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속 우리의 동족, 고래가 품은 지구의 비밀
고래가 가는 곳(Fathoms : The environmental story of The Whale)
바닷속 우리의 동족, 고래가 품은 지구의 비밀
리베카 긱스 지음|배동근 옮김| 496쪽|값 19,800원|발행일 2021년 8월 30일|바다출판사
고래 낙하(Whalefall)는 고래가 낙하하는 것을 말한다. 학계에서 불리는 명칭인 '고래낙하(Whale fall)'는 고래가 사망 후 바닷속으로 낙하해 시체가 소멸하는 과정을 뜻한다. 우리가 짐작할 수 있듯이, 거대한 몸집으로 인간에게 웅장한 존재감을 각인시킨 고래는 사후에 자신의 눈알만 한 작은 바다 생물의 밥이 된다. '살'이 다 사라지고 유골만 남아 바다 미생물에 유골의 영양분을 나눠준다. 고래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자연 속으로 되돌아갈 때쯤, 고래는 비소로 완벽한 휴식을 맞이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만 마리의 고래가 빛도 들지 않는 심해 바닥 위에서 소멸을 맞이하고 있다. 그들은 전체 생태계에 자신의 살과 뼈를 기부한다.
저자 라베카 긱스(Rebecca Giggs)는 에세이스트로 호주의 퍼스 지역 출신이다. <뉴욕 타임스> <애틀랜틱> <호주 베스트 에세이> <호주 베스트 과학저술> <그란타> <이언> <그리피스 리뷰> 등 다양한 매체에 환경과 자연을 주제로 글을 썼으며, 작가로서 <고래가 가는 곳>을 처음 출간하였고, 이 책은 <모비딕> 이후 고래에 관해 가장 훌륭한 책이라는 평을 받았다.
그녀가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책의 서두에서도 밝히지만, 퍼스 해안가에 표류한 혹등고래의 죽음이다. 우리와 같은 '포유류'인 고래의 죽음으로부터 무엇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일까? 고래의 동공은 우리처럼 색의 구분이 없어 시선이 어디로 향했는지 알 수 없다. 버겁게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무게로 자신을 압박하는 혹등고래는 아직 어렸고, 인간들이 온 힘을 다해 바다로 보내어도 다시 뭍으로 표류했다. 이러한 과정을 지켜본 저자는 현장에 자원봉사자로서 퍼스의 해안가에 모여든 사람들과 글로 접하는 우리가 해안가의 고래에게 몰입시킨다.
거대한 동물은 즉시 죽지 않는다.
우선 일부만 죽는다.
혹등고래의 죽음은 전격적이지 않다.
<고래가 가는 곳> 16쪽, 프롤로그
자연 속의 고래는 경외의 대상이었지만, 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고래는 인간의 결정 하에 놓인 짐짝과도 같았다. 어떻게 안락 시킬 것인지, 그 안락으로 인해 발생하는 비용과 사체를 처리하는 방식에 대해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를 깨달은 저자는 <고래가 가는 곳>을 통해 고래의 자세한 기원을 샅샅이 살피고, 동물에 대한 인간의 이중적인 잣대를 꼬집는다.
'고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지인과 대화를 나눈 기억이 있다. 심도 있는 대화는 아니었지만, 개체가 감소하고 있는 고래에 대해 포경 사업으로 불거진 국가적인 이야기와 '고래' 자체가 주는 신비로움에 취해 피사체로 그리는 것에 대한 취향을 나눈 적이 있다. 하다못해 고래(whale)는 타투(tatoo) 도안으로 많이 거론되는 주제 중 하나다. 지금 인스타그램에 #고래 타투로 검색하면 수두룩하게 피드가 뜬다. 나 역시 고려했던 도안이다. 왜 사람들은 고래를 잊지 못할까? 어릴 적 아쿠아리움에서 보는 돌고래쇼가 인상 깊었던 것일까, 우리는 고래에 대해 막연한 호감을 느끼고 있다.
비단 현대의 우리들뿐만 아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고래는 자연의 신비이자 인간의 생활을 증진한 포유류로 우리가 손댈 수 없는 대상인 경이로운 생물이다. 하지만 인간은 고래가 제공하는 이로운 점들을 깨닫자 고래 산업은 활발해졌다. 18세기부터 고래기름을 얻기 위해 유럽부터 많이 행해졌으며, 그 시절을 담은 작품을 보면 고래 사냥을 하러 배를 타고 떠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도 여럿 담겨있다.
