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영화 리뷰]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지난해 8월 중순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 재개봉했다고 한다. 관람객이 썩 많진 않았던 모양이지만 이 영화가 재개봉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무려 20년 된 영화가, 그 서사가 아직도 생명력을 갖고 있다니.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2007년 처음 개봉한 영화로 2003년 출판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어쩐지 씁쓸하다.
내가 이 작품을 처음 접한 건 20대 중반 소설을 통해서였다. 읽고 나서 너무 감명을 받은 나머지 책을 사기까지 했다. 당시 내 감상은 이랬다. “마츠코가 나 같아”.
그러자 남자 동료가 내게 “내 주위 여자애들은 다 그렇게 말하더라”고 했다.
왜 그 주위의 여자애들은 마츠코가 자신처럼 느껴졌을까. 왜 이 서사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호소력을 지닐까.
마츠코가 나처럼 느껴졌을 때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상태였다. 자존감**은 낮다는 건 자기 자신을 존경하지 않으며 하찮게 여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네이버 사전에 따르면 자존감은 ‘스스로 품위를 지키고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을 뜻한다. 품위는 사람이 갖춰야 할 위엄(존경할 만한 태도나 기세)이나 기품(고상한 품격)을, 존중은 ‘높여서 귀중하게 여김’을 가리킨다.
처음으로 이 소설을 접할 당시 나는 무조건적인 인정이 고팠던 것 같다. 왜 아니겠는가. 마츠코처럼 나 또한 학창시절 내내 전투적으로 살았다. 부모님께, 그리고 학교에서 나를 증명하기 위해 성적을 올리느라 고군분투했다. 대학교를 졸업했을 때에도 증명에 대한 압박은 여전히 강력했다. 사회초년생일 때에는 이런 압박 강도가 더욱 거세졌다. 매일매일 모든 일상이 새로웠고 그만큼 매일매일 무너지곤 했다.
그래서 누군가 나를 안아주길 바랐고 사랑해 주길 원했다. 그때는 값싼 호의에 쉽게 넘어갔을지도 모를 만큼 약한 상태였다.
그래서 마츠코가 이해됐다. 마츠코도 아버지의 사랑만을 목표로 유년과 10대를 살았다. 그러나 병약한 여동생으로 인해 아버지의 사랑을 결국 얻지 못한 채 끝이 나고 말았다. 교직 생활 중에는 강간을 당했고 자신을 좋아하던 남교사는 그녀를 쉽게 놓아버렸다.
이후 만난 소설가 테츠야는 마츠코를 사랑했지만 결국 자살로 마츠코를 떠나갔고 타케오는 테츠야의 여자를 취했다는 만족감을 위해 마츠코를 곁에 뒀을 뿐이다.
마츠코가 자신을 내동댕이치는 심경으로 떠난 터키탕에서 만난 남자는 두 명, 오노데라와 아카기다. 아카기는 마츠코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않았고 오노데라는 마약으로 그녀를 망가뜨리고 그녀가 몸을 팔아 번 돈 마저 탕진했다.
분노한 마츠코는 오노데라를 죽인 뒤 미용사 시마즈 켄지와 한 달 정도 같이 살며 꿈같은 일상을 보냈지만 결국 감옥에 갇혔다. 출소한 뒤에는 류 요이치를 만난다. 그녀의 교사로서 삶을 끝냈고 희망마저 박살 낸 남자.
한평생 자신을 사랑해 줄 누군가를 찾아 부유초처럼 떠다닌 셈이다.
조금이라도 자신을 사랑해 줄 것 같은 사람을 만나면 마츠코는 스스로의 품위를 내던지고 자기자신에 대한 존중마저 포기했다. 아니다. 자존의 가치를 너무 낮게 평가해 누구라도, 어떤 형식의 사랑에라도 자신을 값싸게 팔아넘겼다.
나는 마츠코의 이런 서사가 ‘지팔지꼰(자기 팔자를 자신이 꼰다)의 정석’으로 여겨진다. 성장기부터 자존의 기반을 닦을 만큼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이는 조금의 사랑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기자신을 값싸게 내놓는 경우가 흔하다. 그래서 낮은 자존감은 종종 지팔지꼰으로 귀결된다.
“맞아도 괜찮아, 죽어도 괜찮아, 외톨이보다는 나아”라는 영화 속 마츠코의 대사가 이를 함축한다.
낮은 자존감에 따른 지팔지꼰은 특히 여성들에게서 많이 두드러지는 현상인 것 같다. 지금이야 많이 개선됐다고 하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20대, 30대 여성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격 검증의 연속이었다.
수많은 여자아이들이 아들이 아니라서 송구한 마음으로 태어났다. 부모, 조부모 등 가장 가까운 혈연이 가해자가 됐다. 자존의 토대를 놔줘야 할 이들이 오히려 그것을 무너뜨린 셈이다. (마츠코의 경우 같은 딸로서 여동생 쿠미와 애정 경쟁을 펼쳤지만 건강하다는 이유로 뒤쳐졌다.)
