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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 Sep 23. 2020

비움의 미학, 디아 비콘 < Dia : Beacon >

Museum in New York

어느 화창한 9월의 아침, 뉴욕 시티에서는 조금 떨어진 디아 비콘을 다녀왔습니다. 디아 비콘은 분명히 현대 미술을 다루고 있지만 모마와는 분위기나 결이 전혀 다른 곳이기도 합니다. 모마가 도시의 조각 일부를 떼어 낸 느낌이라면, 디아 비콘은 숲 속 어딘가에 사람이 만든 비밀정원의 잔해 같은 느낌이랄까, 현대 미술과 자연이 온전히 맞닿아있는 그 경계를 관찰할 수 있는 곳입니다.


디아 비콘에 가기 위해서는 먼저 맨해튼 내의 그랜드 센트럴 역으로 가야 합니다. 빈티지하면서 웅장한 그랜드 센트럴 역에서 업스테이트 뉴욕으로 가는 North 라인의 Beacon역으로 가는 기차표를 끊어 한 시간 반 정도, 왼쪽에 바로 강을 두고 내리 달리다 보면 도시의 정서와는 먼 역에 도착합니다. 어쩐지 서브웨이 샌드위치 표지판 같기도 합니다.



역에서 내려서 10분 정도 표지판을 따라 걷다 보면 Dia Beacon을 가리키는 회색 간판이 있습니다. 꽤나 삭막한 색상인 회색이 테마 색이네?라고 생각되는데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쩐지 디아 비콘 건물이 원래는 삭막한 공장 건물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미니멀리즘을 테마로 하고 있어서 모노톤으로 정한 것일까요?

 

Dia Beacon, Riggio Galleries, Beacon, New York. Photo: Bill Jacobson Studio, New York @디아비컨 공식 홈페이지


디아 비콘은 디아 예술 재단 (Dia Art Foundation)에서 2003년 5월에 나비스코 ('오레오' 회사) 박스 프린팅 공장의 건물을 개조해서 지은, 생각보다 지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미술관입니다. 외형과 내부 전부 많이 바꾸지 않아 지하와 2층이 있는, 낮은 건물에 건조한 분위기의 창고 분위기를 지닌 구조입니다. 미니멀리즘이 가득한 이 곳은 정원마저도 완벽한 수직과 수평을 이루는, 직선의 미학이 가득한 곳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정원마저도 미니멀리즘을 따르고 있어, 하늘과 대비되는 잘 다듬어진 정원의 나무들이 몬드리안의 캔버스 같기도 합니다. 어쩌면 저는 이 삭막한 공장 건물과 어우러지는 지극히 자연적인 정원도 디아 비콘의 정신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사람이 만든 공장을 자연과 소통하게 만든 디아 비콘의 건물, 그리고 자연의 생물인 나무를 사람의 손을 거쳐 깎아내 인공적으로 만든 사람이 만들어 낸 정원. 기이한 경계를 만들어 조화를 이루는 이 풍경이 조형미를 탐구하는 현대 미술의 정신에 너무나도 어울리는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 뮤지엄 입구에 들어가면 벽면을 가득 채우는 앤디 워홀 (Andy Worhol)의 < Shadows >를 만나게 됩니다. 캠벨 수프 캔이나 메릴린 먼로, 바나나 등 명확한 대상이 있던 앤디 워홀의 기존의 작품들과는 달리 섀도는 아크릴 붓터치 만으로 이루어낸 추상화입니다. 영화, 그림, 사진, 실크스크린 등 앤디 워홀이 했던 다양한 시도들의 요소를 응집한 종합적인 작품으로 의미가 있다고 하네요. 자세히 보면 붓터치가 하나하나 달랐지만, 멀리서 보았을 때는 그의 실크스크린 연작을 보는 듯 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또한 재미있는 점은, 앤디 워홀이 당시 의도했던 공간을 그대로 재현해 내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객을 압도적으로 둘러싸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가운데 있자니 거대한 빛과 어둠의 프리즘에 둘러 쌓인 느낌이었습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영화를 보면, 황야의 마녀를 왕궁으로 불러 사방에서 빛을 쏘아 힘을 잃게 하는 장면이 있는데 마치 그런 빛의 물결에 휩싸인 황야의 마녀가 된 기분이 느껴집니다.