지금 바로 생각나는 작품은 크리스 헴스워스 주연인 <하트 오브 더 씨(In the Heart of the Sea, 2015)>와 미국 소설가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1818-1891)의 소설인 <모비딕(Moby Dick, 1851)>이 떠오른다. 소설은 직접 읽어보지 않아 모르지만, 고래에 관해 가장 유명한 책이며 흰 거대한 고래에 도전하는 포경선 선원들의 생활을 생생하게 그렸다 한다.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지만 론 하워드 감독 아래에 킬리언 머피(Cillian Murphy), 벤 휘쇼(Ben Whishaw) 등 유명 배우가 나왔다는 점과 실화를 모티브로 한 영화라는 점에서 거대한 해양의 존재감을 작품으로 감상하기 좋았다.
고래는 아낌없이 우리에게 온몸을 떼어준다. 19세기 선조들은 고래가 제공하는 세상에서 살았다고 한다. 바스크족(스페인 북부와 프랑스 남서부에 거주하는 민족, 네이버 지식백과 출처)은 고래고기를 시작으로 고래의 블러버(blubber)에서 '기름'을 뽑아낼 수 있다는 것을 알자, 그것이야말로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스크족 고래잡이들은 처음에 고래 고기를 팔았다. 가톨릭 교회가 육상 동물을 금지했던 금요일과 사순절에 고래 고기는 허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블러버를 끓여서 추출한 기름이야말로 돈이 된다는 것이 드러났다. 고래기름은 종류와 저장 방식에 따라 담황색에서 불그스레한 찻빛까지 다양한 색을 냈다, 원래의 냄새에다 화재로 타고 난 정어리 통조림 공장 같은 냄새가 함께 풍겼다. 고래기름은 지금의 식물성 기름보다 점성이 낮아 다양한 쓸모가 있었다. 섬유 공장과 금속 공장의 톱니바퀴가 부드럽게 돌아가게 했고, 양모 세척과 가죽 무두질을 용이하게 해 주었다. 고래기름은 연기를 피우지 않으면서 가로등을 밝혀 주었고, 공장과 가게를 밝히면서 업무시간을 늘렸고, 상가의 영업시간을 밤까지 늘렸다. (그래서 야간의 공공적 공간에 대한 개념을 바꾸었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고래기름을 범죄를 줄여 주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포경은 산업 생산과 상업을 현대적 모습으로 탈바꿈시켰다. 고래기름은 자동화를 이끌었고, 반복적인 목표 달성을 요구하는 작업 과정을 가속했고 작업 시간을 연장했다. 그것은 더 바르고 철저한 작업 일정을 요구하던 수많은 기업의 필요를 충족시키면서 그로 인한 자연 훼손을 예고했다.
<고래가 가는 곳> 68쪽, 고래기름과 소비문화
고래는 어떻게 보면 19세기 산업혁명의 뒷받침이다. 인간과 바다에 사는 거대한 포유류와 직접적이고 밀접한 관계는 '기름'으로 시작됐다. 하다못해 포경선에서 고래 블러버(blubber)를 끓이는 원료를 고래 내장 찌꺼기나 껍질로 사용했고, 고래를 치료의 수단으로,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을 블러버(blubber)를 파낸 고래 사체 구멍 속에 2시간 동안 내버려 두어 마치 스파와 같은 요양 치료를 한다던가, 고래수염은 단단히 굳혀 경찰의 곤봉이나 아이들의 장난감으로,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19세기 여성복의 상징인 코르셋에도 사용됐다. 고래의 신체 중에서 얼마 되지 않는 고래수염이 얼마나 많은 코르셋으로 재탄생했을까? 코르셋이 팔리는 수량에 따라 죽어간 고래의 숫자도 만만치 않은 것을 보여준다.
당장 이백 년 전의 고래는 사회적으로 이런 가치를 가졌다. 20세기에 겪은 전쟁 시절 때 고래기름은 국익의 상징이었으며, 지금은 무분별한 포경 사업으로 개체가 줄어든 고래를 보호하기 위해 포경 사업을 금했다. 일부 국가에서는 국제포경위원회(IWC) 총회에 다시 포경 사업을 상업적 허용시켜달라는 요구를 2018년에 요청했다고 한다. 포경 사업에 대해선 뉴스 기사 등으로 접했던 나는 정확한 서사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고래가 가는 곳>은 고래가 가는 길을 자세히 가리키고 우리가 어떻게 그들을 따라가야 할지 흐름을 자연스럽게 말한다. 필(必) 환경을 맞이한 지금은 크고 작은 단체에서 포경 사업을 반대하고 고래를 보호하고자 하는 분위기를 형성했다.
