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yla Dec 31. 2019

지지 않은 한 해

이기지 않았어도 괜찮아요

저는 스물몇살때부터 '나의 삶을 열렬히 사랑한다.'는 말을 종종하곤 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원하지 않는 나쁜 일들이야 말 할 것도 없이 많았고, 원해본 적이 없는 좋은 일들도 종종 생겼었지만, 제가 원하는 좋은 일들은 어떤 색이나 형태로든 간에 반드시 일어나고야 말았기 때 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운도 좋고 그 운을 제 것으로 만들 때 불안하지 않을 정도의 성실함은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었고 덕분에 스스로를 그럭저럭 좋아할 수 있었습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삶과의 싸움이 버거울 때에도 '그래봤자 정면으로 뜨면 내가 이길걸?' 하는 배짱 비슷한 걸 가지고 있었달까요.


그런데 2019년은 참 기묘했습니다. 유난한 일이 참 많이 일어났는데도 유난 떨 기운이 유난히 없는 한 해였어요. 제법 큼직한 사건들과 기본적으로 호들갑을 좀 떠는 제 성향에도 불구하고 그냥 종종 한숨을 쉬는 게 다였습니다. 성과를 냈지만 성취감은 부족했고, 기필코 써야만 했던 글은 썼지만 꼭 쓰고 싶었던 글은 쓰지 못 했고, 반드시 해야만 했던 말들을 위해 용기를 냈지만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말들도 함께 나왔습니다. 가장 생경했던 건,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도 잘못했단 생각은 들지 않았단 거구요.


권태와 마비, 어떤 부분에서는 회의와 허무, 뭐 이런 것들에 휩싸였던 것 같습니다. 불지옥이라 할지라도 선명했던 삶이였어서 이 낯선 잿빛 구름은 정말이지 견디기 어려웠어요. 휩쓸려 가는 삶이라는 것에 대한 반감으로 가득했던 20대의 날들이 안정감이라는 것의 가치에 눈을 뜬 30대의 밤을 죄책감으로 쑤셔댔습니다. 너가 꿈꾸었던 삶이 이런 모습이었냐는 질문 앞에 저는 고개를 숙였고, 눈을 마주치지 못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내가 사라져버려도 정말 괜찮겠다라고도 생각했어요. 저는 여러 곳에 있으면서도 없는 사람이었고 결국 존재와 부재 중 같은 시간을 가지고도 힘이 훨씬 센 쪽은 후자니까요.


사실은 이제는 얼추 답을 찾았고, 이 무력감과 싸워 이겼으며, 괜찮다는 말과 함께 희망감이 넘치는 새해 맞이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아서 힘들게 쓴 문장들을 다 지웠네요. 대신 그 숱한 선택을 마주할 때 고개를 돌리지 않고, 반칙을 하지 않고, 그리고 포기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잘 버텨주었다고. 그것만으로도 괜찮다는 뻔한 문장을 지웠다가 다시 씁니다. 조금 더 쉬운 방법과 얄팍한 요령 앞에서 '이 정도는 뭐.' 라는 생각이 들 때, 거기서 마저 져 버리면 저는 정말 남길 수 있는 문장이 하나도 없을 것 같아서요.


아무한테도 아무런 힘이 되지 않을 이 무기력한 글의 마지막은 제가 가장 힘이 없었을 때 읽었던 헤세의 <황야의 이리>에서 인용해 볼까 합니다. 정말로 사라져버리고 싶었던 헬싱키의 밝은 밤,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거기에 져버리진 않을 수 있을 만큼의 힘이 되어주었던 책이거든요. 새해를 맞이하는 마음새가 사뭇 다른 모두에게 딱 그만큼의 힘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높은 지혜에서 온 것이건, 아주 단순한 천진함에 불과한 것이건, 그렇게 순간을 사는 법을 아는 사람, 그렇게 현재에 살며 상냥하고 주의 깊게 길가의 작은 꽃 하나하나를, 순간의 작은 유희적 가치 하나하나를 귀하게 여길 줄 아는 그런 사람에게 인생은 상처를 줄 수 없는 법이다."



안녕 2019. 그동안 고마웠고 다신 보지 말자.

매거진의 이전글 청춘, 그 다음의 삶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