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야기는 길어>는 카페 창업이 실패한 후 6년 동안 니트족으로 엄마인 후사에의 집에 얹혀 백수의 삶을 살아가던 미츠루가 누나인 아야코, 매형인 코지, 조카인 하루미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변화의 순간들을 담아낸 드라마다.
미츠루를 포함하여, 드라마에 나온 모든 인물들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서로의 동기, 서로의 의욕이 되어주는데, 인상적인 점은 한 사람의 변화에 한 명의 사람만이 개입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니트족이었던 미츠루가 6년만에 첫 구직 면접을 보러가기까지, 많은 사람들과의 교류가 필요했다. 6년간 얹혀사는 미츠루를 너무 구박하지 않고 오냐 오냐해준 엄마도 필요했고, 많은 생각과 과거에 대한 집착을 걷어내라며 정신차리라고 쉬지않고 갈구는(거의 패는) 아야코도 필요했고, 초라한 처지를 공유할 수 있는 동병상련의 코지도 필요했다. 또, 자신보다 한참 어린 하루미의 이야기에 귀기울여주고 이끌어주면서 동시에 자신 안에 있는 어린 마음을 돌아볼 수 있었던 시간도 미츠루에게 필요했다.
그 과정에서 미츠루만 변한 게 아니다. 예를 들면, 누나인 아야코도 변화했다. 과거를 소중히 다루는 미츠루의 섬세함은 아야코로 하여금 딸인 하루미의 전남편에 대한 그리움, 아야코에 대한 원망감을 이해하게 했다. 그리고, 좋아하던 밴드 베이스 활동을 포기하고 가족을 위해 일을 하기 시작한 코지의 책임감, 가족에 대한 사랑을 아야코가 알아차리게 했다.
한 사람이 변화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해주는 사람도 필요하고, 성향이 정반대라 내가 보지 않으려 하는 불편한 진실을 눈앞에 들이밀며 벼랑 끝에 서 있는 듯한 아슬아슬한 감각을 느끼게 하는 사람도 필요하고, 나보다 조금 더 어려서 도와주고 이끌어줘야하는, 그 과정에서 내 부족했던 과거를 돌아보게 해주는 사람도 필요하고, 나랑 상황이 비슷하게 비루해서 같이 궁상떨 수 있는 동병상련의 인물도 필요하다. 이 모든 캐릭터들의 모든 역할이 중요하다. 그리고 언젠간 그 캐릭터들 없이도, 그 캐릭터들과 함께 했던 시간을 양분삼아 그들이 해주었던 역할들을 스스로에게 해줄 수 있는 때가 온다. 그 사실을 되새기고 나니, 내 곁에서 나와 끊임없이 서로를 비춰주는 사람들의 존재감이 새삼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 시간과 상황에 따라 내게 더 임팩트를 주는 캐릭터는 달라지겠지만, 그럼에도 삶에서 그 모든 캐릭터들은 하나하나가 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 현재 내 삶에서 임팩트가 강한 캐릭터는 아마도 아야코 같은 캐릭터다. 겁 많고 느릿느릿 밍기적거리고 수동적일 때가 많은, 과거에 잃었던 것들에서 시선을 떼내는 걸 어려워하는 미츠루 같은, 그리고 나 같은 사람한테는 아야코 같은 사람이 큰 도움이 된다. 나 같은 사람들이 두려워서 피하는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손에 쥐어 내 눈 앞에 들이미는 사람. 들이미는 그 순간에는 당황스럽고 화나고 수치스러워 도망가고 싶지만, 결국 변화의 계기, 시작점이 되었던 순간들은 그 당황스럽고 화나고 수치스러웠던 순간들인 경우가 많았다. 결국 미츠루에게 있어서도 변화의 '시작'점이 되었던 순간은 아야코와 투닥거리고 논쟁하며 씩씩대었던 순간일 것 같다.)
어쨌건 이 드라마는 여러 인물들과 보내는 일상이 어떻게 하나의 삶을 변화시키는지, 그 느리게 켜켜이 쌓여가는 과정을 잘 담아낸 것 같다. 스토리 내에서 인물들의 역할 분담이 확실하고 깔끔해서, 드라마를 볼 때 잘 차린 11첩 반상을 맛보는 듯한 만족스러운 느낌이었다. 인물들과 함께 하는 일상의 무게감이나 온도감도 다양해서 좋았다. 어떨 땐 다정하고 따뜻하게, 어떨 떄는 서늘하고 냉담하게, 어떨 때는 무겁고 눈물겹게, 어떨 때는 유머러스하고 가볍게 함께 하는 모습들을 균형적으로 잘 담아냈다. 그리고, 드라마 에피소드 제목마다 그 에피소드에 함꼐 했던 음식, 물건의 이름들을 써놨는데(예를 들면 <야키소바와 바다>, <은행과 손톱깎이>), 그런 제목들 덕분에 드라마를 다 보고 나서도 드라마 장면장면을 구체적으로 회상할 수 있어 좋았다. 여러 모로 즐거움의 요소들을 잘 갖춘 드라마 같다.
카네코 시게키라는 각본가의 드라마는 처음 봤다. 최근까지는 영화 괴물 각본가였던 사카모토 유지 작 드라마들을 많이 봐서 그런지 더 새로웠다. 사카모토 유지의 작품들을 많이 보진 않았지만, 지금까지 본 작품들만 생각해보면 대체로 인물 한 명 한 명이 처한 특수한 환경과 내면 세계를 더 깊이 다루고, 그러다 보니 한 사람의 대사가 호흡이 길게, 느릿느릿한 속도로 이어져 그 대사를 뱉어낼 땐 1인극 같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비슷한 처지나 아픔을 지닌 인물들이 모여 유사 가족애, 유대를 형성하는 스토리가 많았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인물 간 관계성이 깊이가 있지만 약간은 단조롭고, 복합적이지 않은 느낌이었다. 약간 슴슴한 평냉 먹는 기분으로 보는 느낌… 그런 스토리들도 매력이 있지만 계속 비슷한 것만 보다보니 최근엔 질렸는데, 그런 찰나에 마주했던 이 드라마는 단비 같았다. 캐릭터 간의 티키타카를 볼 때면, 갓 물밖으로 꺼내어진 생선이 몸을 좌우로 팔딱팔딱 튀어대는듯한 긴박함과 생생함이 느껴져 그 장면에 나도 끼워지는 듯했다. 다른 드라마들을 보지는 못했지만, 카네코라는 사람은 다른 드라마에서도 인물들 간 대화의 역동성, 그 안에서 느껴지는 생동감을 특히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같은 가족 드라마여도 그걸 쓴 사람에 따라 내용뿐 아니라 담아내는 방식, 드라마에서 느껴지는 감각들이 어떻게 다른지 돌아보는 과정이 재밌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