마치 천연 염색 공장에서 실험적으로 뽑아낸 원단 같은 작품도 있었습니다. 샘 길리엄의 < Double Merge >입니다.



샘 길리엄 (Sam Gilliam)의 거대한 회화 작품은 천장으로부터 늘어져 있었는데요, 샘 길리엄은 캔버스를 사용하지 않는 회화인 서스펜디드 페인팅(Suspended Painting) 작가입니다. 벽이나 천장에 부착되지 않은, 말하자면 캔버스 안에 담겨있지만 프레임을 벗어난 캔버스입니다. 마르셸 뒤샹이 그 유명한 소변기를 작품으로써 세상에 내놓은 이후로부터 나온 - 기존의 관습과 사고방식을 거부하고 뒤집어 생각하는 반(反) 형식,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 그 자체를 미술이라고 생각하는 과정 미술 (Process Art)과 캔버스에 붓칠 대신 물감을 부어 '얼룩(Stain)'을 남기는 개념의 스테인 페인팅 (Stain Painting) - 대표적인 작가로는 잭슨 폴록이 있습니다 - 의 모든 요소들을 결합해 나온 것이 서스펜디드 페인팅이라고 하는데요, 사실 샘 길리엄이 이런 작품 구상을 생각해 낸 계기는 단지 빨랫줄에 널려있는 빨래를 보고 얻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현대미술의 터치는 아주 단순하거나 유치한 작품을 만들더라도 그것에 남들이 생각할 수 없는 '어떤'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폴록이 붓질을 거부하고 얼룩을 만드는 것에 그쳤다면, 길리엄은 폴록의 그림을 벽에서 해방시켜준 사람인 것입니다. 보았을 때 이게 뭔데? 싶은 그 사소한 것들이 어떠한 의미를 담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미술로써 현대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길리엄이 빨래를 보고 이 작품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그는 캔버스를 프레임으로부터 해방시켜준 최초의 사람이기 때문에 아마 현대 미술의 역사 속에 길이길이 발자취를 남길 것입니다.

 

사람이 없어서 찍을 수 있었어요. 신난다.


디아 비콘에서 리처드 세라의 거대한 작품과 함께 아마 가장 유명한 작품이 아닐까 싶은데요, 마이클 하이저 (Michael Heizer)의 < Negative Megalith #5 >입니다. 마이클 하이저는 가장 태고의, 자연과 맞닿아있는 물체인 '돌'과 '강철'에 대한 집념으로 가득한 작가입니다. 마치 원시 시대부터 청동기 시대를 떠올리게 합니다. 실제로 그는 고고학, 생태학, 자연경관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하는데요, 그는 종종 경관의 일부를 잘라내고 생략하며 '부정적인 조각 (Negative Sculture)'의 개념을 도입했다고 합니다. 부정적인 조각이란 물질적 부재를 통해 작품의 존재가 더욱 정확히 알려진다는 개념입니다.


이 작품에서도 작품의 주인공인 '커다란 돌'을 위한 자리를 파내는 것으로 보는 이들로 하여금 작품의 존재를 좀 더 선명하게 각인시킵니다. 돌이 그저 바닥에 놓여있었다거나, 천장에 매달려있었다거나 하였다면 우리는 그의 작품의 존재를 지금처럼 선명하게 인지하지 못했겠죠. 하지만 마이클 하이저는 일부러 돌을 눈에 띄게 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불편한' 공간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공간은 확실하게 돌의 존재감을 각인시켜줍니다. 긴 직사각형의 네모난 틀은 멀리서 보면 마치 돌을 위한 관 같기도 합니다. 아니면 이 세상에 원래부터 돌을 위해서 존재했던 특별한 자리 같기도 하고요. 그 어떤 의미로던 실제로 보면 위압감이 무시무시한 작품입니다.



