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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xxsxoxun Oct 07. 2021

미학 에세이,
이해할 수 없는 아름다움

사유하고 표현하라

백민석 지음|알에이치코리아 출판| 256쪽|값 16,000원|발행일 2021년 9월 15일



미학(美學, Aesthetics)이란, '아름다움'을 다루는 학문이다. 대상은 다양하다. 인간마다 취향이 존재하듯 그들이 가진 미적 가치는 미세하게 다르고 표현하는 수단도 각양각색이다. 그러니 경험이 부족한 본인이 '미학'을 정확히 정의하기 어렵다. '미학'이란 라이프니츠볼프학파(Leibniz-Wolffische Schule, 독일 중심의 사상가 총칭)의 알렉산데르 고트리프바움가르텐(A. G. Baumgarten, 1714∼1762)가 시작한 학문으로 이성적 인식이 아닌 감성적 인식에 의한 학문의 존재를 수립하고 이를 에스테티카(Aesthetica)라 명칭하였다. 미학은 철학이 한 갈래로써 시작될 수 있었고, 대체로 관념론적 미학과 경험주의 내지 심리학적 미학 등으로 나뉘었다. (출처 드라마 사전)


예컨대, 미학은 철학의 한 부분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니 끝없는 토론이 가능하며, 명쾌한 답을 내릴 수도 없다. 가치관의 존중과 진정한 사유를 전달하는 계기가 되니 미적인 가치를 분석하는 행위는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필요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도 미학은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다. 당장 창문 밖 하늘만 봐도 아름다움에 관해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어디서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미처 발견하지 못했거나 이를 내면 밖으로 표출하지 않았을 뿐이다. 미학은 말 그대로 미(美)를 논하니, 대상을 찾자면 가까운 예로 우리는 예술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술의 정의는 본디 가치 없는 아름다움이니, 대상으로 삼기 좋다. 우리는 작품을 통해 미의 가치를 발견하고 시대적 미학과 의식에 대해 분류하고 분석할 수 있다.



예술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소비하게 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예술은 작품을 소비하면서 작품의 의미까지 사유하게 하며, 사유의 과정을 통해 소비자를 윤리적 판단에 이르게 한다. (중략) 예술은 사유하게 한다. 사유를 촉발하는 힘까지 예술의 일부이다.

<이해할수 없는 아름다움>  중 자네는 집을 지으려 했던 것이 아닌가?, 17~18p



<이해할 수 없는 아름다움>은 예술을 통해 상상이 어려운 미학을 우리가 눈에 보이는 예술을 대상으로 하여 사회문화적인 현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하였고 이를 언어로 표현한 에세이는 실체화된 질문을 통해 사유할 수 있게 한다. 저자 백민석은 총 19개의 질문을 던진다. 질문 속에는 굉장히 다양한 분야의 작품들이 등장한다. 재즈, 그림, 조각, 소설, 영화 등 영역을 가리지 않고 작품이 시사하는 바를 질문의 근거와 답변으로 활용해 작품의 표현과 형태를 다룬다.






아는 만큼 보이고 경험한 만큼 깨닫는다.

도저히 사람 살 데가 아니더군, 이해하겠나?

왜 사람들은 최악의 상황은 끝났다고 장담하는 거죠?



개인적으로 좁은 시야와 매몰된 생각을 싫어한다. 물론, 매몰된 집중이 만드는 전문성도 있지만, 본인은 나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숲을 보는 가치를 중시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내 안에 집어넣어야 한다. 경제적이나 시간상으로 모두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쉽게 두 조건 모두 허락되지 않았고, 그런 본인이 유일하게 경험을 채울 수 있는 통로는 바로 작품을 통해서였다. 특히 영화나 책을 통해 세상을 접했다. 한계는 존재했다. 실전과는 작품으로 여과해 배운 세상은 이상적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알고 싶어도 절대 모를 것들이 있다.


저자가 소개한 <소녀 어부>와 <고아가 되다>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작품 배경은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기 전으로 내가 경험하지도 못한 시절을 가지고 있다. 그림 <소녀 어부>는 거지 소녀라는 별칭이 붙여져 있다. 헝클어진 머릿결, 해진 옷과 지친 얼굴색이 우리 나이대의 보통 소녀들과 같지 않다. 저자가 말하듯이 '거지'라는 상황이 우리 현대 사회에는 일반적이지 않지만, 당시는 일반적인 그들의 모습이라 작품으로 남겼다 하니,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하다못해 나는 군부독재 시절을 성장기로 둔 부모님을 두었고, IMF가 터진 1997년 전에 태어났다. 당장  부모님 세대와 공감하기도 어렵다.



