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코끼리는 8세기 마법사 Eliodorus의 소유였다고 한다. 그는 사람을 동물로 만들어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오벨리스크는 에트나 화산의 변덕스러운 기질을 누그러뜨리는 마법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전해진다.

카타니아 두오모 광장의 코끼리 분수

광장에서 공원과 어시장이 있는 아래쪽으로 가다 보면 19세기에 만든 Amenado분수를 만날 수 있다. 나폴리 조각가 Tito Angelini가 만든 이 분수는 아메나도강의 물을 이용한다는데, 이 강은 고대 그리스 도시를 만들었을 때는 대지를 흐르는 강이었다는데, 현재의 모습은 분수 아래 작은 개울과 같은 모습이다.

카타니아 도시의 역사는 기원전 72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현재 구시가의 모습은 대부분 17세기 중엽에 완성되었다. 1669년 에트나 화산의 폭발과 1693년 대지진은 카타니아를 뒤덮으며 약 12,000 명이 희생당하고 도시가 파괴되는 아픔을 겪었다. 자연 재앙으로 인한 카타니아 재건을 위해 건축가 Giovanni Vaccarini와 Stefano Ittar는 새로운 광장과 바로크풍 도시를 설계하게 된다. 현대에 들어선 2천 년대 초반에 많은 복구를 하여 시칠리아 어느 도시보다 깨끗하고 아늑한 느낌을 준다.


카타니아의 명물은 어시장인데, 우리가 방문한 날은 일요일이라 시장이 열지 않았다. 무척이나 아쉬웠다. 장이 열리면 코가 길게 뾰족한 황새치나 새우, 조개 등 싱싱한 해산물을 구경하고 맛볼 수 있다고 하는데 아쉬웠다.

일요일이라 어시장이 열리지 않아 안타까웠다.


Porta Uzeda는 Etnea거리와 항구, 어시장을 연결하는 문으로 1696년 카마수트라 공작에 의해 건설되었다. 문의 이름은 1689년부터 1696년까지 시칠리아의 총독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붙여졌다고 한다.

Uzeda문


Etnea 거리는 카타니아 구시가의 중심거리로 두오모 광장에서 에트나 화산까지 연결된다고 한다. 이 거리 남쪽엔 Universita광장이 있는데 커피숍이 즐비하다. 대학 건물도 눈에 띈다.


Piazza Universita

에트네아 거리에 있는 Bascilica della Collegita (엘리모시나의 산타마리아 성당으로 불리기도 함)은 1768년 완공된 시칠리아 바로크의 대표작이다. Angelo Italia가 지진으로 파괴된 카타니아에 바로크식으로 지은 대표적 건축물이다.




염전과 와인이 유명한 시칠리아의 서쪽 도시 트라파니에서 조금 더 가면 Eryx산 해발 750m 지점에 세워진 천공 도시 Erice가 있다. 이 마을에서 내려다보는 시칠리아 서부의 경치는 일품이다.

또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제과점인 'Maria Grammatico'가 있는 곳이다. 물론 우리도 다양한 과자류를 사서 모두 맛보았다. 가격, 맛 모두 훌륭하다. 과자의 종류와 주인 할머니의 삶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시칠리아 음식 편에서 설명할 예정.

마리아 그라마티코 제과점

아름답고 작은 천공의 도시 에리체(Erice)는 작년 겨울 스페인에서 만났던 하얀 천공 도시 '프리힐리아나'를 떠올리게 한다. 좀 크고 잘 정비된 프리힐리아나 같단 느낌이 든다.

싼 주차료와 인포메이션에서 나눠주는 지도도 큰 도움이 된다. 시칠리아 같지 않게 정직한 관광객을 위한 서비스와 고요함이 맘에 드는 마을이었다.

마을 초입엔 두오모 성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성당은 스페인 바르셀로나 출신의 시칠리아 왕 프레데릭 3세가 1312년 짓게 한 것이라고 한다. 내부는 네오고딕 양식으로 1865년 변경했다고 하고, 원래 양식의 채플은 잘 보존되어 있다.

마을을 모두 천천히 둘러보는데 3-4시간이 소요된다. 이 마을에 가려면 구불구불한 산길을 차로 한참 올라가야 하지만, 대도시와 또 다른 느낌의 한적하고 경치 좋은 시칠리아를 느끼는 데는 꼭 추천하고 싶은 마을이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도시는 고대 그리스 시대 최대 도시 시라쿠스였다.

시라쿠스는 그리스 시대 설명에서도 이야기한 바와 같이, 그리스 아테네나 코린트를 능가하는 큰 도시국가였다. 기원전 734년 코린트인이 오르티지아 섬에 상륙하면서 그 찬란한 역사가 시작된다.

시라쿠스와 오르티지아 섬을 연결하는 다리에서 한 컷

오르티지아 두오모 광장의 화려함은 이미 영화 말레나를 통해 증명되었고, 지금은 시칠리아의 핫 플레이스로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시칠리아의 상징과 같은 곳이다.

