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아닌 일기
0401
물이 고여있지 않은 욕조를 본다. 어항과 달리 그것은 마개를 뽑으면 간헐 적으로 숨을 쉰다. 하지만 나에게 있는 것은 욕조가 아니라 어항이다. 수풀도 돌멩이도 없이 물만 고여있는 그 어항을 바라보면, 보이는 것은 내 얼굴. 어항 속에 갇힌 나 자신.
0402
가끔은 내가 콩나물시루 안의 세계에서 사는 듯한 느낌이 든다. 커튼을 치고 불을 켜지 않으면 집은 검은 봉지로 덮은 그릇처럼, 나는 시간이 투과하지 않는 세계에 멈추어 있다.
0403
시간이 물처럼 흐른다는 말을 체감한다. 나는 정신이 자라지 않은 성인이 되었다. 어른은 멀었다. 그 간극이 꿈처럼 아득하다는 생각을 했다.
0404
미루는 것에 대하여 생각한다. 완벽하게 해내고 싶어 망설이며 시작할 수 없다는 말을 이해해주세요. 바삭바삭하게 부서진 영혼을 애처로이 여겨주세요.
0405
창 밖을 보면서 오늘도 권태로운 하루임을 실감한다. 어쩌면 이것은 영원의 세계.
0406
가스레인지에 조악한 그을음이 남았다. 없애려고 자꾸 문질러보았지만 자국은 왜 자신을 지우려 하냐는 듯, 오히려 멀뚱히 남아있었다.
0407
말랑한 무기력이 오늘도 나를 침식한다. 말랑하다는 말, 그 단어 자체에는 무게에 대한 설명이 없다. 점도에 대한 설명도 없다. 말랑하다는 말에 대해서 사람들은 더 묻지 않는다. 그건 딱딱하지 않으면 되었다는 의미인가요?
0408
목적 없는 우울의 배설은 어디를 향하여 가는가. 나는 물속에서 숨을 참다 육지에서 헐떡이며 고인 물을 게워 낸다.
0409
비뚤어진 햇빛이 먼지 틈을 통과해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내 다리를 가르고, 살갗을 비추어 숨이 죽어가는 맥을 짚는다. 빌어먹을, 아직 흐르고 있었다.
0410
따개비처럼 따닥따닥 붙어있던 사람들이 오늘은 조금 그리워졌다. 나는 도시가 시드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어느새 숨이 죽어있었다.
0411
허물을 벗을 수 있는 나비와 가재와 뱀을 시샘한다. 순리를 거슬러 오르는 연어를 질투한다.
0412
아름다운 이를 보며 꿈을 꾼다. 당신을 폭신폭신하고 다정한 케이크에 밀쳐 넣고 싶다. 상냥한 크림과 빛나는 시럽의 눈동자. 나의 세계에 범람하는 우주.
0413
삶은 우리를 강제로 살도록, 이리 매정하게 날붙이처럼 몰아세웠지만 죽음조차 선택할 수 없게 한 아이러니. 잔인한 세계. 녹아 사라지는 구원을 내려 주세요.
0414
나는 부서진 악기의 소리를 들으며 고상하게 앉아 잠들지 않고 꿈을 꾸는 상상을 했다.
0415
연민의 계절이 돌아왔다. 끔찍한 불행의 냄새가 났다. 기약 없는 침식과 죽은 도시의 속삭임. 그늘이 길었다.
0416
기이한 무늬들이 춤을 춘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죄들을 본다. 존재함으로써 나는 불타오른다고. 말없이 타닥, 타닥 거린다. 불씨들이 생을 다 한 꽃잎처럼 흩날린다.
0417
인터넷에서 본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로 소설 쓰기.
가로등 불빛이 꺼질 듯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눈이 오는 날마다 굴러 떨어질 것만 같은 언덕을 올라가면 너와 섞일 수 없는 사람임을 오늘도 실감한다.
다시금 태어난다면, 이 지독한 간극이 좁혀지기를.
라벤더 향이 미미하게 나는 그 상처 없는 손가락을 볼 때마다 나는 입 맞추고 싶다.