또한 그가 만든 아주 커다란 구덩이인, < North, East, South, West > (1967/2002) 작품은 디아 비컨 모서리의 한쪽을 길게 차지할 정도로 그 규모가 큽니다. 마이클 헤이저는 지도화된 공간과 실제 공간에서 느껴지는 불일치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하는데요, 사실은 부분적으로 나누어진 작품을 디아 비콘 쪽에서 의뢰해 영구적인 설치물로, 완제품의 형태를 뗘 한 번에 북 동 남 서의 구덩이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네모, 원, 네모, 원의 모양으로 단순히 보았을 때 어느 정도 깊이인지 가늠할 수 없이 구덩이를 파놓은 것이 호기심을 극대화시키는 작용을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일정 거리 이상 구덩이에 다가갈 수 없게 되어있는데요, 한쪽 끝으로 가야만 깊이 파인 구덩이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한눈에 보아도 아주 동양적인 분위기의, 섬세하며 정적인 작품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디아 비콘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한국인, 이우환 작가입니다. 이우환 작가의 초기 작품 다섯 점으로 1969년부터 1974년까지 그의 < 관계항 (Formerly Language) > 시리즈가 장기 전시되고 있습니다. 이우환 작가는 일본 모노하(物派) 운동의 선구자입니다. 만물 물(物) 자에 물갈래 파(派), 일본 발음으로는 '모노'와 '하'로 발음하는, 소위 물파 운동이라고 하는 이 운동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작품과 그 행위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며 종이, 돌, 나무 등의 소재를 있는 그대로 제시하는 동양의 미니멀리즘적인 해석입니다. 이우환 작가는 '만들어진 것만이 세계라면,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새로 무언가를 조합하거나 변형하여 만든 것 만이 예술인가? 에 대한 질문을 던진 것이죠.


미니멀리즘 이전의 모든 것들은 무언가 복잡하고, 섞여 있으며 무언가를 더하는 과정의 세계였습니다. 하지만 모노하는 마치 그저 있는 그대로를 줌 인하거나 줌 아웃하는 정도로, 그저 우리는 가까이 보거나 조금 더 멀리 보는 정도입니다. 가급적 가장 편집되지 않은 원본의 것들을 시공간과 관련시키는 것이죠. 처음에는 사물 본질의 특성에 대해 조명했다면 후에는 사물들과 그 사물을 둘러싼 시간과 공간, 그 조화로움의 해석에 집중했습니다. 인간의 기준과 개념으로 편집된 것들로 이 세상을 인지하는 대신, 그 재료들의 객관성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사물과 사물 사이의 관계, 사물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에 집중했습니다.


서양의 미니멀리즘과 모노하가 다른 이유는 관계성에 있습니다. 서양의 미니멀리즘 작품들이 미니멀한 '작품' 그 자체로써의 가치를 갖고 있다면, 모노하는 이 작품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과 환경, 시간을 포함한 것 까지 통틀어 '작품'이 된다는 관계성의 개념을 내포하고, 그 모든 것을 통틀어 하나의 작품이 되는 미니멀리즘이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 흰 방 안에 신발 한 짝이 놓여있다면, 서양의 미니멀리즘에서는 '저 신발 자체로써 작품이 된다'라고 하는 반면 모노하에서는 '신발과 그 방,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 전부를 통틀어 작품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저는 이러한 시각의 차이도 개인의 개성을 중시하는 서양과, 타인과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동양의 문화의 모습에서 나타나는 특징이 아닐까? 하는 물음이 떠올랐습니다. 실제로 모노하 자체에 동양철학, 노자와 장자의 사상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비움과 관계, '사람의 힘을 더하지 않은 그대로의 것'이라는 무위자연 (無爲自然)에 기반을 둡니다. 그러한 점에서 저는 이 관계항 작품들이 장기 전시로써 존재하긴 하지만 디아 비콘이 지향하는 느낌과 취지에 부합하는 작품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디아 비콘은 커다란 창을 지닌, 자연광을 최대한으로 사용하는 미술관입니다. 날씨와 해가 들어오는 시간에 따라서 작품을 보는 느낌과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지는 곳이지요. 날씨와, 계절과, 온도와 미술관 사이의 간극이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만약 제가 모노하의 관점에 따른다면, 관계항 작품이 없던 이전의 디아 비콘과 관계항 작품이 전시된 디아 비콘의 공간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이 미술관과 작품들은 서로 공명하며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저는 9월 19일에 디아 비콘을 방문했지만, 그 순간, 그 분위기에 보았던 관계항 작품은 다시 볼 수가 없겠지요. 제가 디아 비콘을 다시 방문하게 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관계항 작품과의 새로운 만남일 것입니다.