<소녀 어부>, 일리야 레핀(Ilya Repin), 1874년


<고아가 되다(Orphaned)>, 니콜라이 카사트킨(Nikolai Kasatkin), 1891년>



<고아가 되다>라는 작품 또한 그렇다. 묘지는 부모로 추정되고, 갓 묻어 풀조차 자라지 않는 묘지 앞에 털썩 주저앉은 아이들의 옷차림도 낡았다. '죽음'이 일반적이지 않은 나의 시대와 멀게 느껴질 뿐이다. '가난'이 무엇인지 체감하고 있지만, 시대별이 정의하는 일반적인 가난함은 다르다. 그리고 가난함의 기준 또한 세상이 복잡해짐에 따라 무수히도 나뉘며 경제적 빈곤을 넘어서 정신적 빈곤까지 논하기도 한다. 당대 '가난'은 따스운 밥 한끼 조차 허락되지 않을 때가 아닌가? 오히려 다이어트를 한다며 금식을 하는 요즘과는 다르다.


이렇듯 작품 속에 당대 사회를 반영했지만, 우리가 '학습'할 수 있지, 진정한 '체감'은 불가능하다. 학습을 통해 머리로 이해하고 짐작할 뿐이다. 이것은 형체가 없는 무형의 존재기에 실체를 언어로 표현하여도 수용하는 의미가 다를 수 있다. 이 또한 '미학'에 적용되는 원리가 아닌가 싶다.





최근 감상한 영화를 예를 들어 말해보겠다. 1997년도 웨이 왕 감독의 <차이니즈 박스(Chinese Box)>는 영국에게 식민지배를 받던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는 시점을 담았다. 분명의 동양의 것인데, 서양의 것과 닮아있고, 영국의 기자 존(제레미 아이언스)는 마지막 홍콩을 캠코더에 담는다. 비비안(공리)과의 사랑과 진(장만옥)과의 우정 등, 연기력과 영상미가 있어 취향이었던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나는 정확히 캐치하지 못했다. 아마 빼앗긴 조국을 돌려받는다는 기분과 그리고 나의 조국이 다른 사상을 가진 나라에 속한다는 등. 지금까지도 말하기 애매한 이 문제를 과연 본인이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 또한, '분단국가'라는 특이점이 있긴 하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갈래로 학습할 수 있으나 평생 체감하지 못할 감정이다.


또 다른 예시로, 시간과 경험에 따라 느낀 점이 달랐던 홍콩 영화가 떠오른다. 바로 2000년에 개봉한 <화양연화(花樣年華)>는 양조위와 장만옥 주연으로 '가장 아름답고 찬란했던 시절'을 뜻한다. 어린 나이에 접했던 탓에, 스토리도 이해하지 못했고 그저 분위기가 예뻐 좋아했던 것 같다. 그리고 여러 포스팅을 통해 그제야 불륜 영화라는 걸 알았고 재감상을 통해 그들의 사정을 알았으며, 20대 후반이 되니 이것이 그저 부정적인 면을 담은 영화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아마 더 나이를 먹고 언젠가 결혼을 한다면 또 다르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 가치가 대중에게도 통했는지 21년 3월 즈음에, <왕가위 리마스터링>으로 재공개됐다.


저자는 작품 속 우리가 눈치채지 못한 지점들을 모아 질문으로 만든다. 질문은 가끔 생각해보았던 주제와 비슷하기도 하다. 질문을 통해 어떻게 '사유'할 것인지, 질문의 '시기'는 언제일 것인지, 답변할 수 있는 '견문'은 갖춰있는지 등 실재하는 작품을 일상의 선상에 올려두어 알맞은 핏(fit)을 찾아 다양한 영역으로 넓힌다. 끊임없이 사유하고 발전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나의 출세를 위함일 수도 있지만, 다르게 표현할 수 있다. 아는 만큼 즐길 수 있고 표현할 수 있으며, 그만큼 커다란 관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경험한 만큼 느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으며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내가 생각하는 미학(美學, Aesthetics)은 사유의 발단이며 표현을 위한 수단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사유하고, 표현한다.