시라쿠스 오르티지아섬의 두오모 광장

시라쿠스(Syracuse)는 본토와 다리로 연결된 작은 섬인 오르티지아(Ortygia)로 구성되어 있는데 핵심 관광지는 아무래도 오르티지아이다. 우리 가족은 날씨가 무척 더워 해변에서의 일정을 많이 늘리기로 하고, 시라쿠스 쪽은 관광을 아예 생략했다. 많은 유럽인들은 낮에 해변에서 편안하게 늘어진 휴식을 취하고 밤에 시내에 잘 차려입고 나오는 것 같다. 특히 한여름엔 그런 식의 관광이 가능한 곳은 한낮의 땡볕 더위도 피할 수 있고 효율적인 관광이 될 듯하다. 물론 실내의 출입시간이 제한되어 있는 곳이 관광목적으로 중요하다면 밤에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오르티지아 섬이 바로 밤에 보기에 정말 좋은 곳이다. 밤 10가 넘었는데도 시칠리아 대표 관광지답게 많은 인파로 북적인다.

두오모 광장은 원래 고대 그리스 시절 아크로폴리스가 있던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가톨릭 성당 건축물에도 도리아식 기둥이 눈에 많이 띈다.

대성당 건너편에 있는 17세기 대주교 궁전은 Alagonina도서관 건물로 쓰이고 있으며 진귀한 13세기 고서를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대주교궁전

이 광장에서 가장 화려한 바로크 건물인 두오모는 기원전 5세기엔 아테네 여신을 모신 신전이었다고 한다. 성 요한 바울이 복음 전파를 위해 시라쿠스에 머물렀는데, 이로 인해 성당으로 역할을 전환하게 된다. 1693년 대지진 이후 건축한 바로크식 파사드는 Andrea Palma에 의해 1728-53년에 덧붙여진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시라쿠스의 두오모

광장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Chiesa di Santa Lucia alla Badia가 나타난다. 이 작은 성당은 카라바찌오(Caravaggio)의 걸작 Burial of St. Lucy(성 루치아의 매장)이 보관되어 있어 세계적인 명소가 되었다. 밤에 도착해서 작품을 감상할 수는 없었지만, 대신 거리공연으로 재미있는 인형극을 볼 수 있었다. 정말 정교한 손놀림으로 다루는 꼭두각시 인형은 살아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Chiesa di Santa Lucia alla Badia

성 루치아는 시라쿠스의 수호성인이다. 전설에 의하면 루치아는 그녀 어머니의 기적적인 치유를 경험하며 자신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기독교로 개종한다. 그리고 갖은 협박에도 그녀는 신앙을 지킨다. 그녀는 매춘굴로 추방당하는 형을 받지만, 그녀가 서 있던 곳에서 어느 누구도 그녀를 움직이게 할 수 없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목에 칼을 찔려 그 자리에 쓰러지고, 그 자리에 세워진 것이 지금의 성당이라고 전해진다.

당대 최고의 화가 카라바찌오는 몰타의 감옥에서 1608년 탈출하여 시칠리아로 숨어든다. 그는 친구인 로마의 Mario Minniti의 도움으로 시라쿠스에서 제단화를 그리며 살아갈 수 있었다. 카라바찌오는 1608년 교회에 매장된 시라쿠스의 성인 산타 루치아의 그림을 그리는데, 이 그림이 바로 이탈리아 최고의 걸작 '성 루치아의 매장'이다.

성당벽엔 카라바찌오의 이름이 선명하다.

오르티지아 두오모 광장을 지나 바다가 있는 남쪽으로 더 내려가면 신비로운 호수인 'Fountain of Arethusa'를 볼 수 있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요정 Arethusa가 있었던 곳이 지금의 연못이라고 전해진다. 고대 시라쿠스의 수호신인 님프 Arethusa는 바닷속 낙원인 고향을 떠나 지금의 땅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 전설은 후대 많은 작가들의 작품 소재가 된다. William Wordsworth의 시나 John Milton의 작품들이 그러한 것 들이다.

Fountain of Arethusa

이로써 내가 다녀왔던 도시를 중심으로 스페인 지배 시기의 시칠리아 문화유산을 되돌아보았다.


역사가 있는 곳에 스토리가 있고, 스토리가 있는 곳에 관광객이 붐빈다. 어떤 작은 장소라도 그곳에 내려오는 전설이나 그곳에 살았던 유명인사와 연결하여 문화상품이 만들어진다면 조상들의 문화유산을 가장 잘 이용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물론 시간과 정성을 들여 유산을 보존하고 유지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문화유적과 휴양지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시칠리아와 같은 곳은 바로 최상의 관광자원을 가진 셈이다.


이젠 시칠리아의 대자연으로 다시 돌아가 보려 한다. 다음 편은 대자연이 준 선물 트라파니의 염전과 내가 다녀온 여러 곳의 해수욕하기 좋은 모래 해변이다. 여름 휴양을 느긋하고 싼 가격에 즐길만한 멋진 휴양지를 소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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