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영화 리뷰]
내 무덤에서 네 무덤을 본다
무덤에 갇혀 있다는 상상을 자주 한다. 내 무덤은 침실. 두꺼운 암막커튼을 쳐서 햇살이 들지 않는 커다랗고 푹신한 침대 위에서 하루종일 누워 쇼츠만 봤다.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이렇게 죽음을 기다리는구나’하고 매일매일 시체처럼 누워 생각했다.
건강 문제로 휴직 중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생긴 덕분이다. 그러나 나는 내내 바닥을 쳤다. 직장에 돌아갈 수 있을까. 그곳에 내 자리가 있을까.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기울였던 노력들조차 모두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생존 능력이 퇴화하고 있었다. 그동안 무엇을 위해 산 것인지 알 수 없게 됐다.
아이의 탄생과 나의 사회적 죽음이 교차한다는 생각이 천장에서 맴돌았다. 아무 기운도 없었다. 지금 나는 기운을 낼 필요도 없다. 오직 잠을 잘 때만 평화로웠다. 그렇게 두 달 동안 무덤같은 침실에서 지냈다. 여전히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레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내가 나의 무덤에서 타인의 무덤을 지켜본 듯한 작품이다.
‘혹시 내가 잘못 산 건 아닐까?’…나쁜 삶과 나쁜 죽음
“혹시 내가 잘못 산 건 아닐까?”
이반 일리치는 병석에 누워 이런 생각을 한다. 자신이 고통스럽게 ‘나쁜 죽음’을 겪는 건 ‘나쁜 삶’을 살았기 때문일 수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그의 머리를 스쳤다.
이는 톨스토이의 사상을 관통한다. 역자 김연경에 따르면 톨스토이는 허위, 기만 등 거짓과 이기주의, 세속적 욕망을 혐오했다고 한다. 이런 것을 좇으며 산 삶을 가리켜 톨스토이는 나쁜 삶이라 여겼다. 그리고 나쁜 삶의 끝에는 기만과 이기주의로 둘러싸인 나쁜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좋은 죽음으로 이끄는가?
여기에서 ‘삶의 포만감’이라는 개념을 떠올렸다. 배가 부르면 더 이상 먹지 않아도 되듯 더 이상 살지 않아도 만족스러운 상태에서 눈을 감는 게 바로 이 개념이다. 충분히 느꼈고 충분히 겪었으니 더 이상 이 삶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는 뜻인 것 같다.
과거 농경시대에는 이 개념이 무척 유효했다고 한다. 당시 농부의 삶이란 대를 거듭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사회의 농부는 누릴 수 있는 것은 모두 누렸기에 더 이상 바랄 것 없이 눈을 감았다고 한다.
톨스토이의 생각대로 진실하고 이타적이며 탈속적인 삶을 지향하는 것도 생각해봤다. 가장 적합한 개념이 불교가 아닌가 싶다. 불교에 따르면 존재는 생, 로, 병, 사를 겪으며 이 과정에서 욕심을 부리고 집착하기에 필연적으로 괴로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를 끊어내기 위해 정견, 정사유 등 팔정도를 제시한다.
정견(正見) : 바르게 봄, 바른 세계관·이해
정사유(正思惟) : 바른 생각·의도
정어(正語) : 바른 말, 거짓·악구·이간질·기교적 말 등을 하지 않음
정업(正業) : 바른 행동
정명(正命) : 바른 생계, 해를 끼치지 않는 직업
정정진(正精進) : 바른 노력, 선을 키우고 악을 끊는 부단한 정진
정념(正念) : 바른 알아차림, 깨어 있는 마음
정정(正定) : 바른 선정, 바른 집중 상태
그런데 이걸 실천하며 살기에는 그간의 습관을 무시하기가 쉽지 않다. 톨스토이가 살았던 1800년대 러시아에서도 물론 그랬지만 2000년대 내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는 더더욱이나 자본과 노력을 신성화한다. 종교와 윤리가 힘을 잃으면서 짙어진 존재론적 허무를 자본과 노력의 신화로 때우고 있다. 많은 연봉을 받는 화이트칼라는 자본주의의 교리를 충실히 따른 모범적 신도로 여겨진다.
내 부모도 나를 그렇게 키우려 애썼다. 경쟁 우위에 대한 강박과 자학은 습관으로 굳어졌다.
그런 와중에 육아휴직은 그런 나를 강제로 멈춰 세웠다. 한순간에 자본주의의 모범생에서 열등생으로, 남편의 자산을 축내며 놀고 먹는 사람으로 전락한 셈이다.
앞으로 나아가도(애초에 앞이란 건 없다) 어둠뿐이며 결국 끝에는 허무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아도 방향성을 잃은 느낌이라 망망대해에서 그저 떠도는 느낌었다.
죽음이 건네는 위로
그런 내게 이반 일리치의 삶과 사유와 죽음은 위로처럼 느껴졌다. 모두가 발버둥 치고 올라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내려가고 있으며 애초에 삶에서 오르내림이란 없음을 보여준 느낌이다. 가상의 인물이지만 실존 인간 대다수의 죽음이 이와 다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작중 인물 ‘이반 일리치’는 내가 바라마지않던 삶을 살았던 남자다. 사회적 지위와 성취를 일궈냈으며 죽기 3개월 전까지 나처럼 삶의 기반이 흔들리는 일도 없었다.
이반 일리치는 고위 관료의 차남을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데다 머리도 좋았다. 법률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판사로 일한 덕분에 사회적으로 존경받았다. 내내 대인관계도 양호했다.
그는 또 미모와 지성, 재산 등을 모두 겸비한 여자를 만나 결혼했다. 비록 부부관계가 원만한 편은 아니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부부의 정으로 채우지 못한 인정욕과 즐거움을 직업과 카드놀이로 해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식들도 그다지 속을 썩이지 않고 자랐다.
작중에서 그가 얻는 데 무척 애를 먹었던 건 연봉 5000루블짜리 자리가 전부였다. 그러나 독이 됐다. 그 자리를 얻어 좋은 집을 얻은 이반 일리치는 너무 신이 난 나머지 집을 꾸미다 옆구리를 다쳤다.
이후 그가 죽기까지 걸린 시간은 3개월. 이반 일리치가 산 채로 침실이라는 무덤에 갇힌 기간이다. 가족을 증오하고, 동정을 갈구하며, 희망을 품다가 다시 좌절하고, 절망하며, 비명을 지르다 마침내 체념한 채 빛을 보기까지 걸린 시간이기도 하다.
그의 비참이 나의 비참을 위로했다. ‘어차피 끝난다. 인간인 이상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내가 발버둥 친다고 안정된 삶이 보장된 건 아니다.’
그러자 편안해졌다.
글쎄, 톨스토이가 전하려던 메시지가 이것이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톨스토이의 작품을 많이 읽지 않았기에 더더욱 모르겠다.
그러나 세속적이고 아직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내게 타인의 불행은 자주 나를 위로한다. 고통에서 벗어날 뚜렷한 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이걸 함께 짊어질 동지가 있다는 점이 무척 든든하게 느껴진다.
부디 언젠가 이 작품을 다시 읽을 때에는 내가 한결 성숙한 사람이 되었기를 바란다. 이반 일리치에게 위로를 받기보다 좋은 삶을 살지 못한 그를 동정하고 안타까워하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