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팬』, 사랑스러운 상상 속 지독한 결핍

[서평, 북리뷰] 저자 제임스 매튜 배리의 삶과 함께 읽기를 추천하며

by MUA


사랑스럽지만 심란한 소설


『피터팬』은 귀여운 소설이다. 발상부터 남다르다. 아이들의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호수, 밤마다 아이들의 머릿속을 서랍처럼 정리해 주는 엄마 등. 읽다 보면 사랑스러운 상상력에 엄마 미소를 짓고 있다.


“가령 존의 네버랜드에는 호수가 하나 있는데 존은 그 위를 날아다니는 홍학들에게 총을 쏘았다. 반면 한참 어린 마이클은 홍학이 한 마리 있고 그 위를 호수들이 날아다녔다.”


“훌륭한 어머니는 누구나 밤 동안 아이들의 머릿속을 정리한다. 이튿날 아침을 위해 낮 동안 마구 어질러진 생각들을 정리해 적절한 곳에 잘 넣아둔다. 그건 마치 서랍정리와 비슷하다. 예쁜 생각과 안 예쁜 생각을 구분하고 예쁜 생각은 귀여운 고양이처럼 뺨에 대보고 안 예쁜 생각은 보이지 않는 구석으로 서둘러 치울 것이다.”


그러나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이 소설만큼 심란한 작품도 드문 것 같다. 어릴 적에는 피터팬과 저자의 성장에 대한 회피, 두려움에 매료됐지만 지금은 엄마를 향한 갈망, 모성 결핍이 더욱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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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 저도 아닌 얼치기’… 결핍에서 태어난 피터팬

소설도 소설이지만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건 저자였다. 저자 제임스 매튜 배리는 한평생 소년과 성인 남성의 중간 지점에서 ‘이도 저도 아닌 얼치기(『켄싱턴공원의 피터팬』의 표현 인용)’로 살았다. 피터팬은 배리의 결핍에서 태어난 소년인 셈이다.


저자 제임스 매튜 배리는 1860년 5월 9일 스코틀랜드에서 총 10남매 중 아홉째이자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 채 결핍 속에 성장했다. 아버지는 과로로 인해 시력을 거의 잃었고 어머니는 배리의 형이자 가장 아끼는 자식이었던 데이비드의 죽음으로 우울증에 걸려 슬픔 속에 평생을 보냈다. 배리가 6살 때 일이었다.


배리는 이후 “나는 어머니가 데이비드 형을 잊을 수 있도록 어머니의 침대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건 내가 교묘히 의사 노릇을 하는 것과 같았다”고 표현한다. 이를 두고 다른 평론가는 배리가 형인 데이비드의 그림자 속에서, 그의 대역으로서 삶을 살았다고도 평했다.


모성에 대한 결핍에 더해 배리는 성인 남성으로서 남성성도 결여돼 있었다. 다 자랐는데도 키가 150cm밖에 되지 않았고 수줍음이 심한 성격이었다. 더욱이 어머니의 청교도적 금욕주의에 영향을 많이 받았던 탓인지 그는 아내나 애인과도 ‘정상적’ 성생활을 영위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배리는 『피터팬』 외에 수많은 작품 속에서 자신을 자라지 않는 소년으로 대상화했다.


이는 『피터팬』에서도 드러나는 대목이다. 웬디와 팅커벨은 피터팬에게 이성애적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지만 피터팬은 이를 끝끝내 알아채지도 못하고 받아주지도 않는다. 키스와 골무를 구분하지 못하고 웬디와 키스하지 않은 채 작품은 끝을 맺는다.


피터팬의 탄생 지점에서도 저자가 투영되어 있는 듯 보인다. 피터팬의 탄생은 『켄싱턴공원의 피터팬』*에 나와 있다.(*지금 말하는 『피터팬』의 원제는 『피터와 웬디』)


피터팬은 영국 켄싱턴공원 근처에서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집 창문으로 도망친다. 그리고 켄싱턴공원 호수 근처에서 새들과 함께 살아간다. 피터팬을 두고 새들은 ‘이도 저도 아닌 얼치기’라 부른다. 피터는 한때 새가 되는 것을 꿈꿨지만 이후 진짜 소년이 되는 것을 소원하며 소년들이 하는 놀이를 부러워한다.