그렇게 태어난 여자들은 ‘살림 밑천’ ‘맏딸’ ‘K-장녀’ 혹은 ‘이래서 딸이 좋다고 하나’라는 프레임에 다시 갇혔다. 사랑받기 위해 똑소리 나게 살림을 해낼 줄 알아야 했고 집안의 모범이 되어야 했으며 남자아이들보다 더 얌전해야 했다. 커서도 부모에게 좀더 헌신해야 했다. 그것이 사회 보편적으로 이들에게 기대되는 것이었기에. 여자아이들이 사랑을 받기까지는 꽤 많은 조건을 통과해야 했다는 얘기다.
장성한 뒤 사회생활이나 이성관계에서도 자존의 훼손은 계속됐다. 화장을 하지 않는 것은 예의가 없는 것이라는 말을 듣는 등 여성의 외모에 대한 사회적 압박은 여전히 거세다.
사회인으로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초년생일 때에는 어린 여자에게 기대되는 태도와 직장인으로서 역할 수행을 동시에 요구받는다. 문제는 이 두 가지가 상충된다는 점이다. 어린 여자에게 요구되는 태도를 지키면 직장인으로 리더십 등 개인적 역량을 저평가받고 직장인으로서 직무수행에 힘쓰면 재수 없다거나 똑똑한데 정이 없다는 평가가 뒤따른다.
수많은 고비를 넘기고 넘겨도 외로운 가운데 누군가 속삭인다. “널 사랑해.” “너와 함께 있고 싶어.” “나는 그저 너만을 원해.” 그리고 마치 있는 그대로의 그녀들을 수용하는 듯한 언행을 보여준다. 여기에 넘어간 여자들은 연인의 사랑에 자존의 뿌리를 내리려 한다.
이건 사실 도박에 가깝다. 운이 좋다면 좋은 베필을 만나 부족한 자존감을 채워가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반대의 경우 가정폭력, 가스라이팅 등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네가 그렇게 행동하니까 맞는 거야”, “네가 나한테 잘하면 내가 널 다시 예전처럼 예뻐해 줄게.”
특히 가정폭력을 당했거나 착한 딸이 돼야 한다는 압박으로 점철된 어린 시절을 보낸 여성들은 더더욱 그렇다. 애초에 좋은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문제를 인지하지도 못한 채 제2의 테츠야에게 맞으면서 살거나 제2의 오노데라에게 착취당하며 산다.
소설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영화에서는 마츠코의 사랑을 신에 비유한다. 예수 등 기독교적 신이 인간에게 무조건적 사랑(아가페)을 베풀었듯 마츠코도 끊임없이 사랑을 퍼줬으나 세상이 이를 알아주지 못했다는 식이다. 예수님이 사랑으로 죄인을 교화했듯 마츠코는 류를 끝내 바른 길로 인도했다는 비유도 나온다.
나는 이런 비유가 정말 웃기다고 생각했다. 말이 좋아 사랑이지, 마츠코가 만난 남자들은 그녀를 착취했다. 애정을, 신체를, 금전을, 가사노동을 착취했다. 마츠코의 말로는 불행했다. 끝내 사랑에 배신당하고 불량배들에게 무참히 얻어맞아 죽었다.
마츠코는 그녀의 애정을 이용하려던 이들에게 착취당한 피해자다. 마츠코의 관점에서 아주아주 좋게 포장한다면 사랑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피해자가 용서한다고 착취를 애정으로 포장할 수 있는가?
물론 마츠코의 죄도 있다. 그녀에게도 자신의 삶을 구제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긴 있었다. 애초에 수학여생에서 자신이 돈을 훔쳤다고 말하지 않아야 했고 터키탕 백야의 매니저인 아카기를 따라갈 분별력은 챙겼어야 했다.
‘낯선 천국이 아닌 익숙한 지옥’을 택하는 지팔지꼰의 전형이라 보면서 화가 날 정도였다. 어쩌면 계속된 불행으로 분별력을 일찌감치 상실한 건지도.
약 10년 전 인상 깊게 읽었던 작품이라 그런지 글이 길어졌다. 그때와 지금의 감상평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과거 나는 마츠코의 마음과 사랑에 절절히 공감했다. 나도 사랑하고 싶었고 사랑받고 싶었다.
지금 나는 사랑받고 있고 사랑을 하고 있다. 성장기부터 지속된 괴로움에 대해서도 오랜 공부 끝에 해결의 실마리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지금 내게 마츠코는 공감의 대상이기보다 분석의 대상이었다. 내가 과거에 괴로웠듯 이 서사에 공감하는 누군가가 얼마나 괴로운 시간을 나고 있을지 짐작돼 마음도 아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알고 있다. 만일 내가 지금의 인연을 잃는다면 나는 다시 또 마츠코에 공감하고 있을 것이다. 여전히 나는 자존의 기반이 단단하지 못하므로.
다시는 이 서사에 공감하고 싶지 않다.
또한 이 서사에 공감하는 이가 없길 바란다.
그런 삶들이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