이우환 작가는 예술은 종교처럼 무조건 믿는 것도 아니고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는 것도 아닌,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의문투성이인 동시에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했죠. 그 시간에만 존재하는 그때의 작품. 빨리빨리에 익숙해진, 끊임없이 발전하는 기술과 과학에 의존하는 현대인들에게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쉼표 같은 작품들이었습니다.




로버트 스미슨의 (Robert Smithson)의 <Leaning Mirror>, < Closed Mirror Square (Cayuga Salt Mine Project) >, < Map of Broken Glass (Atlantis) > 세 가지 거울 시리즈입니다.  


실제로 보면 이런 느낌입니다.


로버트 스미슨은 여타 대지미술 작가로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데요. 그는 자연에 거대한 작품을 설치하고, 그것이 훼손되어도 자연의 흐름과 섭리대로 내버려 두곤 합니다. 그의 거대한 작품과는 달리, 이 거울을 이용한 작품들은 그가 가지고 있는 거울에 관한 생각을 나타냅니다. 로버트 스미슨은 거울은 물리적으로 '거울' 그 자체이기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반사', 개념과 추상을 동시에 가진 물질로 인식했습니다.


< Closed Mirror Square (Cayuga Salt Mine Project) > feat. 친구들과 의상 톤앤매너가 완벽했던!


거울은 동일한 자리에 존재하지만, 변화하는 세상을 비추어줍니다. 그의 작품 속에서, 거울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다리를 그저 투영할 뿐 새로운 움직임이나 변화를 갖지 않습니다. 거울은 그래서 그가 항상 제시하던 물질과 비물질, Site와 Non-Site의 상반된 개념들에 아주 부합하는 물체입니다.

 


또한 거울이 깨질지라도, 그 깨진 거울 한 조각 한 조각이 다시 개별의 거울로 다른 세상을 비추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깨진 거울 조각들은 그 자체로 세상과 연결해 주는 무수한 창인 것이지요. 그의 작품들은 결정의 기하학적 특징 및 내부 구조, 그에 관한 성질을 연구하는 결정학 (crystallography) 적 성향을 띄기도 하는데요, 여기 재미있는 과학적 사실을 찾았습니다. 유리는 흔히 모래라고 하는 규사, 소다 석회 등의 혼합물을 로 (furnace - 일종의 용광로)에서 펄펄 끓여 녹였다가 순간적으로 냉각시켜 만든 물질입니다. 유리는 고체도, 완전한 액체도 아닌 '과냉각된 액체'의 상태로 투명도를 띄고 있는 것이죠. 고체처럼 단단하지만, 분자구조는 액체를 띄고 있기 때문에 이런 신기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자체로 모순을 통해 진리를 찾는 변증법 (辯證法)적 성향을 띄기도 합니다. 제멋대로 생긴 모래 알갱이들과 명확한 분자구조로 이루어진 유리. 실제 현상과 투영된 세계. 이런 반대의 개념이 그의 작품에 완연하게 녹아있습니다.


실제로 디아 비콘에서 작품을 관람할 때 이우환 작가의 작품들 옆에 배치되어있었는데요, 어쩌면 로버트 스미슨의 작품은 불교의 진공묘유 (眞空妙有) 사상을 담고 있다고도 생각했습니다. 불교에서 '진공묘유' 고유한 실체가 없다는  (空)을 근원으로 하여, 불변하는 실체 없이 여러 인연의 일시적인 화합으로 존재하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불변하지 않기에 아름다운 , 변화하는 상태의 것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입니다. 로버트 스미슨의 거울 시리즈에서, 그의 거울들은 끊임없이 지나다니는 관객들을 비추며 소통하는, 어쩌면 살아 움직이는 미술품으로   있지 않을까요? 이우환 작가와 로버트 스미슨의 작품 모두  존재 자체가 인공적인 것들이 최대한 배제되어 자연의 근원에 가깝거나, 혹은 본질 자체가 비어있기 때문에   세상을 바라보며 소통할  있는 '비움의 미학'을 시사하는 작품들이었습니다.