우리가 직접 아쿠아리움에 찾아가지 않는 이상 다큐멘터리로 접하는 게 전부인 고래는 본인에게 여전히 경이롭고 경외감을 갖게 하는 대상이다. 그들은 신비롭고, 우리가 보지 못한 세상에서 다른 것을 보고 느끼며 살아간다. 그들에게 호기심을 느끼는지 정확한 이유는 아직 모른다. 비록 리베카가 본 고래와는 다른 느낌이겠지만, 유치원에서 다녀온 견학 때, 돌고래를 봤던 첫 감상을 잊지 못한다. 아주 넋을 놓고 커다란 수족관을 눈을 반짝이며 지켜봤다. 그들은 존재만으로 유치원생의 얼마 없는 집중력을 순식간에 몰입시켰다.
가끔 감상을 표현하지 못할 때가 있다. '동물'을 보고 주체하지 못하는 감정을 누르지 못해 헐레벌떡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는다던가, 무심코 손이 먼저 나갈 수도 있고 아니면 감탄사를 내뱉기도 한다. 길가에서 산책하는 강아지를 보거나 SNS에서 유명 펫플루언서 인기만 보아도 인간이 동물에게 얼마나 많은 '좋아요'와 하트를 보내는지 알 수 있고, 은연중에 우리 일상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요즘 늘어나는 펫팸족을 보며 알 수 있다.
제4장 동물의 카리스마 중 '해변의 아기 돌고래'에서 작가의 혹등고래가 아닌 다른 일화가 실려있다. 장소는 호주의 퍼스 해안가가 아닌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산타테레시타로, 어린 라폴라타강 돌고래는 해변에서 숨을 몰아쉬며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됐다. 그들은 표류한 새끼 돌고래를 만지고 사진 찍었고 다음과 같은 헤드라인의 기사가 났다고 한다. '셀피를 찍느라 아기 돌고래를 죽인 관광객들.' 아마도 죽어가던 아기 돌고래는 그 핸드폰의 갤러리 속 몇천 장의 사진 중 아주 일부분에 불가할 것이다. 사진 정리 도중, 이미 삭제됐을지도 모른다.
요즘 자연과 자연 속 동물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할 때면 나는 무심코 이 이미지를 다시 검색해 본다. 무릎 반사처럼 치미는 욕지기를 누르기 위해 애써야 한다. 돌고래를 만져 보고 싶은 심정, 그건 이해가 된다. 그러나 나는 왜 그들은 만지기를 멈추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대해 납득할 만한 답변을 찾고 있다.
<고래가 가는 곳> 192쪽, 제4장 동물의 카리스마 중 '해변의 아기 돌고래'
자연 속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가는 순리는 태어난 이상 모든 생물이 누릴 수 있고 동물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생활권에 들어온 동물 얘기라면 다르다. 어릴 적, 우리는 동물원의 존재에 대해 전혀 의문을 가지지 않았고 동물은 오래전부터 인간의 손길 아래서 자라왔다. 인간을 위협하는 포식자 그룹도 존재하지만,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동물은 보통 인간에 의해 살아지고 죽어간다. 줄지 않는 유기 동물도 그렇다. 인간이 동물을 다루는 이면 아래의 모습이 바로 이것이라 생각한다. 원래 반려동물의 시작은 '애완'동물로부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반려'라는 단어를 앞에 붙인 지 몇십 년도 지나지 않았다, 인간의 영향은 동물 생태계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고래 산업은 과거 경제성 있는 사업이었다면 최근의 포경 산업은 철저히 정치적인 비즈니스로 발전한 모든 산업 기술은 고래 개체 감소 속도를 증가시켰다. 그들은 하다못해 지나가는 고래도 잡았다 한다. 대왕 고래, 참고래, 보리고래, 밍크고래 등, 포경선은 과거 가지 못했던 곳까지 정복했으며 어떤 고래 종은 남획으로 인해 그 개체 수가 수백 마리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 내부의 동물, 모닥불 너머로 움직이는 것에 전율하던 생명체, 그 동물도 또한 보호해야 한다. 과학이 헤아릴 수 없는 영역이 사라지면, 야생이 남김없이 다 밝혀지면, 우리의 인간성에 내재된 어떤 것도 또한 사라진다, 우리는 본래 야생에 속했던 우리 안의 동물을 죽여 없애고 있다. 경이로움을 아는 존재를 소멸시키고 있다.