그리고 피터팬은 한평생 엄마를 갈구한다. 특이점은 피터팬이 엄마에게 돌아가는 대신 엄마를 자신의 세계로 초대한다는 점이다. 피터팬은 어른이 되는 게 싫어 엄마의 세계로 돌어가는 대신 자라지 않는 소년의 세계, 네버랜드로 엄마인 웬디를 부른다.


웬디는 피터팬이 생각하는, 그리고 저자 제임스 매튜 베리가 생각하는 이상적 엄마다. 웬디는 그가 한평생 사랑했던 여자 실비아 루엘린 데이비스의 표상이기도 하다. 배리는 그녀가 자신과 결혼하길 원했다고 상상했을 정도로 그녀를 깊이 사랑했다. 그 사랑이 이성애적 사랑인지, 모성을 투영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피터팬에게, 배리에게 있어서 엄마란 무엇이었을까.


배리가 갖지 못한, 그가 갖고 싶어 했던 엄마는 ‘떠나간 아이들을 기다리며 창문을 결코 닫지 않는 엄마’였던 것 같다. 죽은 형의 그림자를 그리며 애달파하는 엄마가 아니라, 자신에게 슬픈 뒷모습만 보이는 엄마가 아니라. 밤이면 아이들의 생각을 예쁘게 차곡차곡 정리해 주며 경제에 밝은 아버지와 다정한 강아지로 가정을 꾸린 그런 엄마.


그러나 배리가 그랬듯 피터팬도 그런 엄마를 갖지 못했다. 피터팬의 엄마는 창문은 열고 피터를 기다리며 울고 있었지만 그가 돌아왔을 때 눈을 뜨고 그를 안아주지 못했다.



제임스 매튜 배리.jpg 저자 제임스 매튜 배리

엄마,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존재

엄마가 될 준비를 하면서『피터팬』을 읽자니 엄마가 얼마나 복잡한 존재인지 새삼 느껴진다. 저자의 삶까지 파고드니 엄마란 존재의 복잡성이 심란할 정도다.


엄마는 엄마로서만 살지 않는다. 누군가의 자식이며 연인이고 노동자이기도 하다. 자식과 공유할 수 없는 혼자만의 열망, 욕망을 오롯이 간직한 사람이다. 문제는 무수히 많은 욕망과 결점을 지닌 사람이 타인의 신이자 우주가 되는 순간이 있다는 점이다.


저자 제임스 매튜 배리의 사례처럼 엄마의 슬픔이 자식의 평생을 좌우할 때가 많다. 저자의 팔자 탓이라며 딱 자를 수도 있겠지만 그의 성적 결핍, 모성을 향한 갈구가 어떻게 그만의 책임일 수 있겠나.


그렇다고 저자의 엄마에게 죄를 물을 수도 없다. 엄마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 단지 슬펐을 뿐이니.


이런 것을 읽을 때마다, 심리학을 공부할 때마다 어쩐지 협박을 당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너는 성품이 좋아야 해, 네 결핍을 극복해야 해, 네 슬픔에서 벗어나야 해, 그렇지 않으면 자식이 네 그림자에 잠식당해 인생을 고통스럽게 살고 말 거야.’ 태어나지도 않은 자식이 볼모로 잡혀 기쁨과 행복을 강요받는 기분이다.


자식을 품는 순간부터 돌이킬 수 없는 원죄를 저지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자식은 태어날 때부터 피해자인 걸까? 나는 그렇다고 본다. 낳아달라 한 적 없는데도 세상에 내동댕이쳐진다. 타의로 생로병사의 굴레에 빠져 필연적 고통을 겪는다. 나도 그랬고 내 자식도 그럴테지.


사랑스러운 소설이지만 알면 알수록 심란해지는 소설이다. 주인공은 작가를 투영하며 소설은 작가의 정신세계를 오롯이 드러내는 것이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저자의 삶과 함께 읽기를 추천한다. '어떤 슬픔은 덕목이 되고 어떤 슬픔은 타인의 우주를 황폐화한다'는 말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펭귄클래식에서 나온 작품으로 읽기를. 번역도 훌륭하고 서문도 아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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