아마도 디아 비콘에서 가장 포토제닉 하면서도 유명한 작품일, 리처드 세라 (Richard Serra)의 < Union of the Torus and the Sphere >와  <Torqued Ellipses >, < 2000 >입니다. 흰 벽 사이에 있는 그의 작품은 마치 커다란 노아의 방주를 보는 듯합니다. 웅장한 배의 선체처럼 보입니다. 철이 가진 강하고 거친 느낌을 동시에 가진 반면에, 유연한 구조로 부드러움과 연약함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리처드 세라 역시 공간과 작품, 그리고 그 공간에서 작품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관계를 모두 신경 쓰고자 했습니다.  



리처드 세라는 회전하는 타원에서 단단한 강철판을 물결처럼, 또는 위에서 보면 언뜻 피보나치수열을 연상시키는 나선형의 거대 조각을 만들어냈습니다. 관객은 실제로 안으로 들어가거나 탐험할 수 있으며, 거대한 크기를 통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탐험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보니 그의 작품 옆으로 큰 창이 자리하고 있어, 작품 위로 비치는 빛의 그림자가 아주 우아하고 멋졌습니다. 건축과 조각품의 그 중간 같은 그런 존재감이 느껴지는 신기한 작품이기도 했고요. 단단한 외관에 부드러운 자연의 빛과, 공간을 울리는 소리가 합쳐져 미지의 어딘가로 향하는 거대한 미로를 탐험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제가 갔던 시간에는 디아 비콘에서 존 챔벌레인  < John Chamberlain >의 < Dooms Day Flotilla >가 선명하고 날카로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존 챔벌레인은 정크 아트 (Junk Art)의 대표적인 작가임과 동시에, 그의 작품들은 신 사실주의 ( New Realism)의 면모를 띄고 있습니다. 정크 아트는 말 그대로 쓰레기 예술, 쓰레기로 만드는 예술 작품인데요. 산업폐기물을 덧붙이거나 용접하거나 이것들을 덧 붙이는 콜라주 형식들의 작품이 많이 있습니다. 신 사실주의는 전통적인 사실주의와는 그 의미가 조금 다릅니다. 더 진화된 사실주의인가? 더 자세하게 표현하는 건가? 이러한 의문과는 달리 신 사실주의는 추상의 형태를 띠면서도 회화의 단순한 색채 사용을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캔버스 위의 페인팅을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전통적인 사실주의는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추상에서 나온 평면적인 화면 구성을 배척했지요. 그래서 신 사실주의에서의 사실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를 직시하며, 수용하고 체감하는 의미의 '사실'인 것입니다.



 신 사실주의의 사전적 스타일에 좀 더 가까운, 일상적인 오브제를 그대로 전시하는 방식의 세자르 (Cesar)가 자동차를 압축하여 자동차 본질의 모습에 집중했다면, 존 챔벌레인은 조각과 색채에 조금 더 집중하는 면모를 보였습니다. 폐 자동차에 색을 입혀 작품에 악센트를 주면서 전체적인 형태는 추상적인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제가 갔을 때 디아 비콘에서 가장 해가 잘 드는 곳은 존 챔벌레인의 작품들이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대량 생산된 철판들과 알루미늄 포일들이 빛을 반사시키며 반짝거리고 있었습니다. 원래는 공장이었던 디아 비콘이 현재는 미술관으로써 존재하는 것처럼, 사람이 만든 폐기물은 존 챔벌레인의 터치를 통해 자연과 공존하며 빛나고 있었습니다.




댄 플래빈의 작품들은 예전 디 뮤지엄에서 진행했던 < 7개의 빛 아홉 개의 감성 > 전시를 떠 올리게 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전시의 모티브가 댄 플래빈이었겠지만요.