<고래가 가는 곳> 398쪽, 제8장 미지의 표본들 '본 적도 없는 존재'
본인이 고래가 가는 곳에 호기심을 느낀 것은 순전히 고래가 주는 영향도 있었지만, 작가 소개 때문이기도 하다. <윌 스트리스 저널>은 "긱스의 문장은 우리를 감각의 바다에 빠뜨린다"라고 표현했고 <뉴요커>는 "대가다운 글이다" 라했으며, <이코노미스트>는 "놀라울 정도로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바다의 바닥에서 태양계의 먼 곳까지, 영겁의 광대한 공간에 걸쳐 있는 에세이"라고 표현했다. 비록 원어가 아닌 옮긴 이 배동근의 번역으로 한국에 출간됐지만, 감각적인 문장을 느껴보고 싶은 욕구가 제일 컸다. 영화에서도 동물적인 움직임과 감각적인 미장센에 주로 흔들리는 편이라 글자가 주는 감각은 어떤 것인지 느껴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한 '감각'이 어떤 종류이고 감도로 말한 것인지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알 수 있었다. 작가의 글은 감상에 빠지지 않았다. 혹등고래의 죽음을 계기로 고래를 글로 기록한 작가는 고래에 대해 필요한 지식을 쌓고 지식을 통해 경험을 사실적으로 전달한다. 촘촘하게 글자로 채워진 종이는 고래의 온갖 생생한 현장과 살아온 역사를 담았다. 리베카에게 고래의 표류는 퍼서의 혹등고래로 끝나지 않았다. 어느 날 뉴포트지역에서 또다시 고래가 표류했다는 소식이 전해져왔고 이번 고래는 애초에 죽었었다고 한다. 작가는 대중교통을 타고 몇 시간을 이동하여 고래의 죽음을 또다시 목격했다. 그전엔 우연히 보게 됐지만, 이번은 찾아간 셈이다.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퍼스의 때와 다름없는 인파가 모였고 근처 오피스 직원들도 나왔다고 한다.
고래 사체는 부패하여 악취를 풍겼고 고래 사체 주변에는 아무렇게나 버려진 비닐봉지와 분간되지 않는 갈매기 사이에 여전히 웅장하고 단단한 몸체를 자랑하며 썩어가고 있었다. 나는 궁금함이 생겼다. 이 고래는 어떻게 '처리'될까? 어찌하여 고래는 뭍으로 올라와 인간의 곁에서 죽음을 맞이했을까?
<고래가 가는 곳>은 한 사람이 고래에 대해 겪은 경험이 섞여 있다. 에세이지만 자연과학의 지식을 담았고, 생태계를 담은 지식 서적으로 분류하기엔 작가의 개인적인 감상이 전반적인 부분을 차지한다. 덕분에 책의 마무리까지, 책의 의도를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어렴풋이 느껴지는 분위기로 책을 이해할 뿐이다. 모든 것을 이해하진 못했지만, 이유는 알 것 같다. 작디작은 우리가 감히 거대한 고래를 책 하나에 담을 수 있겠는가?
책을 읽고 명확히 드는 생각은 없다. 머리는 오히려 텅 비어버렸고, 공간에 채울 것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 눈동자를 굴리고 있다. 아니면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나는 받아들일 준비가 된 기분이었다. 리베카 긱스의 <고래가 가는 곳>은 내게 경험을 공유하고 다음 생각을 위한 공간을 주었다. 책은 방안과 해결을 제시하지 않고 모든 경우를 생각하고 공유한다. 우리에게 선택지를 주었고, 선택지에 대한 설명으로 과학적 지식을 근거한다.
그리고 경외감을 느끼게 한다. 가끔 광활한 자연 속에 쏜살같이 빨려 들어가 파묻힐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광경은 매우 아름답고 황홀하지만, 자연 속에서 나는 매우 작은 부분이라 금방 없어질 것 같은 두려움에 빠진다. 그렇기에 매력적이다. <고래가 가는 곳>은 우리가 막연한 호기심을 느끼는 고래에게 없어지지 않을 감정을 더욱 키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마도 다시 이 책을 읽을 때, 나는 또다시 시간에 담담히 빨려 들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