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1984>를 세 번 정도 읽은 것 같다. 중학생 때, 20대, 그리고 지금.
과거에 이 작품은 정치적, 사회학적, 미래학적으로만 다가왔다. 당시에는 모든 문학을 사회적 성찰의 결실이라고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텔레스크린이 스마트폰과 다르지 않다, 전체주의의 위험성 등 진부한 시사점만 얻고 뿌듯하게 책장을 덮었다.
30대 중반이 된 지금은 그때와 조금 다른 게 느껴진다.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의 무력함과 비겁함이 유독 눈에 띈다.
도대체 그가 한 게 뭐가 있단 말인가? 기껏해야 사상경찰이 감시하던 상점에서 질 좋은 공책을 사서 몰래 일기를 쓴 것, 호감을 표시하던 여자와 잔 것, 형제단원인 오브라이언의 제안을 수락해 형제단 가입 의식을 치른 게 전부다.
물론 문학적 관점에서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상징성이 클 수 있다. 오세아니아의 전체주의 정부가 당원 개개인의 사고방식마저 완전히 잠식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만큼 일기를 쓴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항거행위다. 성욕을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는 당의 눈길을 피해 섹스하고자 줄리아와 관계를 맺은 것도 엄청난 반항행위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무려 윈스턴은 형제단에 가입도 했다. 비록 형제단 가입을 위해 책 한 권 읽은 게 단원으로서 활동의 전부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의 행동을 저항**이라고 표현하기에 한없이 미약해보인다. 반항** 정도가 적절해보인다. 그가 제아무리 죽음을 각오했다한들 정작 당을 붕괴하거나 타인을 설득하는 등 시도는 없었다. 또 일기쓰기를 제외하면 자신의 반항심을 타인에 의지해서 표출하려 했다는 점에서도 비겁하다.
(**저항은 체제 변화와 개혁을 목표로 하는 조직적이고 장기적인 운동이고 반항은 단기적이고 감정적인 반발 심리에서 비롯된 행동-출처: 네이버 AI브리핑)
애초에 윈스턴은 줄리아가 사상경찰일지 모른다고 생각해 그녀를 강간한 뒤 죽이려는 마음을 품었다. 줄리아가 연심을 품고 있다는 점을 확인한 뒤에도 밀회의 장소 대부분을 줄리아에게 맡겼다. 오브라이언이 사상적으로 결이 같다고 생각했을 때에도 그가 먼저 접근하지는 않았다. 오브라이언의 접근을 기다리다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타인이 없었다면 윈스턴은 기껏해야 일기를 쓰다 정맥류성 궤양으로 죽었을 것이다.
왜 윈스턴은 그토록 무기력할까?
나는 두 가지를 생각했다. 첫 번째는 작가의 개인적 환경이다. 작가는 필연적으로 주인공에 자신을 투사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저자인 조지 오웰이 당시 힘든 시기를 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소설을 쓰기 1년 전 아내를 잃었고 집필 당시에는 폐결핵이 도진 데다 가난하기까지 했다. 투병, 가난, 쓸쓸함, 그리고 혼자서는 이 상황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무력감이 윈스턴에게 드러난 게 아닌가 싶다. 저자가 “병이 그렇게 심하지만 않았다면 이 소설도 그다지 어둡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는데, 만일 그가 그토록 아프지 않았더라면 주인공이 덜 무력하지 않았을까.
두 번째는 지식인 특유의 무력함이다. 작가 등 글을 쓰는 지식인은 대개 머릿속에서만 자유롭고 활기차다. 대단한 사회적 명성을 떨친다고 해도 명예가 전부일 뿐 권력 따위 없다. 그가 아무리 글을 써서 사회를 비판한들 기껏해야 여론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을 뿐 실제로 무언가를 바꾸는 사례가 극히 적다.
비대한 자아와 거대한 이상, 현실의 충돌은 지식인들이 흔히 겪는 일이다. 다시 말해 윈스턴은 대단한 저항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비대한 자아 탓에 저자도, 윈스턴도 일기쓰기와 성관계, 형제단 가입을 과대평가한 것에 그친다는 얘기다.
<1984>에서 또 한 가지 눈에 띈 건 줄리아라는 캐릭터의 평면성이다. 작중에서 줄리아는 전체주의가 제아무리 억누르려 애써도 튀어나오는 인간성의 발현을 상징한다. 줄리아는 특히 성욕을 대변한다.
왜 사랑이 아니라 성욕일까?
윈스턴과 줄리아의 관계는 연인이라기보다 섹스 파트너에 가까워 보인다. 윈스턴은 줄리아와 정신적으로 교감하는 일이 거의 없다. 윈스턴은 역사에 관심이 많지만 줄리아는 시큰둥하다. 사상적으로는 오히려 당에 물든 편이다. 이중사고를 훌륭히 해낸다. 의문을 품지 않고 의심은 그 즉시 없애며 필요할 때에만 필요한 기억을 꺼낸 뒤 다시 묻어버린다. 줄리아가 원하는 것은 당에 적당히 맞춰주면서도 필요할 때 즐기는 것뿐이다.
그래서 난 줄리아의 행보가 이해되지 않았다. 도대체 줄리아는 왜 윈스턴을 따라 형제단에 가입한 걸까? 몰래 성관계를 즐겨도 어차피 걸리면 죽는다. 굳이 형제단에 가입해 더 큰 위험과 부담을 감수할 필요가 뭔가? 그렇다고 그녀가 윈스턴처럼 대단한 저항 정신을 품고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소설적 개연성 측면에서도 굳이 줄리아가 제 발로 형제단에 가입할 필요는 없었다. 단순히 ‘윈스턴과 즐겼다는 혐의로 사상 경찰에 잡혔다, 윈스턴과 함께 형제단에 소속돼 당 체제의 전복을 모의했다는 혐의를 받아 고문을 당했다’ 정도로 끝냈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난 줄리아에 대한 묘사가 <1984>의 흠처럼 느껴졌다. 지나치게 성의가 없었다. 이또한 여성과 사랑에 환멸을 느낀 작가 개인의 환경, 당시의 시대적 배경(1900년대 초반 미국)이 작용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윈스턴은 무기력했고 줄리아는 지나치게 평평했다. 30대 중반, <1984>에 대한 소회다. 10대와 20대때 한창 사회 비판적 사고를 키워야 할 시기에 이 작품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소설적 개연성, 캐릭터의 입체성을 놓고 본다면 다소 아쉬운 작품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