댄 플래빈의 작품들은 언제 봐도 참 트렌디 한 느낌이 듭니다. 당장이라도 인스타그램에 신진작가의 작품이라고 게시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신선하고 젊은 감성입니다. 조명은 현대 사회에서 사람과 가장 가까운, 필수 불가결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댄 플래빈은 열 가지 색 (파랑, 초록, 분홍, 빨강, 노랑, 보라색 (실제 표기 ultra violet), 흰색 네 가지)과 다섯 가지 형태 (원형 한 가지, 길이가 다른 진선형 네 가지)를 조합하여 빛으로 공간의 통로를 차단하는 방식을 도입했습니다. 사선의 형광등을 공간의 모서리에 수직으로 세워 빛으로 모서리를 없애고, 공간은 조명 뒤쪽의 빛에 의해 삼각형의 모양으로 분리되는 것입니다. 그는 빛으로 실제 공간을 해체하고 유희할 수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빛을 실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는 빛을 '실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플래빈은 빛은 그 자체로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이 초록색 광선은  < untitled (to you, Heiner, with admiration and affection) > '당신, 하이너에게 사랑과 존경을 담아'라는 작품명을 가지고 있는데요. 여기서 하이너는 디아 비콘을 설립한 디아 예술 재단 (Dia Art Foundation)의 설립자 하이너 프리드리히입니다. 플래빈은 제목을 무제로 짓고 괄호 안에 '실재하는 어떤 이에게 헌정하는' 작품명을 많이 지었습니다. 작품마다 생각한 그 사람의 어떤 모습이 그가 선택한 빛의 색으로 녹아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이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 초록색을 썼을까요?



댄 플래빈의 작품 외에 다른 공간에는 흥미롭게도 디아 비콘 쪽에서 테크노 DJ인 칼 크레이그 (Carl Craig)에게 요청한 공간을 가득 채우는 음악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작품명은 < Party / After Party >라고 합니다. 디아 비콘 홈페이지의 설명에 따르면, 어두운 지하실에서 울리는 커다란 음악은 파티에서 느끼는 극도의 행복감과 동시에 파티가 끝난 이후 느끼는 외로움에 대한 해석이라고 느껴지며 예전에 나비스코 프린팅 공장이었던 시절의 소리를 상기시킴과 동시에 급진적인 실험을 위해 공업적인 공간을 매립하는- 테크노 전통의 회상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누워서 눈을 감고 공간을 온전히 느끼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친구가 눈을 감으면 세 시간도 있을 수 있다고 말했지만, 미술관의 폐장시간이 가까워져 아쉬운 발걸음을 뒤로했습니다.




모든 작품을 소개할 수는 없지만, 디아 비콘은 제가 보았던 어떤 미술관중에서도 가장 공간을 잘 활용한 그런 미술관입니다.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만 해도 아주 많은 작품을 모두 감당할 수 없어 한 걸음 건너 한 작품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디아 비콘은 한 작가에게 아주 넓은 공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작품 수 자체가 방대한 규모는 아니지만, 전체적인 공간을 생각한다면 정말 거대한 현대 미술관입니다. 이렇게 자연과 날씨의 영향을 받는 실내 미술관이 존재한다는 것이 신기하고도 재미있는 일입니다.


너무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디아 비콘은 어딘가 '비워낼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합니다. 그 비움을 허락할지는 개개인의 선택에 달렸지만요. 추후에 다시 방문하게 된다면 디아 비콘은 아마 제가 보았던 그 디아 비콘이 아니겠지요? 왜냐하면 그때는 날씨도 시간도, 미술관에 들어오는 빛과 그림자의 방향도 다를 테니까요. 이런 점 때문에 무수한 평행세계가 존재하는 미술관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태고의 자연도, 그렇다고 문명의 이기로 가득 찬 것도 아닌 그 어딘가의 경계에 존재하는 미술관. 사람이 혼자 살아갈 수 없듯이 미술도 보아주는 사람이 없을 때 그것은 작품으로써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디아 비컨은 사람과 작품, 그리고 그것을 감싸 안은 자연의 조화를 최대치로 이끌어낸 미술관으로써 복잡한 뉴욕 시티를 벗어나 그 날 하루는 복잡한 일들을 처리할 수 없는 위치이기도 합니다. 하루쯤은 더하지 않고 덜어내기만 할 수 있는 장소, 그것이 디아 비컨의 매력입니다. 날씨 좋은 날 디아 비콘에 방문해보세요. 정적이 가득한, 자연과 공명하는 미술관을 힘껏 들이켜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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