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돌봤다면
여성주의에서 의견의 합치란 없다. 모든 인간의 의견이 합치되지 않는 것과 같다. 여성이 남성과 비교해 2등시민으로 여겨진다는 데는 대체적으로 공감대가 있지만 각자가 꿈꾸는 이상세계는 다르다.
내일 할례를 앞둔 여성과 ‘독박육아’하는 여성의 이상향이 같을 수 없다. 성폭행 당한 장애인 여성과 유리천장에 부딪힌 미국 중산층 여성의 꿈은 다르다. 문제는 이들이 더불어 살 때다. 그 어떤 여성도 혼자만의 힘으로 살 수가 없다.
레일라 슬리마니의 ‘달콤한 노래’는 혼자 살 수 없는 여성이 해소되지 않는 고통을 안고 더불어 살았을 때 놓일 수 있는 비극을 그린다.
루이즈는 제3세계의 여성으로 지독히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 빚과 폭언만 안겨주는 남자와 결혼했다. 남편이 죽자 루이즈는 어린 딸을 데리고 프랑스로 이주했는데 그녀는 중산층 시민의 자녀와 가사를 돌봐 가정을 지키는 일을 맡는다.
가난에 쫓겨 프랑스에 왔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월급이 끊기는 순간 ‘길거리에 똥을 눠야 하는 처지’에 놓이는 보모뿐이었던 셈이다.
침데애 누워서도 그녀는 잠에 들지 못한다. 그녀는 끊임없이 그 어둠 속 남자를 생각한다. 이제 자기가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거리에 나앉을 것이라는 생각. 이 누추한 원룸조차 떠나야 하고 동물처럼 거리에서 똥을 누게 될 거라는 생각.
그녀는 주인의 자녀를 돌보기 위해 자기 딸을 버렸고 주인의 살림살이를 지키기 위해 본인의 살림은 돌보지 않았다. 주인의 꿈으로 자기 삶의 공허를 메웠다.
그녀가 가사를 맡으면서 주인집 여자는 자아를 실현했고 중산층가정이라는 계층적, 사회적 지위도 유지된다.
하지만 루이즈는 소모품이었기에 아이가 자라고 주인이 싫증을 느끼면서 입지가 좁아진다. 루이즈는 자신의 자리를 지켜줄 새 아이를 바랐지만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루이즈는 주인집 아이를 죽이고 자신도 죽이려고 한다.
루이즈가 제3세계 여성의 비극과 모순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면 주인집 여자는 중산층 여성으로서 경력단절, 모성애 부족이라는 비난 등을 겪는 인물이다.
서로가 서로를 파괴하지 않았으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루이즈가 좀더 도적적 인물이어야 했나? 주인집 여자가 좀더 너그러워야 했을까? 주인집 여자가 월급을 좀더 많이 주고 변호사 일에 덜 열정적이어야 했을까?
이 문제를 기존의 정의윤리와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바라봐 해결하려면 제3세계와 선진국의 경제적 격차가 줄어들고 내일을 꿈 꿀 수 있는 수준으로 경제적 여유가 생겨야 한다. 또 여성도 자유롭게 직업을 통해 자아를 실현할 수 있을 만큼 사회적 제도가 잘 마련돼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자녀를 키우고 가정을 돌보는 일은 사회적 제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가정과 자녀를 돌보는 데는 기계적이고 양적인 여건보다 사랑이나 정성처럼 무형적 가치가 훨씬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루이즈는 주인집에 단순한 노동력이 아니라 모성애와 정성을 제공했고 주인집이 필요로 했던 것도 이것이다. 이것은 정의윤리와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돌봄의 윤리로서 전환이 필요하다.
정의윤리와 자본주의는 인간이 독립적, 합리적 존재로서 필요에 따라 자유롭고 대등하게 재화와 노동력, 심지어 감정까지 사고팔 수 있다고 바라본다.
하지만 인간은 의존적이고 비합리적이다. 단순히 생계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꿈을 위해 노동력과 열정을 바친다. 이런 과정에는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며 이 때문에 우리는 각기 다른 고통을 안고도 더불어 살 수밖에 없다.
돌봄의 윤리는 인간이 의존적 존재인 만큼 배려, 신뢰, 어감 등에 마음쓰기를 가정 내에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제도로서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루이즈와 주인집 여자가 좀더 ‘마음쓰기’를 의무적으로 실천했더라면 루이즈는 주인집 여자의 열망을 이해했을 것이고 주인집 여자는 루이즈를 고독 속에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여성주의는 여성이 2등시민이라는 문제의식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연대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하지만 동시에 모두의 문제인데도 이를 여성의 문제로 선을 긋는다는 한계가 있다.
‘달콤한 노래’도 마찬가지다. 두 여성의 비극, 그로 인한 가정의 파괴를 그렸지만 이것은 사회 보편의 문제다. 두 여자의, 한 가정의 문제로 바라보는 순간 이 문제를 해결할 길은 영영 열리지 않는다. 달콤한 노래를 돌봄의 윤리가 필요한 이유로 읽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