나만의 미학 에세이



저자는 생각하지도 못한 여러 작품을 엮는다. 아 물론, 내 기준에서 말이다. 한 작품을 보고 여운에서 벗어나질 못해 매몰되는 나와 달리 작품과 작품을 엮는다. 사고의 확장을 느낄 수 있다. 일반인이 소비하는 작품량과 작가가 소비하는 양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 어떻게 한 질문 속에서 방대한 작품들의 시사점들이 한데 어울릴 수 있을까? 시간이 쌓아올린 견문을 토대로 생겨난 질문일텐데, 작가는 어떻게 지난 시간을 보내왔을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질문은 총 19개로 목차 또한 19개다. 모두 의문형으로 끝마친다. 눈썰미가 좋은 사람은 알겠지만, 이 목차는 전부 작품에서 나온 대사를 차용한다.





자네는 집을 지으려 했던 것이 아닌가?
아빠, 내 이름은 알아?
언니, 집 없어요?
우리는 왜 매끄러움을 아름답다고 느끼는가?
우린 그냥 벌레야, 모르겠니?
당신들, 정체가 뭐야?
도저히 사람 살 데가 아니더군, 이해하겠나?
왜 사람들은 최악의 상황은 끝났다고 장담하는 거죠?
당신은 계속 당신인 거야?
선생님은 자기가 싫어진 적이 있으세요?
많은 재즈 거장들이 요절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삶을 충분히 표현하다 보면 나오지 않겠어요?
백 년 후엔 이걸 볼 사람도 없을 텐데 왜 모아?
함께 연주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지?
활동 증명을 통해 예술인으로 인정, 등록되었는가?
한국인들이 이 전쟁을 원했단 말인가?
어째서 흐르는 피는 남들에게 충격을 줄까?
한심한 외다리 꼴로 춤을 왜 추냐고?
생각 근심 속에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해할 수 없는 아름다음> 목차



작품은 직접 말하지 않는다. 영화같은 경우는 연출과 대사를 통해 전달할 수 있어도 100%까지 전달하기 힘들다. <이해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목차도 작품의 대사에서 빌려왔다. 작가는 대사를 인용해 사유의 대상을 전달한다. 이렇듯 어디선가 예술을 해석하는 리뷰가 생겨날 것이고, 마련된 장을 통해 감상을 공유한다. 각종 커뮤니티나 혹은 오프라인 모임에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즉, 작품은 언어로 재탄생되어 사유하고 해석되는 셈이다. 작품 자체는 말할 수 없다라는 뜻이 바로 이렇다. 인간이 감상하고 표현하기 위해선 어떻게든 '언어'의 힘을 빌려야한다. 사유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러면 또 다른 고민이 생긴다. 사유의 깊이와 길이가 어느정도인지 괜히 신경쓰인다.



신학철은 고초를 겪은 <모내기>를 설명하면서 "우리 삶을 충분히 표현하다 보면 (그런 작품이) 나오지 않겠어요?" 라고 묻는다. 그럴 수도 있겟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아무리 충분히 표현해도 그런 작품은 아노지 않는다. 호프스태터도 비슷한 말을 했다. "특출한 사람들이 지닌 위대한 재능은 (중략) 독창적이고 중요한 유추를 통해 누구도 이전에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을 포착하는 데서나"온다. 이런 재능은 어느 시대에서나 매우 드물다.

<이해할 수 없는 아름다움> 중 우리 삶을 충분히 표현하다 보면 나오지 않겠어요?, 161~2쪽



사유를 표현하고 발견을 가치를 찾아내는 속도가 남다른 사람이 있다. 가끔 비범한 사람을 볼 때면, 자신이 초라해질 때도 있다. 평생 쫓아가도 쫓아가지 못할 사람. 타고난 재능을 따라잡지 못해 허탈감이 찾아올 수는 있다. 애매한 재능을 탓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것에 쓰임새가 있듯이 우리는 타고난 것을 탓할 것이 아니라 경험을 어떻게 활용할지를 고민하는 방향이 바르다고 생각한다. 남과 비교하다 보면 그것은 평생 풀리지 않는 숙제나 다름없으니 이런 접근은 옳지 않다. 사유할 일말의 가능성조차 닫아버리는 셈이다.


모든 이의 경험은 같지 않고 그 수준을 나누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수도 있다. 사유는 서로의 관점을 터놓고 이해하기 위한 시작이다. 나를 알아갈 수 있는 계기이며, 이를 찾아가기 위한 첫걸음이다. 숨겨진 특출난 재능을 찾아 떠나는 모험을 시작도 하지 않는다면 너무 아깝지 않나? 그런 이유에서 미학은 어렵지만 쉽게 생각할 수 있다. 내가 느끼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면 되지 않나? 겉핥기식이어도 좋다. `아름다움`을 통해 우리는 이곳저곳 많은 곳에 흥미의 뿌리를 내릴 수 있다.



