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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 Feb 24. 2020

죽어가는 졸업학년이 광합성을 한다는 것

200223

어제는 지은이 생일이라 저녁에 나가서 축하해주고, 오늘은 브루클린에 살고 있는 민정이네 초대를 받아서 오래간만에 햇빛도 쐴 겸 일찍이 나왔다. 사실 학기 중에는 주말에 돌아다니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다. 약속이 있으면 쉬지 못한 채 다음 주를 시작하게 되기 때문에 집에서 자주 쉬는 편인데 이틀을 연달아 외출하는 것은 정말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브루클린을 가기 위해서는 L트레인을 타야 하는데, 주말에는 배차간격이 20분이기 때문에 시간을 항상 잘 확인하고 다녀야 한다. 오늘은 집에서 가장 가까운 L 트레인 역이 공사 중이기 때문에 다른 에비뉴로 넘어가서 탔다.


브루클린에서 민정이 집으로 걸어가다가 본 예쁜 꽃이 늘어진 가게. 최근 몇 주간 날씨가 안 좋았는데 오늘은 햇빛도, 날씨도 아주 좋았다. 나시만 입고 다니는 사람도 봤는데 정말 그럴 날씨는 아니었다. 기껏해야 최고 온도가 13도였는데. 가끔 보면 외국인들에게 날씨 개념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된다.

생각보다 잘 신어지는 코르테즈, 여름에 교복처럼 입는 연청바지, 미국에서는 처음 개시한 핑크색 니트. 항상 갈색 머리를 고수하느라 머리색이 푸딩처럼 반은 검은색, 반은 갈색이었는데 깔끔하게 검은색으로 맞췄더니 조금 안 어울리던 옷들도 입을 수 있게 되었다. 갈색머리를 고집해왔는데 다들 흑발이 나은 것 같다고 말하니 조금 힘 빠지는 것 같기도. 그래도 결국은 잘 어울린다는 이야기라서 기분은 좋다!

사실 민정이네 바로 갔어야 했는데 지나다니다가 목업으로 쓸 만한 장소를 찾아서 찰칵. 이렇게 사진 찍은 것들은 가끔씩 내 과제에 유용하게 쓰이기도 한다. 이렇게 아무 곳이나 사진 찍고 돌아다니다가 너무 늦게 도착해서 전화가 왔다. 민정이는 내가 길을 잃은 줄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자의적 방랑이었는걸?

도착하자마자 보인 빈티지한 예쁜 컵. 요즘은 이런 레트로 한 느낌의 컵의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나도 하나쯤은 가지고 싶은데 6월에 또 이사를 가야 해서... 1년 치 집이 구해지면 예쁜 화분이나 컵 하나 정도는 놔두고 싶다. 둔탁한 느낌의 큐브 모양 컵도 예쁘지만, 개인적으로는 저런 성배 모양의 컵이 놔두었을 때 분위기 있어 보이고 예쁘다는 생각이 든다.

물 담은 유리그릇의 빛 번짐과 물 그림자를 좋아한다.

나와 현정이가 도착해서 민정이의 요리를 도와 같이 만드는 줄 알았는데 미리 세팅되어있어서 예상 밖의 호화로운 대접을 받았다.

맛있는 것을 더하면 더 맛있는 것이 된다는 불변의 진리를 오늘도 깨달았다. 새우와 차돌, 갈비만두가 들어간 엄청나게 호화로운 떡볶이였는데 생각보다 매콤해서 더 맛있었다. 음식 할 때 간을 안 보고도 간이 맞다니, 놀라운 민정이.


예쁜 겁과 그릇, 특이한 손잡이의 포크와 함께


차돌 떡볶이를 다 먹고 나서 배부르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민정이가 좋아하는 베이커리에서 사 왔다면서 치즈케이크와 블루베리 파이, 누네띠네 맛에 크림 필링이 있는 빵을 디저트로 내왔다. 사육당하는 느낌이란 이런 걸까... 그리고 민정이는 나랑 현정이가 놀러 온다고 해서 그릇도 새로 구매했다고 해서 감동적이고 고마웠다. 상냥한 사람.



그러고 나서는 MBTI 테스트 및 자존감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재미있는 것은 T와 F의 성향 차이였는데, 어째서인지 내 주위 사람들은 전부 ENF-들로 이루어져 있다. 하긴, 똑같으면 싸우기나 하지. 조금은 다른 사람들이 모여야 재미있으니까.

민정이 방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랏소. 불청객이 들어오면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주먹질을  것만 같아 방문을 다시 살포시 닫았다. 민정이 허락을 받고서야 다시 마주함. 낯선 사람 앞에서도 비웃음을 잃지 않고 초지일관한 태도가 그의 강인함을 증명한다.

내가 민정이에게 제발 성불시켜달라고 부탁하는 그녀의 곰인형. 낡은 육체에 영혼이 갇힌 불쌍한 곰돌이... 하지만   인형들  실세이며 혼자  평수 1평을 홀로 쓰는 갑부이기도 하다.

그 이후로는 민정이가 초등학생 때부터 모은 귀여운 스티커 북을 구경했다. 민정이의 친구 중 한 명이 한심한 눈으로 보았다고 했는데 나는 어린이 때부터 수집욕이 있는 어린이였기 때문에 그 마음이 이해가 간다. 나도 아마 한국 집 창고에 가면 귀여운 문구류가 모아져 있을걸.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언제나 칭찬받아 마땅하다. 한 가지만을 생각해서 모은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니까. 아무튼 민정이의 코 묻은 스티커를 몇 개 강탈해서(사실은 민정이가 자진해서 준 것) 내 아이폰 뒤에 붙였다. 순식간에 아주 귀여워진 내 아이폰.

느지막이 현정이와 민정이네 집을 나와 과제를 하러 학교에 갔다. 하지만 오늘 나도, 현정이도 아이디어가 생각이 안 나서 제대로 하지를 못했다. 그걸 우리는 '과제 시도'라고 부른다. 마음만은 벌써 과제를 끝낸 지 오래지만 진전은 1% 정도였던 것 같다. 디자인 과제는 아이디어가 생각날 때까지 절대 끝나지 않는 숙명 같은 존재. 몇 시간 정도 무엇을 할지 생각하다 깔끔하게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와 나영이와 함께 야식으로 쯔유와 미역, 파를 넣은 냉가락국수를 해 먹었다. 얼음이 있었다면 조금 더 맛있었을 텐데! 그저께와 어제, 오늘의 나는 너무 바쁘게 살았다. 쉬지 못하고 현실을 다시 살아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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