마음속에서는 알 수 없는 분노인지, 애증인지, 어쩌면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질투인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벅차올라
사랑이라고 명명하기에도 역겨운 나 혼자만의 감정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마음 한 편의 서랍에 넣어두었다는 것을 당신은 알까?
자비로운 마음으로 나를 용서하소서, 신이시여
차에 치여 죽는 날을 상상했어요, 당신의 차에.
카데바가 되어서라도 당신에게 어루만져질 수 있다면
타서 한 줌의 재가 될 때까지 기꺼이 파괴되어도 좋을 나의 삶
하늘이 내린 나의 구원자, 내 연약한 목숨을 어루만지는 숨결이 깃든 눈동자의 당신을 내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0418
마땅히 나를 망치고 있음 을 알면서도, 그 영원의 빛이 눈부셔서 당신을 구원자라고 착각하는 나날들이 계속되어요. 나의 세계를 파괴하는 가장 나약한 곳에서 태어난 천사.
0419
모네의 수련을 좋아한다. 빛깔이 자아내는 투명한 춤, 바람 같은 촉감, 구름처럼 넘실대는 물 그림자를 보고 있노라면 나는 오롯이 아네모네를 쥔 오필리아가 되어.
(아네모네의 꽃말, ‘희망과 기대’)
0420
소라고동의 소리를 빌린 바다의 세이렌이 나를 부른다. 검은 바다는 춥지 않다고 상냥한 거짓말을 한다.
0421
그것은 나를 향한 동정인지, 나를 구체화 한 형상에 대한 경멸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0422
오르골과 회전목마를 생각해 봐. 그것은 회전목마에 울려 퍼지는 오르골 소리였니, 오르골 위의 회전목마 모형이었니?
0423
자살하면 죄를 받는다고 했다. 어째서요? 아이가 물었다. 몰라, 그냥 그렇대. 그는 말없이 담배를 한 대 피웠다. 아이는 양수 속에서 태어나던 순간을 기억한다. 물론 그 아이가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삶이 주어진 것이 시혜적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소라의 Track9를 흥얼거린다.
0424
인생이 발작한다. 시체처럼 누워 눅눅히 침대에 스며들어야지.
0425
나는 수집욕이 있는 사람들처럼, 조금 더 감상적이고 색다른, 특별한 어휘를 알고 싶다. 한국어로 구현할 수 있는 애매한 표현들과 그 애매한 표현 만으로도 어떤 것인지 오롯이 이해할 수 있는 의미들.
0426
살갗에 축축이 져며드는 기시감에 휩싸여 갑자기 나의 세상이 우주로 발현할 때가 있다. 프리지아 꽃을 닮은 별자리를 찾는다.
(프리지아의 꽃말, ’ 당신의 시작을 응원합니다’)
0427
파란 장미의 흥미로운 유래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파란 장미는 원래 염색으로만 만들어질 수 있어서 원래의 꽃말은 ‘불가능’ , ‘얻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유전공학을 통해 파란 장미 재배에 성공하면서 ‘기적’, ‘포기하지 않는 사랑’으로 꽃말이 바뀌었다고 한다. 동시에 파란 색소 없이 구조적으로 파란색 빛 날개를 띠는 모르포 나비가 생각났다. 나비의 상징적 의미에도 행복과 기쁨, 영혼 등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파란 장미와 모르포 나비는 그 존재의 기원이 다르지만 희망적인 메시지와 함께 아름답게 잘 어울린다. 그러면 된 것이 아닌가?
0428
물을 많이 들여다볼수록 우울 해진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끔 끝없이 가라앉고 싶을 때가 있어 바다가 보이는 창가에 앉아 하염없이 들여다보며 물고기와 수면 위로 비친 별들의 궤적을 눈으로 좇고 싶다.
0429
불행이란 불시에 찾아와 나를 괴롭힌다. 해가 떴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세상이 떠오르고 있어서 나는 가라앉지 못했다.
0430
집에서 거미를 봤는데 눈을 감았다 뜨니 거미가 눈 깜짝할 새에 사라져있었다.
4월에는 하루하루, 조금이라도 글을 써보고 싶어서 조그마한 조각들로 일기를 꾸렸고 그 조각들이 모두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