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사는남자'가 1,500만 관객을 울린 이유

역사의 빈칸을 채운 사람들의 이야기

by 화니샘

장항준 감독의 <왕과 사는 남자>가 1,500만 관객을 돌파했다는 소식이다. 이는 한국 영화사에 또 하나의 기념비적 사건이라 할 만하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지만, 영화는 패자의 곁을 지켰던 이름 없는 자들의 기록이 될 수 있다.”

감독이 던진 이 메시지는 앞으로 제작될 수많은 역사 기반 콘텐츠에 적지 않은 영감을 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장항준 감독은 결말이 이미 알려진 이 서사를 어떻게 변주해 이토록 많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1. 시점의 대담한 전환: ‘왕의 기록’이 아닌 ‘백성의 기억’
기존 사극이 궁궐 내부의 권력 암투나 정치적 역학 관계에 집중해왔다면, 이 영화는 카메라를 유배지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돌린다. 왕위에서 쫓겨난 어린 ‘이홍위(단종)’를 단순한 정치적 희생양으로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그와 함께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거창한 대의명분 대신 “어린 왕에게 따뜻한 밥 한 끼 먹이고 싶다”는 소박하고 인간적인 마음을 서사의 중심에 놓는다. 이 낯선 온도가 관객에게 신선한 감동으로 다가간다.


2. 캐릭터의 변주: ‘기골 장대’ 한명회와 ‘상실’의 단종
장항준 감독은 익숙한 역사적 인물의 이미지를 과감하게 비튼다.

사극 속 한명회는 대개 왜소하고 음험한 책사로 묘사되지만, 이 영화에서의 한명회는 거구의 체격과 압도적인 위압감을 지닌 인물로 등장한다. 실제 기록에 등장하는 “기골이 장대했다”는 설정을 적극적으로 끌어와 공포의 실체를 시각화한 선택이 인상적이다.

무엇보다 백미는 단종의 재해석이다. 박지훈의 눈빛 연기는 감정을 겉으로 터뜨리기보다 내면에 쌓아 올리는 ‘상실의 미학’을 보여준다. 단종을 무력한 왕이 아닌, 자신을 돌봐준 백성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불러주는 ‘성숙한 영혼’으로 그려내며 관객으로 하여금 그를 자식이나 동생처럼 느끼게 만든다. 이른바 ‘단종앓이’가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지점이다.


3. ‘통곡 상영회’와 N차 관람 열풍
영화 외적인 요소 역시 흥행에 힘을 보탰다. 배급사는 관객이 마음껏 울 수 있도록 하는 ‘통곡 상영회’라는 기발한 상영 방식을 선보였다. 슬픈 역사를 보며 억눌린 감정을 함께 터뜨리는 경험이 입소문을 타며, 손수건 굿즈까지 등장했다. 이 흐름은 중장년층은 물론 MZ세대까지 극장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 장항준식 유머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비극적 서사 사이사이에 담백하고 위트 있는 호흡이 배치되어, 관객이 감정적으로 지치지 않고 끝까지 몰입할 수 있도록 돕는다.


4. 요약: 아는 결말, 그러나 처음 느끼는 온도
결국 장항준 감독은 “우리가 아는 것은 사건의 결과일 뿐, 그 과정을 채운 사람들의 마음은 기록되지 않았다”는 지점을 파고든다.

역사책 속 한 줄로 남은 비극을 살아 숨 쉬는 ‘사람의 이야기’로 바꿔낸 것. 그것이야말로 1,500만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 결정적인 이유일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영화는 관객의 위치 자체를 바꿔놓는다. ‘500년 만에 전 국민이 단종의 장례를 치른 것 같다’라는 말처럼 우리는 더 이상 역사를 내려다보는 관찰자가 아니라, 그 시간을 함께 하는 ‘증인’이 되었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눈물은 결말을 확인하는 감상이 아니라,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을 함께 통과했다는 감각에서 비롯된다. ‘통곡 상영회’라는 독특한 관람 문화 역시 이 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이야기를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관객을 그 이야기 안으로 끌어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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