니콜로 부리오의 말처럼 미술 작품은 더 이상 "유토피아적인 상상의 리얼리티를 추구하"지 않고 "실재하는 삶의 방식이나 행위의 모델을 구성"한다.

<이해할 수 없는 아름다움> 중 작가의 말, 249쪽





누구나 취향과 기호가 있으며, 작품을 애정하는데 있어 이유가 단순히 감각적인 구도와 색채뿐일 수도 있다. 여전히 사람이 붐비는 '요시고 사진전' 또한 그렇다. 사람마다 전시회 방문 목적은 제각각이겠지만, 근본적으로 작품이 예쁘고 자신이 볼만한 가치가 있기에 방문한 것이 아닌가? 본인도 홀린듯 최근에 다녀왔다. 본인뿐만 아닌지 사진의 '이해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이끌려 몇개월이 지난 지금도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가끔 작품이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렵다해서 예술성이 있다고 착각할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쉽게 전달하기 어려운 여러 요소가 많이 섞여있어 이해하기 어렵거나 혹은 많은 요소에도 정교한 구조로 균형있는 감도를 자랑하는 작품도 있다. 책에서는 공포 영화 <서스페리아(Suspiria, 2019)>를 그 예로 들고 있다.


일반인은 보통 이해하기 어렵다면 작품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어쩔 때는 전문가 입장에서도 난해할 수 있다.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영화 자체가 복잡해서 그런거다. 그렇다고 단순하고 평이한 구조가 허술하다는것도 아니다. 복잡하든 단순하든 예술성은 단 한가지로 기준삼아 말할 수 없다. 예술품에 대한 정의도 넓어지고 있다. 예술을 구분하던 경계선은 많이 허물어졌다. 보통 예술은 실용성이 배제한 가치없는 아름다운 것을 뜻하는 바가 강했으나, 요즘은 예술을 통해 실용성 있는 물건을 만들고 오히려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될 만큼 PB상품이나 C2M 방식으로 접근가능하다. 상업 미술을 예술로 쳐주지 않는 20세기 후반과는 달리 요즘은 상업 예술이 남을 정도로 위상이 높아졌다. 아니, 어쩔 때 보면 전부인 것 같다.



예술이란 매우 긴 시간이 투자되어야 성과를 얻을 수 있는 분야다. 소설 장르를 봐도, 보통의 지망생이 소설가로 등단을 해서 첫 책을 내고 당당히 자기 세계를 구축할 때까지 십 년, 이십 년의 시간이 걸린다. 그 십 년, 이십 년 후를 바라보며, 지망생은 매일 시간을 내서 습작을 하고 열심히 책을 읽는다. 그러다 소설가가 되고 나서는 같은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당장의 효과를 바라고 읽는 자기계발서나 경제경영 분야의 책과는 달리, 소설가가 자신의 예술 세계를 고양하기 위해 읽는 책들은 딱히 어디 써먹을 데도 없다. 언젠가 읽은 예술이나 철학 서적들이 쓸모가 있게 되는 때는 영영 오지 않을 수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아름다움> 중 백년 후엔 이걸 볼 사람도 없을 텐데 왜 모아?, 171~2쪽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은 무엇일지 생각해보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보기 좋은 모양새에 끌린다. 본능적으로 탐미하고 '미학'을 찾는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여도 나는 정말 그렇다. 그것이 외면적이든 내면적이든 나는 유무형을 따지지 않고 그것이 가진 가치가 어여쁘다면 품고 싶어 한다. 같은 것이어도 내가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른다. 나의 삶에 나의 취향의 것들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비록 그 가치가 타인에게 의미가 없을 수도 있고 영영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부질없는 행위라 생각하는 관점도 있다.


하지만 과감하게 권유해보고 싶다. 그런 뒷일은 나중으로 생각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우는 시간을 가져보길 권장한다. 그런 의미로 <이해할 수 없는 아름다움>은 가볍게 취향의 사유를 시작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 같다. - 아는 작품이 나오면 괜히 반갑더라. - 각기 다른 분야에서 새로운 시너지를 얻고 싶을 때, 가볍게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밀물이 들어오듯 다른 작품을 소개하는 순서로 넘어가는 것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끌려 간다. 생각해보지 않았던 지점을 연결하다 보면 어느 날, 풀리지 않았던 문제가 퍼즐 조각이 맞춰지듯 답이 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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