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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 Apr 24. 2020

식인의 세계에서 - 0 영 ZERO 零, 김사과

제로의 세계

김사과의 0 영 ZERO 零은 아르튀보 랭보의 시로 시작한다.


"당신은 이곳에서

어떤 미신적 기념물의 흔적조차

감지하지 못할 것이다.


도덕과 언어는

극히 단순한 형태로 축소되었다.

마침내!"

아르튀보 랭보, 도시 Ville, <일뤼미나시옹 Illuminations>


아마도 책의 포문을 여는 이 시가 이 책의 주인공인 '나'라는 사람의 가치관을 관통하는 시가 아닐까 생각한다. 소설 속의 주인공은 형용하기 어려운 이 세계를 단순하게 '제로의 세계'라 명명하며 살고 있으니까. 그러니 랭보의 시에서, '도덕과 언어는 극히 단순한 형태로 축소되었다.' 이 구절이 그녀가 생각하는 제로의 세계임이 아닐까 추측하는 바이다.




0 영 ZERO 零의 이 사회 어딘가에 있을 소시오 패스의 이야기이다. 사이코패스와는 다르게, 소시오 패스는 사회교류성이 아주 뛰어나다. 이 책의 주인공도 그렇다. 처음은 주인공 '나'와 그녀의 4년 된 남자 친구, 성연우와의 이별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성연우는 카페에서 그녀가 그동안 자신을 속이고 기만해왔으며, 그녀 때문에 인간에 대한 회의에 빠져들었다고 그녀를 비난한다. 하지만 그녀는 사실 성연우의 말을 제대로 듣고 있지 않다. 그 시각 카페에 코트를 입고 온 남자와 시선을 마주치기도 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다. 성연우는 그녀에게 그동안의 분노를 토로하며 자신의 말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며 반문하지만, 그녀는 제 3자에게 말쑥한 차림으로 남자 친구의 격양된 분노를 받아들이는 가련한 피해자로 보이는 여자 친구의 역할일 뿐이다. 그리고 그녀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자신을 보며, 완벽하다고 생각한다. 독자는 이 단순한 상황을 보면서, 그녀가 보통의 사람과는 다름을, 어딘가 균열된 인간임을 인지하게 된다.


이후 '나'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녀에게 있어서 성연우를 포함한 동창 이민희, 어머니, 자신의 수업을 듣던 학생 박세영은 모두 자신의 온전한 흥미 거리이며, 자신이 생각하는 이 세계의 피식자이다. 다른 방식이지만 비슷한 사고로 그녀는 모든 이들을 삶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식인食人하는 종족이다.


그녀는 자신이 이 세상의 포식자라고 생각한다. 순진한 표정, 원하는 때에 바라는 만큼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자신의 재능을 피식자들을 먹어치우는데 한껏 활용한다. 이 소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소설 속의 '나'는 자신이 하는 행동을 계속 정당화시키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유도한 것뿐인데? 직접적으로 잘못한 게 없는데, 그게 내 잘못이야? 이러한 말들을 반복함으로써 자신을 끝없이 정당화시킨다. '그 사람이 피식자가 아닌 포식자였더라면, 내가 놓은 덫에 당하지 않았을 텐데'라는 기저에 은근한 무시가 내저 되어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는 피식자를 경멸하지는 않는다. 피식자들은 자신의 인생을 위한 그저 흥미롭고 자신에게 간택당해 잠시 운이 나쁜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들은 그녀에게 있어서 예쁜 컵 정도의 존재이다. 예뻐서 흥미롭지만 사람에게 컵은 경멸하기에 가치 있는 대상도 아니다. 그리고 '나'에게 그들이 그렇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에 대한 나르시시즘도 있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에 우월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녀가 자신이 독일에서 '알리스'였던 과거를 회상할 때, 그녀는 아주 기쁘고 격양된 어조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한다. 그녀는 자신의 이 세상의 포식자로 초월한 존재임을 믿는다. 자신의 아주 재미있고 질 나쁜 장난에 초대된 사람들을 가지고 놀면서.


하지만 그녀의 세계는 결국 파괴된다. 결정적으로는 남자 친구 성연우에 의해서. 하지만 그녀의 세계는 원래 무너져가고 있었던지도 모른다. 그녀의 세계에서 이민희처럼 호락호락하게 당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의 어머니, 성연우, 그리고 박세영은 모두 그녀의 생각처럼 말끔히 처리되지 않았다. '나'에 정신병원에 입원한 어머니는 그녀에게 저주의 말을 내뱉었고, 박세영은 그녀의 책에 끼워진 성연우의 명세서로 성연우를 발화시키는 요인이 되며, 성연우는 끊임없이 '나'를 의심하고 집요하게 탐구하며 결국 자신과 박세영을 망친 사람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결국 '나'는 집에서 박세영의 환청까지 보게 된다. 완벽한 몰락이다.


어쩌면 이것은 단순히 세상을 삐뚤어지게 본 한 가엾은 희생자의 타락 일 수도 있겠다. 그녀의 환희로 가득 찬 '알리스'의 과거는 포식자 크리스티나에 의해 빛을 잃었으니까. 그녀도 어떠한 0의 세계의 숭고하지 않은 희생자였으니까.


책에는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세상 사람들이 다 내 불행을 바란다. 그것은 진실이다. 어쩌면 세상에 대한 유일한 진실이다. 김지영 선배는 미친 것이 아니라 진실을 말했다. 좀 더 정확하게 서술하자면, 사람들은 누군가 각별한 타인의 불행을 바란다. 각별한 타인의 불행을 커튼 삼아 자신의 방에 짙게 드리워 진 불행의 그림자를 가리고자 한다."


그리고 이 글에 대한 답변을 말하자면, '아니'다. 세계에는 빛과 어둠이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한 사람들은 세상의 행복을 향해 가고 있다. 그녀 같은 일을 당한 다고 해서 또한 모두가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선택이란 것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선택을 한 것이고. 자신의 기준이 되는 0의 영역을 위해 남을 단정 짓고, 평가하고 또한 집착하는 모습은 이 시대가 지향하는 건강한 인간상은 단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나'에게 어느 정도 공감하는 이유는, 우리의 세계가 어느 정도 약육강식의 단면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우리는 어두운 세계로 흘러가지 않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렇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세상은 선한 사람들을 미련하다고 한다. 하지만 선한 사람들은 유약하지 않다. '나'처럼 크리스티나에게 나쁜 일을 당하더라도, 누군가 나를 배신하더라도 자신의 선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필시 강한 사람들이다. 강하지 않은 사람은 쉽게 타락한다. 쉽게 나쁜 길을 걷는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끝까지 선하게 남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남은 선한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강한 의지를 가진 강인한 사람들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방향이 그 선함의 길 이어야 함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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